<들뢰즈, 유동의 철학>, 우노 구노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을 다 읽었다.
이 책은 정말 좋은 들뢰즈 입문서다. 이 책은 들뢰즈가 니체, 스피노자, 베르그송 등을 탐색하며 철학사가의 면모를 보이던 초기 시절의 작품 <니체와 철학>, 자신의 사유를 완성하고 전개해 나가던 중기의 작품 <차이와 반복>과 <의미의 논리>,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정신분석을 비판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정신분석해 나갔던 후기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 그리고 <시네마> 등을 쓰며 예술론을 펼치던 만년의 작품 등 들뢰즈의 주저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들뢰즈의 사유 맥락을 따라가 보는 책이다. 들뢰즈 전체를 조망하기엔 매우 훌륭한 책이다.
다만 내 읽기가 얕아 전체 내용을 다 읽어내지는 못했다. 나는 절반 정도를 읽어낸 것 같은데, 몇 년 후 이 책으로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오늘은 <의미의 논리> 부분에서 읽어 낸 들뢰즈의 철학과, 그 사유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어떻게 확장되는지에 대한 지엽적인 이야기를 쓰겠다. 이야기의 범위 자체는 좁지만, 들뢰즈 철학의 정수, 즉 들뢰즈 철학이 전개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회라, 아마 충분히 재미있을 것이다.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좀 터무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괜찮다. 평범한 시작이다. 철학은 원래 이렇게 평소 의심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질문을 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철학을 의미론이라고 한다. 우리는 '나무'라는 단어를 보면 마음속에 나무를 떠올릴 수 있다. 즉 '나무'라는 단어는 나무라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렇게 묻는 것이 의미론이다. 이 질문, 그러니까 '나무의 의미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가 저것이 나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질문과는 다르다. (후자의 질문을 철학은 인식론이라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견해는 고전적인 것으로, 지시한 대상에서 의미가 발생한다는 견해다. 즉 나무의 의미는 나무가 갖고 있고, 인간이 만든 '나무'라는 기표(기호로서의 언어)가 그 의미에 대응한다는 견해다. 우리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엄마 무릎에 앉아서, 그림책에 있는 코끼리 그림을 보며 엄마를 따라 '코끼리'라고 말하며 언어를 배우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견해는 실증주의적 견해를 포함하는데, 예를 들어 '뜨거움'이라는 것은 대상으로서 불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고, 우리가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의미가 발생한다는 관점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 견해는 현상학적인 것이다. 현상학은 의식이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 과정에서 의미가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현상학의 관점이다. 현상학의 관점에서 중립적 의미의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 글에서 '나무'라는 대상을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마찬가지로 화가에게 '나무'는 예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다. 위 사진에 있는 그림 속에 있는 나무에서 화가 존 컨스터블은 평화로운 전원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것이다. 그가 본 나무는 내가 위에서 고전적 의미론을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들었던 나무와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목수가 나무를 바라보면 그 나무에서는 작업 재료로서의 의미가, 농부의 관점에서는 과일을 맺는 생산수단으로써의 의미가 발생한다. 이것이 현상학이 말하는 의미의 발생 원리다.
세 번째 견해는 구조주의적인 것으로, 의미는 언어를 구성하는 기표(단어)들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당연해 보이는 위의 두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국어사전에서 '결혼'을 찾아보면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의 관계를 맺음'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부부'를 찾아보면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다시 '아내'를 찾아보면 '결혼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라고 나온다. 다시 '결혼'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전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는 실은 전부 이렇게 서로를 순환참조하며 자신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결혼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부와 아내가 필요하고, 아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결혼과 부부가 필요해진다. 잘 생각해 보면 세상엔 자기 혼자서 의미를 가지는 단어가 없다. 이를 두고 구조주의 언어학은 '의미는 기표들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라고 말한다.
기표들의 관계라는 말이 조금 어려우니 조금 다른 예를 들자. 대한민국 군대의 사병 계급은 이병, 일병, 상병, 병장으로 되어 있다. 일병은 무엇인가? 이병보다는 높으나 상병보다는 낮은 계급이다. 상병은 무엇인가? 상병은 일병보다 높으나 병장보다 낮은 계급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병, 일병, 병장이라는 계급이 없어지면 일병이라는 계급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어떤 단어도 혼자서는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의미가 기표들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구조주의의 관점이다.
그런데 들뢰즈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들뢰즈의 생각은 실증주의적 의미관과도, 현상학적 의미관과도, 구조주의적 의미관과도 닮지 않았다. 들뢰즈는 의미는 명제와 사물 사이의 중간지대에서 발생하는 비물질적 사건이라고 말한다. 사건? 사건이라니. 의미가 어떻게 사건이 될 수 있는가?
들뢰즈는 어떤 기표가(단어가) 누군가에 의해 사용될 때, 사용된 명제 안에서 매번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고 말한다. 잘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내가 오전 반차를 쓰고 출근한 직원에게 '밥 먹었냐'라고 물었을 때 밥은 끼니, 혹은 그에 대한 관심의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퇴근하면서 딸에게 '집에 밥 있니? 아빠가 뭐 사갈까?' 하며 물을 때 밥은 밥솥 안에 담겨 있는 물리적인 밥이다. 똑같은 '밥'이라는 기표는 사용될 때 매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를 두고 들뢰즈는 기표가 매번 사용되며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사건'이라고 말한다.
'신박하다'라는 말을 아는가? 아직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된 단어는 아니지만 방송이나 언론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단어다. 이 단어는 '신선하다'와 '기발하다' 사이의 어디쯤에 있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단어는 실은 게임 <월드오브워크래프트>에서 왔다.
신성 특성 성기사는 여러 생존기와 탈출기를 가졌기에 PvP에서 이기지는 못하지만 웬만해서는 지지는 않는(죽지는 않는) 특징을 가졌는데, 이를 조롱하는 의미로 다른 클래스 플레이어들은 신성 특성 성기사를 '신성 바퀴벌레 성기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신성 바퀴벌레'의 줄임말이 바로 '신박'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신박하다는 말을 그런 뜻으로 쓰지 않는다. 어느새 '신박하다'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아마도 어떤 한순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언어라는 사건이(신박하다, 고 누군가 말하거나 글로 쓰는 순간이) 계속 반복되며 조금씩 차이가 나는 의미를 만들어 왔고,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렇게 들뢰즈의 말대로 의미는 사건으로만, 말하여진 순간에만 존재하게 된다. 의미는 대상에게도, 의식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들뢰즈에게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의미는 그 중간 지대에서, 말하여질 때마다 명제 안에서 늘 다른 뜻을 가지면서, 즉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 등장하는 들뢰즈의 의미론이다. 그런데 이 구도는 이후 들뢰즈의 철학에서 계속 등장하고 반복된다. 들뢰즈는 후기 저작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이 의미와 차이의 구도를 철학 전체로 확장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논증은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내가 생각한다는 것만큼은 의심이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제시한 이성중심주의 철학의 출발점이다.
들뢰즈는 이 문장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이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심하다', '생각하다', '존재하다'는 세 요소가 필요하다. 이 세 요소 사이에는 각자 식별 불가능한 중간 영역이 있다. '의심하다'와 '생각하다' 사이에는 '나는 의심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관련이, '생각하다'와 '존재하다' 사이에는 '생각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해야 한다'라는 관련이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의 합성 요소에는 실은 무한에 가까운 의미의 스펙트럼이 있다. (방금 의미는 반복될 때마다 변화한다고 한 것을 떠올려보라) 수능 시험장에서 괄호 안에 알맞은 말을 찾으라는 지문에 우리는 답이 일단 (1)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3)번이 아닐까 의심한다. 평소 향수를 쓰지 않는 남편의 와이셔츠를 세탁기에 넣다 맡아보지 못한 냄새가 느껴지면 아내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한다. 이 두 의심이 같은가?
마찬가지다. '생각하다'와 '존재하다' 역시 수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무한한 신적 존재도 있고, 유한한 유기체적 존재도 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그 수많은 의미 중 오직 '생각하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존재만을 골라내어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의 개념을 어떤 단편적인 전체로서 확립한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는 전혀 진리를 언표하는 명제가 아니다. 들뢰즈에게 데카르트의 자아는 언어의 수많은 의미들이 선택되고 결합되는 곳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엄청난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의미가 반복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사건인 것처럼, 철학 또한 새로운 합성 요소들이 관계 맺으며 새로운 개념을 발생시키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철학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순간 세 개를 꼽으라면 그중에 이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들뢰즈는 어떤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 자체를 문제를 삼고 있다. 들뢰즈에게 철학이란 어딘가에 결코 고정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들뢰즈는 모든 철학과, 지금껏 당연하다고 여겨져 온 철학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들뢰즈에게 어떤 사상을 완성하는 것, 혹은 그 사상을 설명하거나 전파하는 것은 민중을 그 사상 아래 복속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철학을 공부하거나 어떤 철학자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복속 아래 복종하는 태도다. 들뢰즈는 철학을 현실 민주주의에 비유하며 맹렬하게 비난한다. 현실 민주주의와 비교하자면 철학은 민주주의가 정치공학과 야합하는 행위에 비유할 수 있다.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에 귀를 닫고 "그래서 민주당 찍을 거야, 국민의 힘 찍을 거야?" 하고 윽박지르는 행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들뢰즈에게 철학의 민주화란 민주적 철학을 만들어 내거나, 그러한 철학을 전파하거나, 어떤 철학 아래 모두가 평등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철학함이란 오히려 철학에 저항하는 것이다.
어딘가에 고정된 것은 들뢰즈에게는 철학이 아니다. 고정된 것들은 사건에 불과하다. 들뢰즈에게 철학은 철학으로부터 계속해서 벗어나는 것이다. 들뢰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은 끊임없는 탈선 상태에 있다"라고 쓴다. 철학은 생각을 복속시키려는 어떠한 태도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니체가 떠올랐다면 제대로 읽은 것이다. 들뢰즈는 니체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았다)
들뢰즈는 실제로 자신의 저서를 연구하려는 이 책의 저자이자 당시 제자였던 우노 구노이치에게 "내 생각을 알아낼 시간에 다른 생각을 하라"라고 조언했다고 하니 들뢰즈는 의외로 언행이 일치하는 철학자였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오늘날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고정점으로서의 들뢰즈의 철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한국에 좋은 입문서가 정말 드물다. 지금까지 읽었던 모든 입문서 중엔 그래도 이 책이 가장 좋았다. 들뢰즈에 입문하겠다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강력하게 권한다. 2차 저작자의 판단이나 해석 개입 없이, 담백하게 들뢰즈만 정제한 책은 지금까지는 이 책 밖에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올해나 내년에 서동욱 교수님의 <들뢰즈의 철학>을 읽을 것이다. 그때 다시 들뢰즈로 돌아오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예상보다 길어진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