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인식을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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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 우리는 이반 일리치의 삶에 빗대 우리의 삶도 이반 일리치와 마찬가지로 비본래적임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2편에서 우리의 본래적 존재를 망각시킨 장본인이 세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도구로 대하게 만든 근대의 계산적 사유임을,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존재를 망각해 버렸음을 알았다.
이제 선명한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존재를 망각해 버렸다면, 그렇다면 대체 그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와 사물들, 나아가 우주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있게 될 것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서구 형이상학에서는 존재물음이라고 한다. 존재물음과 함께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존재의 의미 자체에 대해서는 4편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전에 우리는 3편에서 하이데거가 존재물음을 통해 누구를 넘어서고자 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하이데거가 넘어서려 했던 철학자는 다름 아닌 이마누엘 칸트다. 우리는 하이데거가 칸트를 넘어서는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아포리즘 하나를 이해해 볼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인식을 앞선다’는 유명한 아포리즘을 남겼다. 존재가 인식 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착해 있다는 말인데, 이미 조금 어렵다. 하지만 이 아포리즘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존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아포리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하이데거가 넘어서려 했던 칸트의 인식론에 대해 먼저 살펴볼 것이다.
칸트는 정말 놀라운 철학자다. 칸트의 구도를 한 번 이해하고 나면 세상 모든 것을 칸트의 구도에 놓고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칸트의 구도에서 출발하면 결코 하이데거의 구도, 즉 인식에 앞서 있는 존재에 닿을 수 없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어려운 이유다. 칸트를 모르고서는 결코 하이데거를 이해할 수 없는데, 칸트에서 출발해서는 절대로 하이데거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의 초반부 절반은 하이데거가 아니라 칸트가 될 것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칸트 철학을 한 줄도 인용하지 않고도 우리는 칸트의 구도를 이해해 볼 것이다. 우선 사과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시작해 보자.
우리는 눈앞에 있는 사과가 빨갛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먼저 광원이 있다. 태양이든 형광등이든 어딘가에서 발사된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온다. 이때 튕겨 나온 광자의 파장 길이는 대략 750nm 정도가 된다. 이 광자는 우리의 망막에 닿고, 시각세포는 이 750nm 길이의 파장을 특정 전기 신호로 바꾼다.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 전기신호가 전달되면, 뇌는 그제야 알아차린다. 아, 빨간색이로구나.
뇌는 눈도, 코도, 어떠한 외부 감각기관도 직접 갖고 있지 않다. 오로지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신경을 통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전기적 신호만을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이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 짜잔, 내 머릿속에 빨간 사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빨간색이라는 실체가 이 물리적 과정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광자의 파장 길이와 시각세포가 발생시킨 전기 신호, 시신경이 이를 운반하는 과정 그 어디에도 빨간색은 없다. 광원과 광자와 750nm 길이의 파장과, 시신경과 뇌의 전기 신호 교환은 있지만 빨간색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저 사과 표면의 빨간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체의 바깥쪽 사과 껍질에 있는가, 아니면 내 머릿속에 있는가? 합리적으로 후자라고밖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제 엄청난 질문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색깔로 드러나는 저 외부 세계는 진짜 외부에 존재하는가? 빨간색이 내 안에 있는데, 내가 경험하는 외부 세계가 내 바깥에 있을 수 있는가?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내면에 비친 세계이다. 사과는 우리 인식의 원인이 아니다. 사과는 결과다. 오감을 통해 들어온 수많은 전기 신호가 우리의 인식과정을 통해 내 머릿속에 구축해 낸 심상(心象), 즉 이미지인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나의 밖이 아니라 나의 안에 있다. 세계는 내 안에 갇혀 있다. 이 놀라운 사실을 믿기 어렵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공간을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구도가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우리는 사과가 1m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일반적으로 인간은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은 가로방향으로 약 65m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래서 양쪽 눈으로는 미세하게 다른 각도에서 본 이미지가 들어온다. 이 두 이미지의 차이를 양안시차(binocular disparity)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VR(가상현실)의 원리다.
약 65mm 떨어진 곳에서 각각 렌더링 한 두 개의 영상을 왼쪽 눈과 오른쪽 눈에 따로 전달하면, 뇌는 양 눈으로 각각 다른 평면 모니터를 보면서 3차원의 입체감을 경험하게 된다. (가상현실을 만들기 위해 공간이 필요하지 않음에 주목하라) 즉 우리가 공간을 느끼는 것은 실제로 공간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신호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양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신호의 차이 때문에 공간을 경험한다면, 지금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외부에 있는가? 물론 아니다. 왼쪽 눈을 통과한 이미지도 나의 내부에 있고, 오른쪽 눈을 통과한 이미지 역시 나의 내부에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이미지의 차이 역시 우리의 내부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차이가 우리의 내부에 있다면 우리는 더욱 놀라운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배치하고 거리를 가늠하는 3차원의 공간은 우리의 외부에 있지 않다. 공간은 우리의 내부에 있다. 우리가 사과의 빨간색을 만들어낸 다음 처음부터 존재했던 바깥의 공간 속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이 공간, 그러니까 세계 자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외부 세계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실은 감각을 통해 내 안에 들어와 나라는 주체에 의해 다시 세워진 내면의 세계임을 밝혀낸 철학자가 바로 칸트다. 칸트는 이렇게 내 안에 갇혀 있으면서 내 밖을 구성하는, 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하는 이 인식된 세계를 현상계(現象界, phenomenon)라고 부른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이 다채롭고 색채로 가득한 세계가 실은 내 머릿속에 갇힌 가상의 공간인 것이다.
칸트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가장 쉽고 빠르게 설명할 수 있는 칸트의 구도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온 세계를 우리 안에서 일으켜 세우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으킨 세계를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이 칸트의 구도에 대고 질문을 한번 해보자. 이 구도에서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칸트의 설명방식에 따르면 객관적 사물과 주관적 표상은 서로 구분되며, 우리의 인식은 객관적인 사물 자체의 인식이 아니라 주관적인 사물의 표상의 인식이다. 즉 우리는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객관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주관적 표상일 뿐인 것이다. 나는 사물이 나의 머릿속에 그려주는 표상만을 알며, 따라서 사물이 내게 어떻게 보이는지만을 알 뿐이지, 사물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칸트 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칸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비친 세상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식에는, 우리가 만들어낸 현상계에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존재는 우리의 바깥에,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곳에, 사물 그 자체에 있다. 즉 칸트의 구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존재를 발견해 낼 방법이 없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이 다채로운 세상 속에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자, 우리는 비로소 이 지점에 섰다. 바로 여기가 하이데거의 출발점이다. 하이데거의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정말 우리는 존재를 알 수 없는가? 이제 하이데거가 칸트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칸트를 모르면 하이데거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다.
이번엔 사과 대신 이름도 모르는, 당신이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정체불명의 열대 과일을 당신의 책상 위에 놓아보자.
칸트의 구도에 따르면, 지금 당신의 현상계에 들어온 이 열대 과일의 정보는 당신의 눈을 통해 들어온 외관의 모양과 색상뿐이다. 당신은 아직 이 과일이 무슨 맛인지, 만졌을 때 어떤 질감인지, 쪼개보기 전엔 내부 과육의 색상이 어떤지 모른다. 즉, 당신의 인식의 결과인 당신의 현상계엔 이 과일의 맛과 향과 내부의 색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지금 당신의 현상계(인식)에 그 정보가 없다고 해서, 저 책상 위에 놓인 과일의 진짜 맛과 향과 내부의 색상이 정말로 이 세계에 없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있다. 저 열대 과일은 그 고유한 맛과 향과 질감을 처음부터 온전히 품은 채 거기에 있다. 그것들이 아직 당신의 감각 기관을 통과하지 못해 당신의 현상계 안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는 방금 칸트의 견고한 성벽에 난 작은 균열 사이로 존재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당신은 인식된 세계를 살아가지만, 결코 인식된 세계가 이 우주의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인식된 세계는 존재의 관점에서 보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식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인식 이전에 무언가가 이미 우리에게 먼저 도착해 있다.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했어도 저 대상은 이미 고유한 특성(존재)을 가진 채 저기 묵묵히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재는 인식을 앞선다’는 아포리즘의 의미다. 우리가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전기 신호들을 종합하고 해석하여 세계로 일으켜 세우기 훨씬 전부터, 존재는 그곳에 자신의 온전한 전체성(totality)을 품은 채 이미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존재는 인식을 앞선다는 말이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린다면, 이제 과일들이 굴러다니는 책상을 벗어나 너른 곳으로 가자. 우리가 가 볼 곳은 광활한 우주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자연에는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 그리고 중력이다.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 이론은 늘 상대방을 포섭하려 드는데, 이 중 양자역학의 중력은 아인슈타인 본인에 의해 일반상대성 이론으로 통합되었다.
상대성 이론 이후에는 양자역학 쪽에서 성취가 있었다. 약한 핵력과 강한 핵력이 강력장이라는 개념을 통해 양자장 이론에 통합된 것이다. 하지만 중력은 그렇지 않았다. 중력을 통합한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을 양자이론에 도입하려고 할 때마다, 그 계산은 수학적으로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다. 어떤 물리적 과정이 발생할 확률(예를 들어 전기적으로는 서로 밀고, 중력으로는 서로 당기는 두 개의 전자가 서로 스쳐 지나갈 확률)을 계산해 보면 늘 '무한대'라는 답이 주어진다.
공간의 부피나 물질의 양은 경우에 따라 무한대가 될 수 있지만 확률은 0과 1 사이의 값만 가질 수 있다. 확률이 무한대라는 것은 어떤 사건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무한대의 확률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 두 방정식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현대에 와서도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서로를 통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만약 양쪽을 통합하는 방정식이 발견된다면, 그 방정식은 ‘신의 방정식(The God Equation)'이라 불릴 것이라고 물리학자 미치오 카쿠는 말한다) 그나마 현대 이론 물리학 중 신의 방정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평가받는 것은 1980년대에 등장한 초끈 이론(Superstring Theory)다. 그런데 이 이론이 옳다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그러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계관이 발생한다.
첫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니라는 것(다중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우주가 시간-공간 4차원이 아니라 10차원 혹은 11차원이라는 것이다.
우주가 10차원, 혹은 11차원이라는 말은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3차원 공간에서 시간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5차원이나 6차원을 인식은커녕 상상해 낼 수 조차 없다. 평면 만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개미가 갑자기 공중에 붕 떠오른 상황을 상상해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 인식의 한계다. 우주라는 존재자는 실은 10차원, 11차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존재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인간은 그중 오직 시공간 4차원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우주 바깥에 우리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다른 우주가 존재자로서 존재하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가 속한 우리의 우주만을 인식하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인식은 존재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이렇게 인식을 앞질러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11차원과 다중우주를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의 불완전함이나 이성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일까? 칸트의 구도에서는 그럴 수 있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즉 물자체(Thing-in-itself)의 영역에 남아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대답은 다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11차원과 다중우주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결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 인간, 현-존재의 존재 방식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11차원과 다중우주를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4차원과 우리 우주만을 인식하는 우리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리면 우리는 시공간 4차원과, 우리의 우주만을 경험할 수 있는 현사실성 속으로 던져져 있는 것이다.
한 번도 맛보지 않은 열대 과일의 맛, 그러니까 과일의 존재 특성은 그것을 우리가 먹음으로써 현상계에 편입되지만, 어떤 존재 특성은 결코 현상계에 포섭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벗어날 수 없음으로 11차원을 감각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우리 우주 바깥에 있는 다중 우주라는 존재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경험할 수 없다.
이제 인식에 갇혀 있는 칸트의 현상계가 좁아 보일 것이다. 현상계 바깥에 얼마나 거대한 존재(Sein)의 우주가 펼쳐져 있는지 알았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살펴보겠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는 은폐되어 있다. 존재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초끈이론이 폭로하기 전까지, 우리는 우주가 11차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다중우주의 존재는 허튼소리가 아니다. 현대 물리학은 외연을 확장하는 여러 장면에서 필연적으로 다중우주와 마주치고 있다. (다만 이 이야기는 본문의 주제와는 멀어서, 하단에 다른 글을 링크하겠다)
우리는 3편에서 존재가 인식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의 아포리즘을 이해했고, 하이데거가 어떻게 칸트를 넘어섰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여정은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는 인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뿐, 존재자와 존재 그 자체, 그리고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이야기를 시작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칸트적 인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아직 이렇게 묻지 못했다.
4편에서 마침내 우리는 존재물음 속으로 들어가 볼 것이다. 존재자가 은폐했던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탈은폐(Aletheia)에 대해 살펴보고, 존재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 기분인 경-탄(Thaumazein)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칸트에 대해 더 상세히 적은 글과, 하이데거를 읽다 갑자기 다중우주가 궁금해졌을 누군가를 위해 다른 글들을 하단에 링크한다.
https://brunch.co.kr/@iyooha/107
https://blog.naver.com/iyooha/223001639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