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말과 사물> 강독서, 이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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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호랑이, 개는 어느 쪽이 서로 가까운가?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호랑이와 고양이가 가깝다. 린네의 생물 분류학에 의하면 호랑이와 고양이는 둘 다 고양이과다. (종속과목강문계, 우리는 이 구분을 중학교에서 배운다) 커다란 종이 상자에 호랑이가 들어가 있는 사진을 한두 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아 맞네, 역시 호랑이는 고양이과 맞네, 하고 맞장구도 쳤을 거다.
이 맞장구를 친다는 것이 포인트다. 사실 우리는 마음 속으로는 이 분류가 거북하다. 고양이와 개는 둘 다 친숙한 대표 반려동물이다. 인터넷에 가장 많은 짤방은 아마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호랑이는 우리에게서 멀다. 호랑이는 우리 주변엔 없고, 동물원에 가서야 볼 수 있는 멸종 위기 동물이다. 그래서 종속과목강문계를 배워 알고는 있지만 그 분류가 썩 마음에 와 닿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분류는 어떤가? 18세기 청나라에서는 동물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사람이 키우는 동물, 전설상의 동물, 광폭한 동물, 물주전자를 깨뜨릴 수 있는 동물 등. 재밌지 않은가? 청나라 분류법에 의하면 호랑이와 고양이는 같은 범주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는 광폭한 동물이고 고양이는 물주전자를 깨뜨릴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대개는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이 장면에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중요한 질문을 떠올렸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린네가 생물 분류학의 기초를 놓은 것도 같은 18세기다. 같은 시대, 서로 다른 공간에 이렇게 큰 생각의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질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러한 차이가 단지 다른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혹시 차이는 시대를 넘어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푸코는 16세기부터 그가 살던 시대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문서들을 분석하고 나서 이러한 결론을 내린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인식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불렀다. (에피스테메는 적절한 번역어가 발견되지 않아 다른 번역가들도 그냥 에피스테메로 표시한다)
시대의 지식을 구성하는 무의식적 인식체계라니, 말이 약간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호두가 뇌에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실제로 호두에는 불포화지방산과 DHA가 많아 두뇌 발달에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호두가 뇌에 좋다는 것을 16세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불포화지방산과 DHA는 커녕 근대 화학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시대인데?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8세기 사람이다)
푸코에 의하면 16세기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닮은 것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호두는 뇌를 닮았다. 호두의 껍질은 인간의 단단한 두개골을 닮았고, 그것을 깨뜨리면 그 안에 뇌와 유사한 모습을 가진 호두가 나타난다. 무의식 중에 ‘닮은 것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고 생각한 16세기 사람들은 그래서 호두가 뇌에 좋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호두와 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다)
16세기 사람들은 질병이 돌거나 가뭄으로 농작물들이 말라 죽으면 왕의 탓을 했다. 왕과 자연이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가졌고, 자신이 어찌할 수 없다는 공유된 속성이 왕과 자연을 동일시하게 했다.
그런데 17세기가 되자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를 발견한 후 도래한 이성의 시대에 지식은 보다 엄밀함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의 지식은 단지 ‘닮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닮은 것은 동일함(완전히 같은 것)과 차이로 나누어진다. 린네의 종속과목강문계는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호랑이와 고양이는 고양이과(Felidae)까지만 일치한다. 속으로 세부 분류하면 고양이는 고양이속(Felis), 호랑이는 호랑이속(Panthera)으로 분화한다.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17세기 사람들은 16세기 사람들과 달리 ‘닮은 것’에서 지식을 발견하지 않았다. 16세기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체계에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에피스테메의 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의 가장 유명한 장면은 돈키호테가 늙은 말을 타고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장면일 것이다. “사악한 거인아 정의의 창을 받아라!”고 외치면서. (실은 우리는 <돈키호테>를 본 적이 없다. <돈키호테>의 원작은 1천 페이지가 넘는 거대한 벽돌책이다) 아마 어린 시절에 이 장면을 보며 다들 의아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나는 그랬다. 이게 정말 웃긴가? 이게 그 시절의 유머 감성일까?
푸코의 설명은 이러하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격한 이유는 풍차가 거대하다는 점, 움직인다는 점이 거인과 닮았기 때문이다. 즉 16세기의 ‘닮음의 에피스테메’를 돈키호테는 가지고 있다. 돈키호테에게 풍차는 곧 거인이다. 그런데 <돈키호테>가 출간된 것은 17세기 초이다. 위에서 설명했듯 17세기는 닮음의 에피스테메가 소멸하고 새로운 에피스테메인 동일함과 차이가 등장한 시대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그저 '닮았다는 이유로'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가 그래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함과 차이의 에피스테메 조차 현대에는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에겐 17세기 사람에게 만큼 <돈키호테>가 웃기지 않은 것이다.
어떤가. 그럴 듯 한가? 푸코의 설명에 의하면 에피스테메는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떤 에피스테메의 틀로 사고하고 있는지 모른다. 17세기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보며 웃었지만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시대엔 푸코가 없었고, 그들이 어떤 에피스테메를 기준으로 사고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말과 사물>은 1966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푸코는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인간’이라 말한다. 푸코에 의하면 인간은 일종의 개념이다. 19세기 들어 과학이 발전하면서, 과학은 인간 자체를 대상으로 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은 이전에는 없었던 학문이생겨났다. 이러한 학문들이 인간을 탐구하고 규정해가면서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로서, 하나의 창窓이 되었다. 우리는 살아있는 생생한 주체로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에피스테메는 변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가 지나면 인간은 소멸할 수 밖에 없다. ‘닮음’은 16세기 사람들에게 지식의 체계로 훌륭하게 동작했지만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게 사고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 다음 세대의 사람들의 에피스테메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소멸할 것이라고 푸코는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라캉은 주체의 타자성에 대해 말한다. 라캉에 의하면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타자다. 나는 내가 개입할 수 없는 타자의 언어로 사고하며,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타자의 욕망이 되고자 한다. 라캉에 의하면 순수한 '나'는 없다.
심리철학자 대니얼 데닛은 마음이나 의식은 없고, 우리의 뇌는 온갖 정보가 서로 목소리를 내며 경쟁하는 아수라장이라고 말한다. 이 경쟁의 승리자가 메가폰을 들고 뇌안 곳곳까지 소리가 들리도록 자신의 주장을 외치는데, 이 연속된 메가폰 소리를 우리는 '의식'이라 착각한다는 것이다. 데닛에 의하면 '나'는 착각이다.
신경과학자 가자니가 박사는 '인간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고 모든 것을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를 엮으려는 경향을 가졌고, 하나로 통일된 '나'라는 느낌은 여기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가자니가 박사에게 '나'는 스토리다.
이렇게 ‘인간’은 소멸하는 것인가? 푸코는 인간이 소멸할 것이라고만 했지, 어떠한 형태로 소멸하게 될지, 소멸한 후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될지는 적지 않았다. 푸코가 말한 인간의 소멸은 이루어진 것일까? 혹은 아직 인간의 에피스테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말과 사물>은 강독서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올해는 읽기 어렵겠지만 내년엔, 혹은 그 다음해엔 <말과 사물> 1차 저작을 통독해 보기로 한다.
한편, 여러분은 이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사고를 배후에서 무의식적으로 조종하고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것을 ‘돈’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길기 때문에 아래 다른 글을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