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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Jul 22. 2024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 읽었다. 10대 시절 읽었던 <데미안>,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에 이어 네번째로 헤세를 읽었다. (이 중 <데미안>은 40대가 되어 한번 더 읽었었다)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니체를 읽었기 때문인지, 양자역학을 읽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읽은 헤세 중 가장 좋았다. 


헤르만 헤세는 훗날 <싯다르타>를 회고하며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중요한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한 번은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의 헤세 읽기는 내가 읽어온 것들을 향해 치우쳐있을 것이지만, 언제나처럼 용기를 내어 <싯다르타>를 오독해보려 한다. 


아기의 첫번째 생일 날,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부엌 등을 끄면 아기는 휘둥그래 뜬 눈으로 케이크 위의 불꽃을 바라본다. 아마 아기의 평생 경험한 가장 강렬한 컨트라스트였을테니, 자극 또한 대단할 것이다. 아기는 이어 손을 촛불을 향해 가져간다. 당연히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있던 아빠는 아이를 제지할 것이다. 안돼 OO아, 안돼, 뜨거워, 하면서. 


아기는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고 태어나지 않는다. 아기는 훈육 과정을 통해 지식으로서 그 사실을 배운다. 불은 뜨겁다. 뜨거운 것에 닿으면 데거나 다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아는 것인가? 아이는 불의 뜨거움이 무엇인지 훈육을 통해 알게 되는가? 


아니다. 아마도 아이는 성장하는 도중에 언젠가 한번은 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대개는 본인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라이터의 불꽃일 수도 있고, 가스 버너의 불꽃일 수도 있고, 캠프파이어의 불꽃일 수도 있다. 앗 뜨거! 하고 느끼는 순간 비로소 아이는 뜨겁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 이게 그 뜨거움이구나. 아빠가 안된다고 했었던 바로 그 뜨거움이구나, 하고 말이다. 아이는 엄마가 연고를 발라주고 대일밴드를 붙여주고 나서야 이젠 정말 불에 가까이 안가겠다고 다짐한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자 하면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를 통해 헤르만 헤세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깨닫는 것으로만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가르침은 우리를 진리에 다가가게 해 주겠지만 진리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나 스스로 깨닫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그럼 대체 <싯다르타>를 통해 헤세가 말하는 깨달음의 대상은 무엇일까? 헤세가 말하는,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진리란 무엇일까? 


<싯다르타>의 주인공은 '싯다르타'이다. 부처님의 이름이 바로 싯다르타인데, <싯다르타>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부처님이기도 하고, 부처님이 아니기도 하다. 그 이유는 이미 부처님인 세존 고타마가 극 중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설정은 위에서 말한 '가르침으로 깨달을 수 없다'는 주제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극중에서 싯다르타는 실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가장 높은 계급인 브라만(바라문)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브라만으로 살아가는 것 보다 사문(沙門, 불교 수행자)으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고 집을 떠난다. 사문이 된 싯다르타는 명상과 고행을 통해 고통과 굶주림과 갈증과 피로와 권태를 극복함으로써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는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곧 이러한 방법으로는 자아로부터 잠시 멀어질 뿐, 결국 자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던 어느날 싯다르타는 세상의 모든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내려왔다는 부처 고타마에 대한 소문을 듣는다. 그는 고타마를 만났는데, 그의 태도에서 풍겨나오는 완전함과 평화를 느끼며 그가 완성자이며 깨달은자임을 직감한다. 이어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데, 그 내용은 세상의 이치는 인과응보이며 그로서 영원히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 순간 싯다르타는 깨닫는다. 깨달은 자인 고타마의 말은 분명 진리를 담고 있을 것이지만, 자신은 고타마의 설법을 듣는다고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싯다르타는 수행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수행자의 길을 그만 둔다. 


속세로 내려온 싯다르타는 사랑을 하고, 장사꾼의 제자가 되어 돈을 번다. 그는 크게 성공하여 큰 집과 정원, 하인들을 거느리지만 곧 속세의 즐거움에 빠져든다. 술과 도박과 음식과 유희 같은 것들으로 삶을 채우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갑자기 자신을 향해 구토감을 느끼고, 그 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숲으로 떠난다. 


정처없이 떠돌던 싯다르타는 어느 강가에서 뱃사공을 만나는데, 모든 것을 강에게서 배웠다는 뱃사공의 말에 뱃사공의 제자가 되기로 한다. 


뱃사공에게 배를 모는 법, 노를 깎는 법, 바구니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바나나와 망고로 식사를 하며 강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던 싯다르타는, 강물이 내는 복잡한 소리, 부분이면서 전체인 소리와, 강물의 모습, 그러니까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재이고, 통일된 강물 하나이면서 분할된 물방울들의 집합이기도 한 강물의 모습을 바라보다 마침내 세계의 단일성과 윤회의 필연성을 깨닫는다. 


세계의 단일성이란 뭘까?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싯다르타는 마지막 부분에 자신을 찾아온 옛 친구 고빈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일면적(一面的)이야. 모두 전체성, 완전성, 단일성을 결여하고 있네. 하지만 세존 고타마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설법을 하실 때엔 이 세상을 윤회와 열반, 미혹과 진리, 번뇌와 해탈로 나누지 않을 수 없었을거야. 달리 방법이 없네. 우리 주변과 우리 내면에 있는 세계는 결코 일면적이 아니지만, 전체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에겐 세계를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 밖에는 없네. 

고빈다,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네.

<싯다르타> 中



이게 무슨 뜻일까? 다소 난해해보이는 문장이고, 실제로 이 구도, 그러니까 단일성의 우주와 일면적 개별의 구도, 그리고 결코 닿을 수 없는 우주와 개별을 이어주는 동시에, 실재를 죽이는 언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 ⓒ citytour.com



당신이 코타키나발루의 거대한 석양 앞에 서 있다고 하자. 그 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가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이 어떻냐고 말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봐." 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감동한 건 처음이야" 라고 할 것인가? 어느 쪽 대답이든, 그 대답은 당신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장대한 석양의 본질을 담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언어로는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세계는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를 언어로 분절해서 밖에는 인식할 수 없다. '사과'라는 단어 없이 우리는 사과를 거래할 수 없을 것이고, '민주주의'라는 개념 없이 우리는 안정적인 정치체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개별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마침내 가정을 넘어서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고빈다에게 '열반' 조차 언어로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실재가 아니라면, 당연히 언어로는 진리에 닿을 수 없다. 하지만 가르침이란 늘 언어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가르침으로는 본질적으로 결코 진리에 닿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언어로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싯다르타가 말하는 전체성, 완전성, 단일성이란 무엇일까? 싯다르타의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쇼펜하우어를 조금 알아야 되는데, 내가 쉽게 설명해 보겠다. 


아름다운 해변을 상상해보자. 바다는 수많은 파도를 품고 있다. 잔잔한 파도가 수면으로 밀려오더니, 물방울들이 해변에 쏟아진다. 그리고 곧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상상이 되는가?


쇼펜하우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개체들, 그러니까 나나 당신, 쇼펜하우어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 사과나 나무 같은 생명을 품은 것들, 바위나 숲 같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물방울이나 거품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임의적이다. 우리는 우주를 이루는 수많은 거품 중 하나일 뿐이다. 물방울과 거품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듯, 우리도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물방울과 거품이 바다로 돌아가듯,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즉 우주로 돌아간다.


이 우주, 전체로서의 우주는 매 찰나의 순간 완전하다. 누군가의 소멸의 순간 누군가는 탄생하고, 무엇인가가 파괴되는 순간 무엇인가가 생성된다. 수 많은 물방울들이 파도를 구성하고, 수 많은 파도가 만들어져 해변으로 몰려오고 서로 부딛쳐 사라져도 바다라는 전체는 언제나 그 자체로 완전하다. 첫번째 파도가 부서졌다고 바다에 흠집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오늘의 바다가 어제의 바다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단일한 전체로서의 우주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이어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한 개의 돌멩이가 있네, 고빈다. 이 돌멩이는 언젠가 흙이 될거야. 그리고 그 흙에서 식물이 생겨날 거고, 그 식물은 동물에게 먹힐 것이네. 그 동물을 우리의 먼 후손이 먹을 수도 있겠지. 이런 순환적인 변화 속에서 돌멩이는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사유가 될 수도 있으며, 부처가 될 수도 있네. 

하나의 돌멩이는 돌멩이기이도 하고,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단 말이네. 이것은 모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아. 우리가 윤회라고 부르는 것, 고빈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네.

<싯다르타> 中



하나의 돌멩이는 흙이 되었다 식물이 되었다, 다시 동물이 되었다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는 어떠한가? 싯다르타의 말이 다소 사변적으로 들린다면, 분자생물학을 가져와 이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 몸의 99%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으로 되어 있다. 남은 1%의 85%는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으로 되어 있는데, 이 원자들은 우리가 죽는다고 소멸하지 않는다. 박테리아에 의해 분해되고, 벌레들에 먹히며 그들의 일부가 되거나 흙의 일부가 된다. 흙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혹시 흙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해 해본적 있는가? 


흙의 주요 성분은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이다. 그리고 소량의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 등을 포함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는가? 인간과 흙은 구성성분이 같다. 인간은 죽어서 분해되어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흙이 된다. '우리는 죽으면 흙이된다'는 말은 문학적 은유가 아니다. 이 문장은 물리적 서술이다. 


우리가 죽어 흙이 되었는데, 그 흙 위에 사과 씨앗이 앉았다. 분해된 우리의 일부는 물이 되었을텐데, 씨앗은 그 물을 흡수하여 나무로 성장할 것이다. 가을에 나무에 사과가 열리면 사과를 먹으러 숲에 사는 동물들이 나무 근처로 모일 것이다. 이렇게 돌멩이는 흙이 되고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다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말하는 윤회다. 윤회는 이렇게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필연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다. 


어떤가? 싯다르타가 이야기하는 것들, 우주의 단일성과 윤회의 필연성이 이해가 되는가?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내가 정말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맨 위의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맨 위에서 헤세는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고 썼다. 그리고 우리는 아기에게 불이 뜨겁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아기가 직접 불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마찬가지다. 우리는 방금 불이 뜨겁다는 것을 싯다르타로부터 배웠다. 하지만 이것, 우주의 단일성과 윤회의 필연성을 불에 데듯 깨닫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다. 당연히 후자는 어렵다. 후자를 이루게 되면 우리는 붓다(부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헤세도 <싯다르타>를 불에 데듯 깨닫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나, 너, 우리의 개별적 개체가 임의적이고 임시적이라는 관점을 갖는 것으로만으로도 삶은 이전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그랬다) 비슷한 이야기를 아래에 링크한다. 


<싯다르타>는 지난 독서모임 주제책이었던 원영 스님의 <이제야 이해되는 불교>의 참고 도서로 읽었다. 너무나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결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세계관-이어짐의 쾌감을 경험했다. 만약 이 책을 읽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공부를 하고 읽기를 권한다. 


오늘도 길었던 독후감 끝. 





https://brunch.co.kr/@iyooha/73



https://brunch.co.kr/@iyooha/29



https://brunch.co.kr/@iyooha/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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