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채사장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 시리즈를 알고 있는가? 인문 베스트셀러이면서 인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 호오가 많이 갈리는 시리즈이다.
비판하는 쪽에서는 논의가 지나치게 얕고, 여러 지식들의 구도를 너무 단순화해 오류가 많은 책이라고 한다.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래도 이렇게 쉽게 읽히는 인문학 인문서가 없다고 맞선다. 나는 말하자면 후자로, 이 책을 읽고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을 생각이라면 모를까, 어떤 지식 분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데 충분한 책이라고 평가한다. 이를테면 이 책은 지식의 카탈로그 같은 책으로, 자신이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는지, 무엇을 읽으면 그 호기심과 관심이 충족될 것인지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유명한 시리즈가 최근 완결되었다. 맨 처음 출간된 1권의 부제는 <현실>로,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등 눈에 보이는 현실의 주제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일목 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2권의 부제는 <현실 너머>로,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와 같이 현실의 삶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다룬다. (내 읽기의 방향을 아는 분은 예상하셨겠지만 나는 2권이 가장 좋았다) 세 번째로 출간된 0권의 부제는 <초월>이다. 1권과 2권이 세계를 다루는 책이라면 0권은 자아를 다루는 책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베다, 불교, 철학, 기독교 등에서 일원론적 세계관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한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권 ∞(무한)에서, 작가는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실천이라. 실천을 다루는 학문이 있었나? 윤리에 대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이 책은 깨달음과 그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를 쓰고 나서, 진리는 가르칠 수 없으며, 오직 깨닫는 방법 만으로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불이 뜨겁다는 것은 가르침으로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살면서 한 번쯤 불에 데어 보고 나서야 불이 뜨겁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싯다르타>의 결론과 비슷한데, 바로 범아일여(梵我一如)다. 나와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싯다르타>에 대해 쓰면서도, 칸트에 대해 쓰면서도, 카를로 로벨리에 대해 쓰면서도 여러 번 써왔기에 이 이야기는 이번 글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결론만 일목요연하게 쓰면 근원적 측면에서 자아와 세계는 의식이라는 동일한 것의 다른 양상이라는 것이다. 범아일여, 즉 내가 곧 세계라는 말은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렸다와 같은 자기 계발적 위로가 아니다. 어떤 문학적 은유도 아니다. 이는 과학적, 철학적, 논리적 기술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세계를 일으키는 자 이면서, 또한 그 세계를 보는 자 이면서, 동시에 세계이다. 이것이 범아일여의 의미다. 완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완전히 깨달으면 우리는 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깨달음에 한 번은 닿아 보기를 바란다. 범아일여에 닿아본 사람은 그 전의 삶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범아일여에 대한 불교적, 물리학적, 관념론적 해설을 각각 하단에 링크하겠다)
하지만 채사장은 그저 범아일여에 대해, 즉 나와 세계가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쓰기 위함이었다면 <지대넓얕 무한>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것이라고 쓴다. 채사장이 이 책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깨달음 그 후의 이야기였다.
부처님은 원래 샤카족의 왕자였다. 부처님이 태어나자 히말라야 산속에서 수행하던 은둔자가 찾아와 예언을 했다. "왕자님은 세속에 계시면 세계를 다스리는 성왕(成王)이 되실 것이고, 출가하면 모든 이를 구제하는 붓다(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왕은 왕자가 왕이 되기를 바랐지만, 알다시피 부처님은 출가하여 붓다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군사력이 막강한 이웃나라가 샤카족을 멸족시키러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찾아왔을 때, 부처님은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부처님을 짓밟고 지나갈 수 없었던 이웃나라의 왕은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이와 같은 일이 세 번이나 있었고, 이웃나라의 군대가 네 번째 찾아왔을 때는 부처님도 더 이상 그 군대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샤카족은 멸망했고, 부처님은 이 일을 평생 슬퍼했다.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이러한 세속의 일에 고통을 받았다. 깨달음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는 평범한 우리들은 깨달은 자가 되면 모든 세속의 고통에서도 벗어나고, 삼라만상을 꿰뚫는 혜안을 가지며, 신에 가까운 도덕성을 지닌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깨달은 자인 부처님도 여전히 이렇게 고통을 받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깨달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범속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라캉주의자로서 상징계의 환상을 횡단하여 자신만의 환상을 창조하며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거나, 니체주의자로서 먹장구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추락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하겠지만, 채사장의 대답은 다소 구도적(求道的)이다.
채사장은 불교의 탐진치(貪瞋痴)를 꺼내는다. 탐진치는 중생이 쉽게 빠지는 세 가지 독으로, 탐은 탐욕과 욕심을, 진은 성냄을, 치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그다음으로 채사장이 하는 이야기는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것이다. 범아일여의 결론은 자칫 허무주의로 빠질 수 있다. 빅뱅의 순간 생성된 수많은 입자들이 만들어낸 임의적이고 임시적인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결론은 이 삶과 우주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채사장은 상징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종교적 태도가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신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지는 기독교적 태도일 수도 있겠고, 업의 해소로 이어지는 불교적 태도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이야기에 크게 공감한다. 종교적 태도는 삶을 받아들이는 정말 훌륭한 태도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독서모임을 운영하면서 배운 것들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삶에 종교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예술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적 태도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면, 마지막으로 예술적/철학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채사장은 배움과 사랑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나는 세속적 성공이 목표가 될 수 없다면 그것을 잘 대치할 수 있는 것으로 늘 예술적/철학적 목표를 떠올린다. (다만 이것은 채사장의 의도는 아니고 나의 해석일 수 있다)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도 식사 후에 가끔 플루트를 불었다고 한다. 예술은 늘 삶의 이유이고 목표일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지대넓얕> 시리즈와는 달리 이 책은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고 그 안으로 침잠하는 책이다. 외향적인 사람보다는 나와 같이 내향적인 사람들이 재미있게 볼 것 같은 책이다. 타인과의 관계 보다 자기 자신과 관계 맺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정말 정신 놓고 읽게 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채사장의 팬들과, 나처럼 자신의 내면을 항해하는 항해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지만, 만약 보고 계시다면 완결을 축하드립니다, 채사장님. 10년 동안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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