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계보> 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3)편에서 도덕의 계보 1논문을 살펴보고 놀랍게도 선악이 발명된 개념임을 알았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소개한 적이 없음에도 사도 바울이 예수의 죽음을 날조하여 그리스도교를 원한과 복수의 종교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았다.
그리고 (4)편에서 우리는 양심과 죄의식이 칸트가 말하는 것처럼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약속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 행해진 잔혹한 신체 폭력의 결과이며, 인간의 역사 자체가 인간이 약속을 지키도록 교육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죄의식을 심어준 것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였다는 니체의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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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니체는 그리스도교 자체를 비판하기 위해 <안티크리스트>를 따로 쓰지만, 이 책, <도덕의 계보> 역시 그리스도교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책이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비판이 남았다. 이 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그리스도교 비판은 정말 통렬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나는 이 3논문을 가장 좋아한다. 정말 재미있는 논문이니 잘 따라와 주기를 바란다. 늘 그렇지만 최대한 쉽게 쓸 것이다.
금욕주의란 성욕이나 소유욕, 정복욕 같은 본능적인 욕망을 죄악시하면서, 그 욕망들의 충족을 금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한다. 금욕주의자들은 욕망을 분출하거나 충족하는 자들을 타락한 자로 규정하고,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가는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금욕주의는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여러 철학과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는 욕망과 집착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말했고, 불교는 출가자들에게 금욕과 청빈함을 요구한다. 플라톤의 철인은 금욕적이고, 스토아학파 역시 감정의 절제하고 금욕을 통해 평정(아타락시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추구한다.
중세 그리스도교의 금욕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수도원은 극도로 금욕적인 공간이고, 수도사들은 모두 극단적인 금욕과 청빈을 요구받는다.
각각의 금욕주의의 논리는 조금씩 다 다르지만 금욕 필요성에 대한 논리는 대개는 이러한 방식으로 흘러간다. 동물은 욕망을 참지 않는다. 동물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성교하고 싶을 때 성교한다.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답다는 것은 금욕하는 것이고, 금욕을 포기하는 것은 동물적인 것이다. 어떤 가, 그럴 듯 한가?
사실 다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금욕하며 산다. 수험생 때는 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살았고, 대학생 때는 고백하여 혼내주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살았다. 누군가는 운동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오늘도 헬스장에 가고, 누군가는 아침잠을 줄여가며 영어 학원에 간다. 뿐만 아니다. 각자 가진 것에 따라 누군가는 핸드백을 갖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있고, 누군가는 멋진 자동차를 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모두 금욕주의자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금욕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 낸 사람을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지독하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간 친구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차도 없이 뚜벅이로 살며 돈을 모으더니 결국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을 보며 그 친구처럼 아끼지 못했던 내 인생에 대해 조금은 후회를 한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죽어라 영어 공부를 하더니 결국 나 보다 먼저 진급한 김대리에게 조금은 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니체는 바로 이러한 마음이 금욕주의를 있게 했다고 말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마음,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반대로 무언가를 해서, 결국 무언가를 이루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 이러한 자연스러운 마음이 금욕주의가 성립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이제부터 니체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극도로 경건함을 추구했던 중세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2천5백 년 전, 싯다르타의 시대에도 고행은 유행이었다. (싯다르타 본인은 오랜 고행을 했지만, 고행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행을 그만둔다) 가톨릭도, 불교도, 힌두교도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하거나, 사제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다. 이런 경향은 고대 종교적 공동체에서도 나타난다.
결혼의 포기는 금욕의 극치다. 결혼의 포기는 단지 성교나 번식 행위의 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적 유대를 함께 하는 반려 없이 혼자 삶을 살겠다는 것은 무서운 각오 없이 가능하지 않다. 생물학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 모두를 거부하는 이러한 엄청난 고통의 감내가 어떻게 인류의 역사 곳곳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가능했을까? 이 지점에서 니체는 혹시 금욕주의는 유전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농담을 건넨다.
멀리 떨어진 별에서 읽는다면,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나타내는 머리글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도록 할 것이다. 즉 지구는 금욕주의적인 별이다. 자신에 대해, 지구에 대해, 모든 생명에 대해 심한 메스꺼움으로 가득 차 있고,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기면서―아마도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즐거움일 것이다―자신에게 가능한 한 많은 고통을 주는 피조물들의 은둔처일 것이라고.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얼마나 규칙적이고 보편적으로, 즉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나타나는지 생각해 보라. 성직자는 어떤 종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번성하며 모든 계층에서 자라난다. 그는 결코 자신의 가치평가 방식을 유전을 통해 번식시키지 않는다.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그렇다면 금욕주의는 대체 어떻게 가능했는가? 자연적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금욕주의는, 바로 위에서 얘기한 우리의 마음 때문에 성립한 것이다. 지독하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간 친구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영어 공부를 하더니 나보다 먼저 진급한 김대리에게 졌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 그러니까 금욕하는 자를 나 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나아가 우러러 숭상하는 마음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니체의 설명이다.
고대 유럽의 금욕주의자들은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을 간파해 냈다. 내가 금욕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존경하는구나. 나를 우러러보는구나. 이윽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금욕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여야겠다. 더욱 많은 존경을 얻어야겠다. 이러한 기획은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을 규정해 온 이원론과 결합한다.
플라톤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데, 그것이 완전한 이데아와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세계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세계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체적인 욕망이 거짓되고 불순하며 그것이 우리의 세계에 속해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육체와 지상의 삶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지상의 삶은 천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다리 정도로 격하되고, 진정한 즐거움은 천상에 있는 것이 된다. 천상의 즐거움을 누르기 위해 지상의 기쁨과 즐거움은 거부되어야 한다. 금욕주의적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탄생한다.
금욕주의적 그리스도교는 존경심을 자극하기 위해 죄의식을 이용한다. 너는 금욕하는가? 너는 충분히 금욕하는가? 나 보다 훨씬 금욕하는 자의 질문에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더 금욕해야겠구나, 더 경건해져야겠구나, 더 겸양해야겠구나, 더 검소해야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들은 금욕교도가 되어간다. 신도가 생겼으니 이제 금욕주의 역시 성립한다.
여기까지, 본능을 거스르는 금욕주의가 어떻게 성립 가능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그만뒀다면 니체는 세기의 철학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니체는 한 번 더 묻는다. 금욕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말 이것이 전부일까? 그저 금욕주의는 성립하기만을 꿈꾸는 것일까? 이제 니체는 금욕주의자들의 무의식을 정신분석하기 시작한다.
금욕주의자들이 거부한 것은 세속 전체의 삶이다. 그리고 왕과 귀족과 같은 세속의 권력자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세속에 속해 있다. 금욕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모두 거짓된 것이고 불순한 것이며 경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서 금욕주의자들을 향한 존경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금욕주의자들은 세속의 군주보다 높은 곳에 서게 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카노사의 굴욕’을 떠올릴 수 있다)
금욕주의자들은 사실 세속적으로는 패배자다. 그들에겐 세속적으로 일궈낸 승리가 없다. 그런 그들은 세속적 승리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고, 무의식적으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금욕주의자 스스로는 이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에서, 본능을 거부하여 더욱 인간적이 되고자 할 뿐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세속 위에 이데아와 천상을 둠으로서 세속에서의 패배를 전복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쓴다.
실상은 그 반대이다. 대체로 어떤 깊은 본능이 오히려 그에게 번식을 금한다. 이러한 자기모순적 유형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마도 삶 자체에 대한 관심사임이 틀림없다. 여기에서는 견줄 데 없는 원한이, 즉 삶에서의 어떤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삶의 가장 깊고 강하며 근본적인 조건들에 대해 지배자가 되려는 탐욕스러운 본능과 권력의지에 사로잡힌 원한이 지배하고 있다. (중략)
'최후의 단말마 속에서의 승리'라는 깃발 아래서 옛날부터 금욕주의적 이상은 싸워왔다. 이러한 환희와 고통의 이미지 속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은 자신의 가장 밝은 빛, 자신의 구원, 자신의 궁극적인 승리를 인식했던 것이다. 십자가와 호두[숨겨져 있는 삶의 핵심]와 빛, 이것들은 금욕주의적 이상에서는 하나이다.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이렇게 금욕주의는 복수와 권력, 그리고 최종적 승리를 위해 존재한다. 영어 공부해서 승진한 김대리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인간들에겐 금욕하는 성직자들을 자신들보다 더 고상한 인간으로 떠받드는 경향이 있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을 떠받드는 인간들로 인해 권력을 얻는다. 그로서 성직자는 세상의 세속적 권력을 가진 자들(세속의 왕과 귀족들) 위에 군림한다. 자신도 가지고 싶었던 권력에 대한 질투심을 채우고, 끝내 복수를 이룬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그날' 도래하는 천국에서 그들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승리한다고 믿는) 것이다.
금욕주의는 그저 성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금욕주의가 세속의 삶을 거부함으로써 세속을 뛰어넘는 권력이 되는 것을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는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니체의 설명을 쉽게 풀기 위해 니체의 섬세한 논리 전개 대신 비약의 예제로 채웠지만, <도덕의 계보> 3논문에서 니체의 논리는 대략 이러하다. 그리고 니체의 생각에 동의가 된다면 한번 더 자신의 사유 수준을 도약시킬 토대가 여기에 있다.
금욕주의의 ‘금욕’에 자신이 굳게 지지하고 있던 무엇을 넣어보자. 좋은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부동산주의(?)의 예를 들어 보겠다. 혹시 부동산 투자 카페에 가본 적이 있는가?
많은 부동산 카페에 가보면, 부동산 투자로 성공한 소수의 금욕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보통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충분히 노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너는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있는가? 우리, 그러니까 카페의 멤버들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제 노후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카페지기가 말한다. 그렇다면 너희는 금욕하라. 그래서 우리는 금욕한다.
우리는 카페지기의 복음에 따라 미라클 모닝을 외치며 새벽에 일어나, 매일 자기계발 일기를 쓴다. (매일 감사 인사를 하라는 카페지기도 있다) 우리, 그러니까 부동산 카페의 멤버들은 더운 여름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거부하고 양산을 쓰고 임장에 나선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부동산 투자에 성공하여 누릴 미래의 부와 기쁨이 진짜이고, 현재의 나와 내 삶은 진짜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는 부동산 투자서를 읽으며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는 부동산 투자 공부하지 않는 세속의 사람들을 이제 자신의 발 밑에 둔 것 같은 우월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경지에 우리를 인도한 카페지기를 찬양한다. 이렇게 우리는 복수에 성공하고, 카페지기는 권력을 얻는다.
부동산 투자 카페의 카페지기는 ‘진심으로 카페 멤버들이 투자를 통해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금욕주의자들이 ‘진심으로 신도들이 고행을 통해 천상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렇게 금욕주의는 변형되어 여전히 현대 사회의 곳곳에 숨어있다.
내가 굳이 이렇게 약간의 무리수를 둔 것은, 나는 니체가 비판한 것이 그저 금욕주의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유럽 전체가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OO주의에 자신의 판단을 맡기고, 스스로 정신적 노예가 되려고 하는 모든 마음가짐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OO주의가 있다면, 니체가 비판하는 금욕주의의 구도에 한번 넣어보기를 권한다.
여기까지, 제 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끝으로 <도덕의 계보> 세 편이 모두 끝났다. 어떤 철학자의 1차 저작 전체를 정리해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내게도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니체의 철학을 두 줄로 줄이면, 아마도 이런 문장이 될 것이다.
"너를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하고 너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라.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든 네 삶을 사랑하라."
내가 니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는 학창 시절에 자율학습실에 앉아 공부는 하지 않고 연습장에 소설과 단상들을 끄적였다. 그때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글 쓰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마다 죄스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도덕의 계보> 3논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금욕하지 못함에 대한(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공부하지 않음에 대한) 죄책감은 금욕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 죄책감은 전혀 필요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어린아이의 삶은 그런 삶이었던 것이다. 공부하라는 자율학습실에 앉아 자유롭게 소설과 단상을 적어가던 행위는 매우 니체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주말마다 도서관에 나와 글을 쓰는 동안 그래서 늘 행복했다. 글을 쓸 때 나는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누군가에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잘해야 좋아요 서너 개 눌릴 글을, 몇 시간 동안 쓰며 이렇게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이 글을 읽은 당신도 모든 규정을 뿌리치고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찾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이제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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