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4) 존재의 의미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by 이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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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과 2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본래적 존재를 잃어버린 것이 과학 기술 문명을 이룩한 이성과, 그 이성이 만들어낸 계산적 사유 때문임을 알았다. 그리고 3편에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가 무엇인지 감을 잡기 위해 칸트적 인식과, 그 인식에 잡히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 존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인식과 어떻게 다른지는 알았다.


4편에서는 드디어 우리는 존재질문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망각했고, 인식에 앞서 우리에게 이미 도착해 있는 무언가가 존재라면, 대체 존재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전에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세 철학소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존재자’, ‘존재’, 그리고 ‘존재론’이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것은 모두 존재자다. 계란, 후라이팬, 가스 스토브, 주전자, 아이패드... (c) Microsoft Copilot


가장 쉬운 철학소부터 시작하자. 첫 번째는 존재자(Seiendes)다. 존재자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모든 것들이다. 나, 당신, 당신이 들고 있는 스마트폰, 눈앞의 책상과 창문, 밖에 서 있는 산과 바다, 지구, 그리고 거대한 우주는 모두 존재자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뿐만이 존재자는 아니다. 불어오는 바람이나 짙은 어둠, 내 마음속의 사랑과 미움, 예술적 감흥 역시 모두 존재자다. 쉽게 말해 '있다(there is)'와 '이다(it is)'로 묘사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대상이 존재자다.


여기까지는 아주 쉽다. 이제 조금 어려워질 차례다. 두 번째 단어, 존재(Sein)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한국어는 '있다(존재함)'와 '이다(속성)'를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지만, 라틴 계열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에서 'am'은 '있다'의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나는 게임 프로듀서다(I am a game producer)"에서 'am'은 '이다'의 의미로 쓰였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Sein, Being)는 바로 존재자가 가진 모든 '있다'와 모든 '이다'를 합쳐 놓은 것이다.


(c) Bon Vivant / unsplash.com


조금 어렵다면 3편에서 보았었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열대 과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열대 과일은 말할 것도 없이 존재자다. 당신 눈앞에 이렇게 있다. 하지만 그 과일의 모든 속성이 드러나 있는가? 당신은 아직 그 과일의 맛을 모른다. 만졌을 때 어떤 질감인지, 내부 과육의 색상이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열대 과일의 어떤 ‘이다’는 당신에게 드러나있지만, 어떤 ‘이다’는 당신에게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이다.


‘있다’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은 당신 눈앞에 있는 이 과일은 한 시간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그것은 냉장고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전에는 마트에 있었고, 그전에는 어떤 물류회사의 냉장 물류 창고에 있었을 것이다. 그전에는 그 과일의 고향(열대의 어느 나라)에서 한국으로의 선적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 과일의 ‘있다’ 또한 당신에게 모두 드러나지 않는다. 당신은 오직 당신이 오감으로 경험한 것만을 인식한다.


어떤 존재자가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오감과, 그 오감을 넘어선 모든 존재 특성의 총합, 이것이 바로 존재다.


또한 이것을 알고 나면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존재를 고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상 위에 과일을 놓아둔 채 며칠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 과일은 수분과 향을 잃을 것이다. 달콤한 냄새에 날벌레들이 주변에 모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과일은 힘을 잃고 썩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과일이 책상 위에 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열대 과일이라는 존재자에겐 없는 속성들이다.


매 순간 존재자는 새로운 존재 특성을 얻고, 기존의 존재 특성을 잃는다. 위치가 변경되며 새로운 ‘있다’를 획득하기도 하고, 수분을 조금 잃고 새로운 성분 구성 속성을 ‘이다’로서 획득하기도 한다. 이로써 존재자는 매 순간 새로운 존재를 획득한다. 어떠한 순간에도 똑같은 존재자는 없다. 당신도 나도 매 순간 변해간다. 하루가 지나면 우리는 하루만큼 더 늙고, 책을 한 권 읽으면 우리는 책 한 권만큼의 지식을 더 얻는다. 우리는 끊임없는 되어감 속에 있는 것이다.


5편에서 하게 될 이야기지만 한마디만 더 덧붙이면 이것이 하이데거의 주저 제목이 <존재와 시간>인 이유다. 우리가 되어감 속에 있다면 이 되어감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시간이 존재의 배경으로, 즉 지평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존재는 불가능하다. 시간이 없다면, 즉 변화의 배경이 고정되면 존재 역시 고정된다. 되어감은 불가능해진다. 변화, 즉 되어감으로써의 존재는 시간을 전제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시간성이고, 우리가 하이데거를 첫 번째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마지막 편에서 하도록 하겠다.


존재는 모든 ‘있다’와 모든 ’이다‘이다. 지금껏 본 것처럼 존재는 존재자를 넘어서 있으며, 우리의 인식 범위보다 훨씬 넓고 거대하며, 매 순간 변화하며 되어감 속에 있다.


존재자와 존재가 무엇인지 조금 감을 잡았다면 이제 마지막 철학소인 존재론에 대해 알아보자.




존재론은 존재와 다르다. OO론은 때로 OO과 정반대의 결론을 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보자. 특수상대성 이론은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상대성에 대한 이론이고, 일반상대성 이론은 가속도와 중력 사이의 상대성에 대한 이론이지만, 그 결론은 상대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들에서 이렇게 묻는다. “이들 사이가 상대적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그 결론은 놀랍다. 상대성 이론의 결론은 빛의 본래적 속도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언제나 똑같다는 절대성을 우주법칙의 뼈대로 세우기 위해 기존에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을 상대적인 것으로 상정한다. 그리고 그 목적은 빛의 속도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함인 것이다. 상대성이론의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적이지 않다.


이제 존재론은 존재와 다를 것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존재는 사물의 전체성(모든 있다와 모든 이다, totality)이라고 정의했다. 존재론은 그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즉 존재론은 이런 질문에 답하는 행위다.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질문이 낯선가? 축하한다. 이 질문이 낯설다는 것은 당신이 이 시리즈를 제대로 읽어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나와 당신과 이 우주가 있어서, 당신은 내가 쓴 이 글을 읽고 있는가? 우리는 보통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런 질문을 접한 당신은 평소의 당신과 좀 다른 사람이라고, 먼 사람이라고 느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존재적이다. 우리는 주어진 대로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고, 일을 하다 퇴근하여 TV 앞에서 맥주를 한잔하고 잠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이다’와 ‘있다’ 사이에 머문다. 나는 회사원이니까 회사에 있다. 나는 학생이니까 학교에 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퇴락한 세인인 우리는 존재적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론적 인간이 될 때, 우리에게 낯섦을 느낀다. 우리는 존재론적인 인간이 될 때 우리에게서 멀다고 느낀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세인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현재와 여기에 묶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 내가 획득한 과거와, 아직 획득하지 못한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유명한 아포리즘, 존재적으로 가까운 것은 존재론적으로 가장 멀다는 말의 의미다. 나는 2편에서 도구로 전락한 인간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에게 “나는 왜 존재하는가?” 하고 묻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하는 자가 현-존재이며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를 회복하기 위한 출발점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 말의 의미다. 현-존재는 존재론적 인간이다. 퇴락하여 존재적으로 살아가는 평소의 우리에게 가장 먼 것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철학하는 인간, 즉 현-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이 어려운 아포리즘의 의미에 대해 다시 얘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세인으로 살아가던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가장 먼 존재인 현-존재가 되는 걸까? 그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우리는 1편에서 만났던 이반 일리치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의 삶을 기반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소들을 하나씩 정리해 볼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1) 내던져져 있음 (피투성)


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군가의 동의를 받았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 국가, 시대, 사회적 계급이라는 조건 속으로 내던져진 채 태어난다. 이반 일리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3등 문관의 아들로, 제정 러시아라는 사회적 배경 속으로 내던져졌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의 피투성(被投性)이며, 이것이 바로 현-존재의 처해있음으로써의 현사실성이다.


2) 퇴락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사실성을 하루하루 겪으며 무비판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는 사회가 정한 목표들을 욕망하게 된다. 사회가 성공이라고 규정한 좋은 직장, 높은 연봉, 좋은 집,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욕망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판사로 승진했고, 5천 루블의 봉급을 받았으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저택을 구입했고, 귀족 출신 처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퇴락은 타락이 아니다. 우리는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조차 실은 잘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내던져진 세상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그 세상의 규칙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기꺼이 퇴락한다. 내던져진 세상 속에서 그 규칙을 따르며 우리는 불편함이 아니라 안락함을 느낀다.


3) 불안


하지만 이 기만적 안락함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는 언젠가 불안과 마주한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 언젠가는 이렇게 묻게 된다. 이게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인가? 누구에게나 이런 질문이 찾아온다.


우리는 세인으로만 세상을 살아가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 퇴락한 삶의 안락함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온다. 바로 자신의 죽음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때이다. 커튼을 달다 옆구리를 다친 이반 일리치에게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 시작된다. 의사들은 그의 병명을 찾지 못했고, 그는 자신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재산, 명예, 직위, 그 무엇으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절대적 무의미함이 이반 일리치를 덮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불안이다. 불안은 특정 대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존재 가능성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이다.


4) 죽음으로의 선구


우리는 대개 죽음을 타인에게 속한 것으로 여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접했음에도 친구들은 태연히 저녁 카드 게임 테이블에 나타난다. 이반의 아내는 죽음 보다 이후 받게 될 연금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이반 일리치 자신만은 그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누구도 대신 죽어줄 수 없는 단독자로서 그는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 누구나 한 번은 단독자로서 그 앞에서 서야만 하는 죽음에게 미리 달려가 그 끝을 삶의 지평으로 끌어안는 태도를 죽음으로의 선구(先駆)라고 부른다.


5) 경악


죽음 앞에 선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지금껏 자랑스럽게 여겼던 관료로서의 성취와 사교계의 영광이 얼마나 텅 빈 것인지,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내가 주변 동료와 가족,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헛된 성취와 영광을 위해 도구로 대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이 모두 무너진다. 그는 단지 내던져져 있었음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사실성에 순종하며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경악이다. 자신이 원했던 것들이 사실은 타자의 욕망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순간 현-존재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낯설어지는 경험을 한다. 이 감정을 하이데거는 경악이라고 말한다.


6) 양심의 부름


경악과 고통의 심연 속에서 이반 일리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를 듣는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이지?” 이 질문을 들었을 때, 자신의 비본래적 삶이 이미 헛된 것이었음을 알아버린, 이미 경악의 기분을 느껴버린 이반 일리치는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인가?” 이 질문은 도덕적인 질문이나 훈계가 아니다. 양심의 부름은 현사실성에 빠져 있었던 비본래적 자아에게 들려오는 본래적 자아의 목소리다.


7) 기투(企投)


양심의 부름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침내 자신이 삶이 거짓된 삶이었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한다. 자신을 괴롭히던 아내와 가족들에게 연민을 품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한다. 사회적 명령과 세인들의 시선을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찾는 것, 그리고 본래적 자아를 미래를 향해 던져나가는 것, 하이데거는 자신의 미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기획하고, 현사실성을 벗어나 자신을 스스로 내던지는 이러한 실존적 도약을 기투라고 부른다.


8) 실존성(實存性)


이반 일리치의 육체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그는 기투를 통해 그의 현사실성을 벗어난 진정한 자신을 회복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동물들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묻고, 스스로 결단하여 미래 존재 가능성 중 자신의 진정한 삶을 선택하여 그 삶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실존성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의 탄생에는 당연히 하이데거의 지분이 있지만, 하이데거 자체는 실존주의자는 아니다)


자, 아주 간단히 요약했지만 여기까지가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질문,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즉 현-존재에게 있어 존재란, 세상에 내던져져(피투 된) 퇴락한 우리가, 죽음을 선구하여 불안과 경악 속에서 양심의 소리를 듣고, 비로소 나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투함으로서 완성해 나가는, 실존의 끊임없는 운동이다.


이것이 위에서 살펴본 대로 “존재적으로 가장 가까운 것이 존재론적으로 가장 먼” 이유다. 존재적인 것은 피투 된 우리다. 피투 된 우리는 이렇게 긴 여정을 겪은 후 현재로 돌아오고 나서야 스스로를 기투하는, 존재론적인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우리는 존재적인 우리로부터 가장 먼 존재인 것이다.




3편에서는 인식에 앞서 존재가 있음에 대해 얘기했다면, 4편에서는 본격적으로 존재자와 존재, 그리고 현-존재의 존재론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와, 그 존재의 의미를 되찾았다.


서양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한 축인 인식론을 넘어서는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증 자체로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거대하고 놀랍지만, 그럼에도 여기에서 끝낸다면 평범한 우리는 역시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같은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글은 여기에서 끝낼 수가 없다. 우리가 현-존재를 회복했고, 그동안 세계의 존재자들을 모두 도구성의 구도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존재자들과 세계를 대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답을 하면서 이번 편을 끝내도록 하겠다. 잿더미가 된 허무의 대지에서 일어난 니체의 초인이,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좋다, 다시 한번!“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하이데거 또한 현-존재가 느껴야 하는 근본 기분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경-탄(Thaumazein, 타우마체인)이다.


우리는 2편에서 존재자의 도구성에 대해 이미 얘기했고, 3편에서 인식에 붙잡히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인식 등을 통해 우리가 가서 붙잡아 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스스로를 드러낸다. 존재는 원래 은폐되어 우리에게서 멀리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했다.


알레테이아는 망각, 혹은 은폐를 뜻하는 레테(Lethe)에 부정 접두사 아(a-)가 붙은 단어다. 한국어로 직역하면 ‘탈망각’, 혹은 ‘탈은폐’ 정도가 된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는 캄캄한 어둠 속에 숨어 있었던 존재가, 어느 순간 갑자기 빛 속으로 걸어 나와 우리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는 사건이다.


3편과 4편에서 이야기했던 열대 과일을 떠올려 보자. 과일의 껍질 속에 숨겨져 있었던 맛과 향(존재)은 우리가 그것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비로소 어둠을 뚫고 탈은폐되어 우리에게 도착한다. 이것이 알레테이아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어떤가? 지구와 태양은 46억 년 전부터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은 불과 수백 년 전에 우리 앞에 도착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와 일단의 과학자들에 의하면 화이트홀은 시간이 역전된 블랙홀이라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시간이 역전된 우주라는 엄청난 존재 특성을 가진 존재자의 존재가 탈은폐되는 순간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놀라움 앞에 우리는 대체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하는가? 유한한 현-존재인 우리 앞에 거대한 존재가 일어설 때, 그 기적 같은 사건 앞에서 현-존재가 느끼는 근본 기분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경-탄이라고 한다.


2019년 최초로 촬영된 M87 성단의 블랙홀. 블랙홀의 모습은 2019년 에서야 우리에게 탈은폐되어 도착했다. NASA 제공.




눈앞에 산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저 산의 이름은 OO산이고, 20개의 등산 코스가 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는 OO봉으로 해발 250m이고, 주요 식생은 참나무와 소나무이며, 다람쥐, 청설모, 뱀, 개구리등이 산다. 우리는, 혹은 세인은 평소에 산을 이렇게 대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그렇지 않다. 저 산은 1억 5천만 년 전, 쥐라기와 백악기 사이에 한반도 주변의 지각판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끓어 오른 마그마로부터 시작되었다.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분출되지 못하고 땅속 깊은 곳에서 식어 화강암이 되었는데, 신생대에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동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솟아올랐다. 100년도 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우리와 달리, 저 산은 수천만 년 전부터 수억 년 전에 만들어져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게 끝인가? 아니다. 저 산을 구성하는 화강암은 산소, 규소, 알루미늄, 철, 마그네슘 등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태양은 헬륨보다 무거운 원자들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무거운 원자들은 별들에서 만들어졌다. 태양계 바깥의, 태양보다 훨씬 거대한 어떤 별 속에서 핵융합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수백억 년을 우주를 떠돌다 태양의 중력에 끌려 지구에 내려앉았다. 저 산은 우주에서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평소에 대하는 과학적, 혹은 비본래적 존재자로서의 산이 얼마나 순진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다. 존재자로서의 산은 그야말로 경-탄의 대상이다. 그 자체로 기적인 것이다.


산만 그러한가? 바다는 어떠한가? 바람은? 생명은? 계절은? 예술은? 사랑은? 어떤가, 놀랍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이러한 개별 존재자들의 숨 막히는 경이를 깨닫는 것, 본래적 실존으로서 대상(산)을 또 다른 존재자로서 경험하는 것, 이것이 고대 그리스인들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타우마체인이고,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알레테이아의 순간이며, 우리가 단독적 실존을 깨닫는 순간인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회사에 가고, 일을 하고 돌아와 맥주 한잔을 따고 TV앞에서 잠드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점심 먹고 나선 산책길에 새로 핀 꽃의 존재를 발견하고 경이를 느끼는 순간,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 오리가 자맥질을 하는 것을 보며 감탄하는 순간, 집 짓는 까치를 보며 저 까치는 대체 언제부터 집 짓는 법을 알고 있었을까? 하고 스스로 물어보는 순간, 이러한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경-탄의 순간은 형이상학적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가 각각 모두 기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모든 순간이 바로 하이데거의 경-탄의 순간인 것이다.




4편이 끝났다. 1편부터 3편까지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운동이었다면, 4편은 본격적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겉핥기 한 본운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딴에는 어떻게든 최대한 쉽게 하이데거를 설명해보려 했는데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이데거는 너무 깊어서 쉽게 풀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이제 하이데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5편이 남았다. 5편에서는 우리는 하이데거 철학의 종착지이자 존재가 열리는 궁극의 지평인 시간(Zeit)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주저 제목이 왜 <존재와 시간>인지 이해해 볼 것이다. 그리고 <존재와 시간>이 어째서 미완으로 남았는지도. 이제 이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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