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김상욱
김상욱 교수님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완독, 집안 일 때문에 일찍 퇴근한 불금에, 술친구(마나님) 퇴근을 기다리며 후기를 남긴다. 앞으로는 그냥 후기라고 쓰려고 한다. 독후감이라고 하기엔 책 내용은 없고, 읽고 난 후 개인적인 단상 같은 것들을 남기는 느낌이어서. (하긴 독후감讀後感의 뜻이 ‘읽은 후 느낀 것’이긴 하구나)
언젠가의 글에서도 썼지만, 나에게 있어서 독서는 어린 시절의 내게, 그 때 가졌던 질문들에 답을 주는 행위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지 않는 질문을 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 내가 하던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맨 앞에는 뭐가 있을까? 반대로 끝까지 돌리면 무엇을 만나게 될까? 내가 보는 빨간색은 다른 사람도 똑같은 색채로 느낄까?
중학교로 올라가며 질문은 좀 더 심각해졌다
손톱을 깎으면 나는 나를 깎는 것일까? 나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는데, 어째서 손톱과 머리카락을 얻는가? 138억년 우주의 역사에, 나는 왜 하필 이 순간 이 별에서 태어났을까? 왜 모든 생명은 죽는가? 애초에 생명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는 것은 내 나이가 적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낼 정도로 간단하고 당연한(?) 질문이니까 세계적이 석학들이 이미 연구를 해 놓았을 것이고, 그러니 곧 학교에서 가르쳐 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수십년이 지나고 마흔 근처의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나는 여전히, 전혀, 하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하나의 답도 주지 못한 채, 그저 나이를 먹고, 그저 끄적끄적 돈이나 벌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그 답을 찾아내기로 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을 막연히 읽기 시작한지 10년쯤 된 것 같다. 나는 주중엔 여전히 끄적끄적 돈을 벌고, 주말엔 양재천 카페에 앉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을 읽고 알게 된 건, 김상욱 교수님은 나와 같은 동기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분이라는 것이다. 이 책 들어가는 글에서 김상욱 교수님은 이렇게 쓰신다.
“어린 시절, 나는 땅을 파고 들어가면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꽃삽으로 놀이터 땅을 파기 시작하고 50센티미터도 못 가 땅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다. 그것으로 나의 지하세계 모험은 끝이 났다. 그 후 나는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직접 해보기 보다 책을 찾아보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물리학을 박사까지 공부하고 나서야 나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 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예컨대 나는 어린 시절에 가졌던 질문에 주말마다 답하고 있다면, 김상욱 교수님은 그 답을 찾는 것을 업으로 삼으신 것이다. 약간의 감동과 함께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비록 드물지만 이렇게 있구나, 하며 위안을 얻었다.
역시나 서두가 길었다. 제목이 <서시>가 담긴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를 닮았지만 이 책은 문학적인 책은 아니다. <원자에서 인간까지>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이 책은 “개별 원자들이 모여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책이다. 아마 이 질문이 김상욱 교수님 필생의 질문이 아닐까 싶다. 교수님은 물리학, 화학, 신경생리학, 생물학, 진화심리학, 사회심리학을 넘나들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교수님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내 오랜 질문 중 하나가 풀렸다. 위에서도 소개되었는데, “나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먹는데 어째서 손톱과 머리카락을 얻는가?” 하는 의문이다. (대체 왜 그게 궁금한가, 싶을 수 있다. 인정한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는 원자가 불멸한다는 것이고, 세상에 있는 모든, 원소 번호가 같은 원자는 서로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자가 불멸한다고? 나무를 태우면 재만 남는데 무슨 허튼 소리냐, 싶지 않은가?
자, 그렇다면 일단 나무를 태워보자. 나무는 셀룰로스라고 하는 긴 탄수화물 체인으로 되어 있는데, 충분한 열이 가해지면 셀룰로스는 메탄, 수소, 탄소 등으로 분해된다. 다른 것들은 제쳐 두고 탄소 하나에만 집중해 보자. 탄소는 공기중에서 산소와 결합한다. 산소 하나와 결합하면 일산화탄소가 되고(그래서 텐트 안에서 밀폐되지 않은 스토브를 켜 두고 자면 목숨을 잃는 것이다) 산소 두개와 결합하면 이산화탄소가 된다.
이 탄소는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이제 캠핑장 주변을 기체가 되어 떠돈다. 둥실둥실 허공을 떠돌던 이산화탄소는 어느 나무 잎새에 닿는데, 나무 잎새의 엽록체는 나무 내부의 물과 이산화탄소를 합쳐 포도당과 산소로 재조립한다. 탄소는 이제 포도당이 되었다. 이 과정의 화학식은 다음과 같다.
6CO2+6H2O→C6H12O6+6O2
화학식이 나타내는 이 과정에서 어떠한 원자도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지지 않는 다는 것에 주목하자. 원자는 불멸한다고 했다. 탄소와 산소와 결합하여 만들어졌던 이산화탄소에, 이번엔 수소가 함께 결합되며 포도당이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식물은 포도당을 녹말의 형태로 자신 안에 저장한다. (이 과정에서 짝꿍인 수소를 잃은 물은 버려진다. 식물이 산소를 생산하는 원리다)
이윽고 가을이 되었다. 캠핑장에 단풍이 피었다. 나무는 열매를 맺었다.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다. 사과의 85%는 물이고, 12% 정도가 당분인데, 절반이 과당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포도당이다. 이 포도당이 어디에서 왔을까? 그렇다. 방금 녹말로 저장되었던 그 포도당, 나무를 태울 때 나온 그 탄소로 만들어진 포도당이 과일로 옮겨온 것이다.
봄에 이어 가을 캠핑장에 찾은 나는 이 사과를 발견한다. 캠핑장 주인 아저씨가 흔쾌히 사과를 따서 내게 주고, 나는 그 사과를 베어 문다. 사과의 과육을 씹어 넘기면 포도당은 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장에서 흡수된 포도당은 간에서 다른 포도당과 합쳐서 글리코겐(C24H42O21)이 된다. 이제 탄소는 글리코겐이 되었다. (포도당의 화학식(C6H12O6)과 비교해 보라)
몸에 글리코겐 형태로 저장되었던 탄소는 포도당으로 다시 분해되고, 이어 세포 호흡 과정을 통해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다시 이산화탄소가 되어 내게서 떠난다. 이렇게 탄소는, 그리고 모든 원소는 불멸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모든 과정은 두번째 원칙, 세상에 있는 모든, 원소 번호가 같은 원자는 서로 구별할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가능하다. 셀룰로스와 포도당과 이산화탄소와 녹말과 글리코겐을 이루는 탄소는 완전히 똑같다. 우주는 원자라는 레고 블록으로 되어 있다. 1번 수소부터 92번 우라늄까지, 자연상태에는 92가지의 레고 블록이 있으며, 이 레고 블록들은 번호가 같다면 서로 완전히 같으며 구분할 수 없다. 이 원리를 통해 내가 먹은 햄버거는 머리카락이 되고, 내가 먹은 감자튀김은 손톱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어딘가에 묻혀 사라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을 구성했던 원자는 불멸한다. ‘우리는 죽으면 흙이 된다’는 문장은 문학적인 은유가 아니라 물리적인 서술이다.
이 책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물리학자 관점에서 쓴 화학 입문서로 읽힐 것이다. 하지만 내겐 특별했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가졌던 질문 중 하나에 대한 대답을 김상욱 교수님께 듣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었고, 충실한 대답을 얻었다.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트레바리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은, 결국 어린 시절의 내가 가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이 들어 있는 책을 읽는 모임이다. 이 책을 다음 시즌 첫번째 책으로 선정할 생각이다. 남들이 보기엔 “대체 그게 왜 궁금해요?”라고 할만한 질문들을 태연하게 하는 클럽이라면, 이 책을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