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 원영
원영 스님의 <이제서야 이해되는 불교>를 다 읽었다. 불교에 대한 친절하고 쉬운 입문서를 찾았다. 앞으로 누군가 불교가 궁금하다고 하면 이 책을 권하면 되겠다.
부처님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사실 부처님은 싯다르타 한 분이 아니다. 부처님은 산스크리티어 ‘붓다’을 한자 부처(佛陀)로 옮겨적은 것이다. 붓다는 ‘깨달은 자’, ‘눈을 뜬 자’라는 뜻이다.
”우리의 목적은 불교 신도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깨달은 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남긴 여러 명언 중 하나이다. 역시 달라이 라마도 여기에서 ‘깨달은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에 의하면 불교의 목적은 다른 종교와 다르다. 포교 혹은 교세 확장이 대개는 제1목적인 타 종교들과 달리 불교의 목적은 포교가 아니라 깨달은 자, 즉 붓다를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붓다는 깨달은 사람의 숫자 만큼 많은 것이다. 그런데 깨달았다니, 대체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일까?
싯다르타의 질문은 늘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왜 고통은 존재하는가? 즉 싯다르타의 궁극의 질문은 고통에 대한 것이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깨달으면 붓다가 되는 것이다. 아니,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깨닫는 것 만으로 붓다가 된다고? 정말인가? 하지만 이게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아마 이 글을 다 읽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이 질문은 일견 터무니 없는 질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통이 왜 존재하느냐고? 고통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 아닌가? 뺨을 꼬집으면 아픈게 당연하지 않나? 싯다르타의 사유를 한번 따라가 보자.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모두 이별을 경험한다. 우리는 사랑했던 첫사랑과 헤어졌으며, 대개는 부모님을 먼저 떠나 보내고 세상에 고아로 남는다. 더운 여름 밤에 모기와 씨름을 하다 밤 잠을 설쳤는데도 우리는 낯짝 쳐다보기도 고통스러운 김부장을 만나기 위해 출근을 할 것이며, 이번 달에 보너스가 들어왔지만 오늘도 나는 오늘도 샤넬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고통들을 4고(苦)라고 한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고,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며, 원증회고(怨憎會苦)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이고, 구불득고(求不得苦)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우리 같은 중생은 아니 뭐 그런 고통이야 당연히 있는 거 아닌가 하며 어영부영 삶을 살지만 싯다르타는 그렇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고행과 명상 속에서 고통의 의미와 그 원인을 찾았다. 그 결과 싯다르타의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태어났기(生)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네? 아니 부처님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물론 여기에서 끝은 아니다. 부처님은 여기에서 한번 더 질문을 던지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무언가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존재해야(有) 한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에게서 절반, 어머니에게서 절반의 생명을 얻었다. 우리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그 부모님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에서 또 묻는다. 그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은 왜 있는가?
리차드 도킨스에 의하면 우리는 유전자를 운반하는 로봇이다. 우리는 맹목적으로 부모님들로 부터 받은 유전자를 후대에 전하려고 한다. 이는 우리에게 사명처럼 주어져 있는 생물학적 집착(取)이다. 그런데 그 집착은 왜 있는가?
집착이 있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생물학적 충동, 욕구, 욕망(渴愛)가 있기 때문이다. 막 태어난 아기는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축축하면 운다. 울어서 자신에게 욕구가 있음을 표출한다. 아기에게 욕구는 학습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욕구를 가진 채 태어난다. 그런데 그 욕구는 왜 있는가?
욕구가 있는 것은 우리에게 감각(受)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좋고 싫음, 고통과 행복을 구별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싫은 것을 피하고, 좋은 것에 닿으려 한다. 감각이 있기 때문에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각은 왜 생겼는가?
감각은 접촉으로 이루어진다. 곽튜브가 영상에서 먹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터키 요리는 아무리 눈으로 봐도 맛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먼저 접촉(觸)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접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접촉은 감각기관(六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눈, 코, 입, 귀와 같은 감각 기관은 물론이고 몸과 마음도 일종의 감각기관이다. 짝사랑하던 그 혹은 그녀와 손을 잡았을 때, 느껴졌던 설렘은 손 끝에 머물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감각기관은 어디에 있는가?
그 감각기관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몸에 붙어 있다. 그리고 몸이 마음을 만들어낸다. (뇌과학적으로는 더 복잡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이 문서의 범위는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과 마음을 불교에서는 명색(名色)이라고 한다. 자, 거의 다 왔는데, 다시 한번 질문해 보자. 그렇다면 몸과 마음은 왜 있는가?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있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인식하는 우리의 의식(識)이 있기 때문이다. 바위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중력을 느끼지 않고, 용광로에서 녹으면서 철광석은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늘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 이것이 내 몸과 내 마음이 존재하는 이유다. 자, 조금 어려워졌지만 그렇다면 이제 또 물어야 한다. '나'는 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고, 생각한 바를 말하고, 내 생각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나는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다. 나는 어제 읽은 책으로 내 지식을 업데이트했고, 생일이 되면 나이를 먹으며, 소설을 쓰고 게임을 만든다. 내게 스스로 역사가 있기에 나는 정말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교는 이 지점에서 불쌍한 중생에게 혀를 찬다. 네가 스스로 네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네가 무지(無明)하기 때문이다, 라고. 네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까닭은 네가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이다.
약간 어안이 벙벙하지만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처음에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첫 질문은 이러했다.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을 알게 되면 우리는 붓다가 된다고 했다. 우리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라 오래 돌아서 이 질문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고통은 왜 존재하는가?"에 답하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즉 붓다는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자"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가리켜 불교는 무아(無我)라고 한다)
위에서 설명한, 고통으로 부터 시작해서 존재에까지 연결되는 이 질문의 고리를 불교에서는 십이연기(十二緣起)라 한다. 위에서 중구난방으로 썼던 십이연기를 다시 정리해보면 ① 무명(無明), ② 행(行), ③식(識), ④ 명색(名色), ⑤ 육처(六處), ⑥ 촉(觸), ⑦ 수(受), ⑧ 애(愛), ⑨ 취(取), ⑩ 유(有), ⑪ 생(生), ⑫ 노사(老死)이다.
그런데 대체 이렇게 명백하게 존재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실은 불교는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여 일시적으로 존재할 뿐, 나 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을 하나 배우고 가보자.
세상 사람들은 흔히 두가지 입장에 따른다.
그것은 '있다'와 '없다'이다.
만일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써
세상의 시작을 잘 관찰한다면,
세상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또한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써 세상의 끝을 관찰한다면
세상에 '있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의 극단적인 가설이다.
모든 것이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제 2의 극단적인 가설이다.
『쌍윳따니까야』 2
불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임시로 존재한다. 임시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내가 쉽게 설명해 보겠다. (예전에 썼던 글의 재탕이긴 하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이다.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혹은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다. 인(因)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이다. 자 이게 무슨 말일까?
길가에 예쁜 꽃이 피었다. 이 꽃은 어떻게 피어나게 되었을까? 꽃이 있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因)은 씨앗일 것이다. 꽃은 씨앗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씨앗만 있으면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꽃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흙, 태양과 공기, 물, 꿀벌이나 농부의 도움(緣)이 필요하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것들은 이처럼 인과 연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혼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며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놀라운 생각에 닿을 수 있다. 흙, 태양과 공기, 물, 꿀벌이나 농부의 도움은 확실히 있었다. 즉 인과 연은 있었다. 그런데 꽃은 있는가? 꽃과 씨앗 중 어느 것이 그 존재의 본질에 가까운가?
물 한 방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물방울은 잠시 후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다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된다. 구름이 충분히 무거워지면 날씨에 따라 비, 눈, 우박이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물은 나무에 흡수되어 수액이 되었다가, 과일이 되어 인간에게 먹힌 다음 피나 눈물이 되기도 한다. 이것들 중 대체 ‘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인연은 있지만 실체는 없는 것이다. 흙, 태양과 공기, 물, 꿀벌이나 농부의 도움은 있지만 꽃은 없고, 과일이 인간에게 먹히는 행위는 있지만 물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인연에 따른 변화 뿐이다.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계속하여 변할 뿐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불교의 결론은 최신의 과학인 관계적 양자론(Relational Quantum Mechanics, RQM)의 결론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하기엔 이미 글이 너무 길어져버렸기 때문에 아래에 링크로서 대신한다.
이렇게 글을 쓰긴 했지만 사실 나 역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감나지는 않는다. (당연할 것이다. 이 놀라운 결론을 깨달았으면 나는 부처가 되었을테니까) 다만 2천5백년전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에서 혼자, 스스로 깨달은 것에, 현대 양자물리학이, 현대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현대 심리철학이 하나씩 동의하고 있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관련된 글들도 몇 개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54
https://brunch.co.kr/@iyooha/71
https://brunch.co.kr/@iyooha/72
https://brunch.co.kr/@iyooha/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