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작년 봄부터 거의 1년 동안 이어진 하이데거 읽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됐다. 여러 권의 입문서와 해설서들을 읽었고, 하이데거의 1차 저작인 <철학의 근본 물음>과 <존재와 시간> 서문을 읽었다. 예도 선생님의 강독도 50시간 정도 분량을 들었다.
어느 정도 하이데거가 내 안에서 정리되었고, 그래서 당분간 하이데거를 떠나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내가 이 단계까지 이해한(혹은 오해한) 하이데거를 정리해 두려고 한다.
그런데 이 시리즈는 하이데거가 아니라 톨스토이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나는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줄거리를 소개하며 하이데거의 철학에 빗대 그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만 이것은 나의 독창적인 전략이 아니라, 서울대 철학과 박찬국 교수님의 솜씨를 내가 흉내 낸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반 일리치는 3등 문관을 아버지로 둔 3남 1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반 일리치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형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관료의 길을 갔고, 누이는 형과 비슷한 처지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막내는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았다. 이반과 함께 다니던 법률학교를 그만두고 여러 자리를 전전하다 지금은 철도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반은 법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예심판사가 되었다.
영리한 데다 유쾌하고 예의 바른 이반 일리치는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었다. 업무적으로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승진했고, 높은 봉급을 받았다. 사회적으로는 이름난 무도회나 파티에 누구나 초청하고 싶은 인사가 되었다.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여러 부인들과 염문을 뿌렸고, 모자 가게 사장과는 깊은 관계가 되기도 했다. 물론 이반은 그녀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이반은 표도로브나 미헬을 선택했다. 그녀는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아름다웠다. 이반은 그녀가 자신에게 꼭 맞는 결혼상대라고 생각했고, 그 결혼이 스스로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일 것이라 기대했다. 이반은 표도로브나와 결혼했다.
결혼 전까지 완벽한 것 같았던 이반 일리치의 인생은, 바로 그 결혼을 계기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결혼 전까지는 완벽한 여자 같았던 표도르브나는 결혼 후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이반 일리치 주변의 모든 여자를 질투했고, 그의 행동거지를 감시했으며, 그에게 자신을 더 사랑해 달라고 늘 요구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이반 일리치가 검사로 승진해 다른 도시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표도르브나는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녀는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집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이반을 탓했다. 봉급이 올랐지만 아이들 때문에 생활비가 늘어 돈이 부족해졌다. 이반은 그의 아내와 매일 다투었다.
결혼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된 이반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한 전략을 고안해 냈다. 그는 집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쓰기로 했다. 그는 가능하면 더 오래 일했고, 늦게 퇴근했으며, 일찍 퇴근한 날에는 친구들과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집에 머무르는 시간과 표도르브나와 접촉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을 삶의 전략으로 삼았다.
괴로운 결혼 생활이 오래 이어지던 중, 우연히 들른 페테르부르크에서 이반은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법무부에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고, 과거의 동료가 법무부에서 굉장히 높은 자리로 승진했다는 것이다. 이반은 즉시 그를 찾아가 자신에게 좋은 자리를 줄 수 없느냐 물었고, 친구는 기존보다 두 등급이나 높은 판사 자리를 제안했다. 봉급은 3,500 루블에서 5,000 루블로 늘었고, 수도로 돌아오는 이사비 지원도 받게 되었다. 이반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고대하던 수도 생활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표도르브나는 너무나 행복해했다. 이반과 표도르브나는 꿈에 그리던 집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새 집을 장식할 소파 하나, 탁자 하나, 커튼 하나를 고르며 한 때 완전히 망가졌었던 그들의 부부생활을 복구했다. 자녀들도 새 집을 좋아했다.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반과 표도르브나는 신혼 때처럼 사이가 좋아졌고, 법률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자신이 어린 시절 그랬듯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숙녀가 된 딸은 옆 도시의 키 크고 잘 생긴 예심 판사와 사귀었다. 둘은 잘 어울렸다. 이반은 새로운 직장에서도 높은 평판을 유지했다. 비로소 그의 삶은 완벽해진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인생 이야기는 어떠한가?
당신이 꿈꾸었던 삶은 아닐지라도, 그의 삶은 당신의 삶과 꽤 닮아 있을 것이다. 당신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 형제자매들과 부대끼며 자랐고, 꽤나 열심히 공부하여 바라던, 혹은 운이 조금 없었다면 바랐단 학교보다는 조금 모자란 대학교에 진학했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동아리나 게임 같은 취미에 빠져 학업을 잠시 등한시했을 수도 있지만 결국 학교는 졸업했을 것이다.
잠시 방황을 했을 수는 있지만 직장을 구했고, 몇 번의 이직이 있었을 수는 있겠으나 그럭저럭 회사를 다니고 있을 것이다. 어떤 거래를 성사시키거나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성취를 경험하고, 그에 따라 괜찮은 능력을 가졌다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풋풋했던 첫사랑 시절도 있었지만 혼기가 찬 당신은 첫눈에 보고 반한 상대와 사랑에 빠질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소개를 받기 전에 얼굴보다는 직업이 먼저 궁금해지고, 키나 몸매보다는 그가 모아 놓은 재산이 얼마인지 궁금해졌을 수도 있다. 남자는 매너와 성격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속으로는 얘는 언제쯤 철이 들까 조금 걱정을 한다.
우리의 삶은 이렇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차지하고, 어떤 관계를 바라고, 만들어낸다. 학창 시절엔 좋은 대학교를 욕망하고, 대학교에 가서는 좋은 직장을 욕망하고, 그 직장에 들어가면 더 높은 직위와 연봉을 욕망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취가 이루어진다. 이반 일리치가 판사의 지위와 5,000 루블의 봉급을 성취한 것처럼, 당신에게도 크던 작던 그 사회적 성취가 있었을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의미에서는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철부지 시절에 아무런 이득을 따지지 않고 어울렸던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면 우리는 계산적으로 관계를 선택한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도 그렇다. 그 사람의 미소보다 직업이 중요해지고, 그 사람의 유머러스함 보다 재정적 안정성이 중요해진다. 이반 일리치가 여러 부인들과 염문을 뿌리고, 모자 가게 사장과 깊은 관계가 되었지만 결국 귀족 출신인 표도르브나와 결혼한 것처럼, 당신도 사회적 이득을 따지며 인간관계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가리켜 비본래적(非本來的) 삶이라고 말한다.
먼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이데거가 비본래적 삶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가장 쉬운 오해이기도 하다)
판사로 승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좋은 집을 꾸미고, 사회적으로 번듯한 배우자를 찾는 것은 비난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당연히 겪어야 할,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공동존재인 우리가 살아가는 당연한 일상이다. 다만 하이데거는 우리의 삶에 대해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당신이 원한 삶인가?“
우리가 욕망하는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 더 높은 직위와 연봉, 멋진 배우자는 정말 당신이 원한 것일까? 아니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그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당신이 좋은 대학교를 바랐던 것은 어머니나 아버지의 욕망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샤넬백을 바랐던 것은 아이유가 들었던 그 가방을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회가 성공이라고 이미 규정해 놓은 기준을 나의 목표로 삼고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타자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 개성을 상실하고 익명이 되어버린 대중을 가리켜 세인(世人, Das Man)이라고 부른다.
세인의 가장 큰 특징은 평균성이다. 우리는 늘 타인을 의식한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살아간다.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해야 안심이 되고, 남들보다 조금 나은 것 같으면 만족한다. 우리는 늘 우리 스스로보다 나은 무엇인 척하면서 살아간다. 박찬국 교수님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에서 이렇게 쓰셨다.
격차성이라는 공동존재의 경향은 우리가 항상 평균성의 지배 아래 있다는데 근거한다. 이렇게 평균성이 지배하는 세상 사람의 공동존재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도 좋고 해서는 안되는지가 미리 규정되어 있으며, 이러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예외는 허용되지 않는다. (중략) 평균성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러한 규정에서 보듯이 이 경우 평균성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는 기준이란 실은 천박한 기준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평균성의 지배 아래 존재하기 때문에, 현존재가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존재 가능성은 하향평준화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박찬국
이반 일리치는 수도에 새 집을 장만하고, 꿈에 그리던 그와 가족의 보금자리를 꾸민다. 골동품 상점을 돌며 앤틱한 가구를 구입하고, 커튼을 고른다. 그는 완벽한 귀족의 집을 꾸몄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매우 뿌듯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톨스토이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부자가 아니면서도 부자와 비슷하게 보이고 싶은 이들이 비슷비슷하게 꾸며내는 모습을 넘지 못했다. 비단천, 흑단, 꽃장식, 양탄자, 청동상 등 중후하고 화려한 모든 것은 명문가를 흉내 내려는 노력의 일환에 불과했다. 이반 일리치의 집은 명문가를 흉내 내려는 사람들의 집과 똑같아서, 딱 그러했고 딱히 눈에 뜨이지도 않는 집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특별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이것이 바로 평균성이다. 이반은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귀족의 집을 꾸몄다고 기뻐하고 있었지만 실은 사회에서 ‘명문가를 흉내 내는 사람들의 집’과 별 다를 바 없는 집을 꾸몄을 뿐인 것이다. 평균성에 사로잡힌 집을 꾸민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평균적인 세인의 삶을 재현해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 의미를 망각한 채, 세인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일상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을 하이데거는 퇴락(Verfallen)이라고 한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존재인 것이다.
퇴락한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퇴락이라는 어감만을 놓고 보면 부정적이고 타락한 것 같아 불편함을 느낄 것 같지만 실은 반대다. 퇴락한 세인은 편안함을 느낀다. 굳이 머리 아프게 ‘나는 왜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 같은 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퇴락한 우리는 사회가 욕망하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자본주의의 명령대로 돈을 벌고, 사회가 말하는 성공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 노력이 어려울지언정 머리가 아프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의 비본래적 일상을 기계처럼, 그러나 안락하게 살아간다.
그렇다면 세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본래적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우리가 완전히 빠져 있는 이 비본래적 일상에서 눈을 돌릴 수 있는가? 평균적인 세인의 삶에서 빠져나와 내 일상의 타자성을 관조할 수 있는가?
다시 이반 일리치의 삶으로 돌아가 보자.
이반 일리치는 집을 꾸미는 과정에서 옆구리 부상을 입는다. 커튼을 달러 사다리를 오르다 미끄러져 떨어진 것이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이반의 옆구리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되었다. 입 안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고,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며 그들이 처방한 약을 먹어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의사들은 이반의 증세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어느 누구도 증상의 원인을 규명해 내지는 못했다. 그의 병명은 미상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도 할 수 없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자, 의사들은 어느 순간 약 대신 모르핀과 같은 진통제를 처방하기 시작했다. 이반은 통증 때문에 진통제 없이 잠들 수 없게 되었다.
문득 이반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과 분노를 한꺼번에 느낀다. 그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자신의 죽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반 일리치도 모든 인간이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해한 죽음은 인간 일반에게 속해 있는 것이었지, 자신에게 속한 것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매일 뉴스와 부고를 통해 누군가의 죽음을 접한다. 하지만 세인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서 죽음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도 출근을 해서 돈을 벌고, 내일 출근을 위해 퇴근 후에 맥주나 한잔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우리는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장소, 즉 장례식장이나 묘지에 가서도 우리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인에게 죽음은 항상 타자에게 속해있다. ‘누군가가 죽었다’는 말은 ‘나도 언젠가 죽는다’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애도하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갑작스레 하지 못하게 된 야근이나 가지 못하게 된 친구와의 술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망각하고, 죽음의 공간은 우리 세인들에겐 죽음을 배제하는 공간이 된다. (이것을 가리켜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로 나의 죽음이 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이 거짓된 망각과 기만적 위안은 산산조각이 난다. 누구도 나 대신 죽음을 경험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명예나 권력으로 나의 죽음을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도 마찬가지였다. 5,000 루블의 봉급도, 그가 가진 부유해 보이는 저택도, 판사라는 지위도 그의 죽음을 대신할 수는 없었다. 이반 일리치처럼, 우리는 오롯이 혼자 죽는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가장 근본적 속성, 즉 단독성(Jemeinigkeit)이다.
우리는 이렇게 진정한 죽음 앞에 떠밀리듯 혼자 서고 나서야, 비로소 비본래적 삶에서 벗어나게 된다. 죽음이라는 낯설고 두려운 사태 앞에서 섰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이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가리켜 ‘불안은 죽음이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자신을 고지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반 일리치는 서재에 틀어 박힌다. 아무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오롯이 자신의 내면과 혼자 대면한다. 그 고통스러운 밤의 심연 한가운데에서, 이반은 내면으로부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는다.
“무엇이 필요한가?”
“고통받지 않고, 그리고 잘 사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 잘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지?”
“전에 살았던 것처럼 행복하고 훌륭하게 사는 것입니다.“
“전에는 어떻게 행복하고 훌륭하게 살았지?”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관료로서의 성취, 높은 봉급, 사교계의 영광, 훌륭한 집 같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음을 앞두고 돌아본 사회적 성취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이반 일리치는 젊었던 시절 아무 조건 없이 사랑했었던 어떤 여인을 떠올렸다. 싸울 때마다 증오했고, 싸우기 싫어 외면했던 아내, 표도르브나에게 연민을 느꼈다. 이반 일리치는 집을 멀리하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카드놀이를 하는 동안 사실은 자신이 아내를 괴롭혀왔음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는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의 부름이다. 하이데거의 양심은 도덕적,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양심은 본래적 자아의 목소리다. 사회적 명령과 책임, 의무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자신이 타인의 욕망에 이끌려 비본래적으로만 살아왔음을 온전히 인정하고 가족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을 품은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그를 짓누르던 끔찍한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 줄기 빛이 쏟아진다. 죽음이 있어야 할 자리에 빛이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기뻐하며 외친다. “아, 이거로구나! 이렇게 기쁠 수가!”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 돈이나 지위, 체면과 같은 사회적 명령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로서 결단을 내리는 이러한 실존적 도약을 하이데거는 기투(企投, Entwurf)라고 부른다.
우리는 모두 동의 없이 태어난다. 우리는 이미 이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피투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이렇게 양심의 부름을 듣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기획하며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기투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앞둔 순간, 이 짧은 찰나의 시투를 통해 세인의 삶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아를 회복한다. 그의 육체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반 일리치는 그 순간 실존으로서 완성된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었다. 그리고 동료들은 이반 일리치의 부고를 신문에서 읽는다. 그의 절친한 동료들은 부고를 읽고 무엇을 했을까? 슬픔을 느끼고 애도를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이반의 죽음으로 인해 진행될 조직개편과 승진, 봉급 인상을 생각했다. 동료들은 이반의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저녁에 있을 카드놀이의 약속 시간을 고려하여 장례식장을 떠났다. 표도르브나는 남편의 친구를 붙잡고 남편의 죽음 이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어떤 것이 있는지 묻는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세인들의 비본래적 세계다. 이반 일리치가 고통의 심연 속에서 발견한 찬란한 빛은,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닿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평균성의 지배 아래에서 죽음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이반 일리치처럼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죽음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말이다.
어떤가? 본격적으로 하이데거 시리즈를 시작하기 전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하이데거의 철학을 겉핥기를 해보았다. 이제 앞으로 이어질 몇 편의 글은 이 글보다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정말 깊이 있지만 그만큼 어렵기도 하다.
우리가 이반 일리치의 삶에 공감하고 그의 삶 속에 우리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하이데거의 철학은 형이상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렇게 우리의 삶과 매 순간 맞닿아 있다. 그리고 동시에 하이데거는 2천5백 년 서양 철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망각해 왔는지 찾아낸다. 죽음은 분명한 우리의 존재 속성이지만(우리는 모두가 죽지만) 우리가 매 순간 죽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하이데거에 의하면 서양 철학은 그동안 분명한 진리를 망각해 왔다. 그것이 바로 존재(存在, Sein)다.
존재를 어떻게 망각해 왔을까? 존재를 망각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존재가 대체 무엇일까?
이 시리즈는 이 거대하고 어려운 질문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을 찾아가는 시리즈다. 존재를 잃어버린 시대에 존재에 대해 묻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칸트를 부수고 일어서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쉽게 소개하는 시리즈가 될 것이다.
긴 여정을 시작할 때는 늘 약간의 아득함을 느낀다. 정말 이 시리즈를 완성할 수 있을까? 하고. 하지만 언제나처럼 또 꾸역꾸역 걸어가 볼 것이다. 첫 글이 이미 많이 길어졌다. 이제 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