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지평으로서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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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편에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타자의 욕망을 쫓으며 사회적 평균성에 갇혀 살아가는 세인(Das Man)들의 비본래적 삶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도 이반 일리치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어 2편에서는 우리를 세인의 삶으로 몰아넣은 범인이 다름 아닌 근대의 계산적 사유였음을 확인했다. 이성은 인류에게 과학과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지배할 힘을 주었지만, 그 대가로 모든 사물과 모든 인간을, 심지어 우리 자신마저 도구로 전락시키는 존재 망각의 시대를 도래하게 했음을 알았다.
3편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존재를 구출하기 위해 칸트가 쌓아 올린 견고한 인식론의 성벽을 넘었다. 우리는 인식 바깥에 11차원의 다중우주가 인식에 앞서 이미 존재함을 깨달았고, 존재가 인식에 앞서 있다는 하이데거의 아포리즘을 이해했다.
그리고 4편에서 우리는 드디어 존재를 만났다. 은폐되어 있던 존재가 빛 속으로 걸어와 스스로를 드러내는 탈은폐, 알레테이아(Aletheia)가 무엇인지 알았다. 등산로나 목재를 품은 도구로서 대하던 산이 1억 5천만 년의 마그마와 수백억 년 전 별의 잔해를 품은 기적으로 탈은폐하는 것을 목도하고, 경-탄(Thaumazein)을 경험했다.
정말 긴 여정이었다. 우리는 현존재로서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물었고, 마침내 알레테이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알았다. 하지만 아직 중요하고 근원적인 질문이 하나 더 남아 있다. ‘무엇이 존재를 가능케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앞서 우리는 모든 존재자는 끊임없는 되어감 속에 있다는 문장을 이해했다. 열대 과일은 썩어 없어질 것이며, 우리는 늙어갈 것이다. 존재자는 언제나 새로운 존재 사실(있다)과 존재 특성(이다)을 잃고, 또 얻는다. 그렇다면 수많은 존재자들의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자신을 그때마다 탈은폐하도록 만들어 주는 근원적인 무대, 모든 존재가 피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이 바로 이 하이데거 시리즈의 종착지이자, 하이데거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 제목에 들어 있는 시간(Zeit)이다. 우리는 이번 편에서 하이데거가 왜 주저의 제목을 <존재와 인식>이나 <존재와 진리>가 아닌, <존재와 시간>으로 지었는지 이해해 볼 것이다.
당신은 평소 몇 시에 일어나는가? 나는 별 일이 없으면 일곱 시 반쯤 기상한다. 씻고 영어 공부를 잠깐 하고 출근을 하면 보통 8시 45분 남짓이다. 따뜻한 커피를 사서 텀블러에 담아 오고, 오전 업무를 하다 보면 12시 점심시간이 된다.
이러한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 우리가 늘 경험하는 평범한 시간을 가리켜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시간‘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개 시간은 지속적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고 우리가 그 시간 위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하루는 낮과 밤으로 반복되며 우리에게 확인되고, 일 년은 계절로 반복되며 우리에게 확인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간이 흘러왔듯 앞으로도 흘러갈 것이라고 기대하며 미래의 계획을 세운다. 나는 내일 오후에 독서클럽 멤버의 결혼식에 참석할 것이고, 다음 달에 코타키나발루로 휴가를 갈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흐르는 시간이 지구뿐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경험하는 오늘의, 내일의, 내년 혹은 수백 년 후나 수천 년 전의 시간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주어져 있었을까?
아마도 처음에 원시 인류는 태양이라는 천체를 도구삼아 해 뜰 녘, 낮, 해 질 녘, 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나누었을 것이다. 문명이 발전한 후에는 시계를 발명해서 하루를 24시간, 1시간은 60분, 다시 1분은 60초, 이런 식으로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낮과 밤이 365번 바뀌면 모든 계절이 한 바퀴를 돈다는 것을 발견하고 1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이는 우연이다. 우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하루는 지구가 적도 기준으로 시속 약 1,670km/h의 속도로 회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반복된다고 생각하는 일 년은 지구가 108,000km/h의 속도 (1초에 30km를 비행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지금과 다르다면 하루와 일 년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수억 년 전 공룡이 살던 시대에는 하루가 23시간이 채 되지 않았고, 1년은 372일이나 되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 시간은 시간은 태양과 지구가 처한 우연한 조건 때문에 발생한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오히려 시간은 본질적으로는 허구인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계적인 공공의 시간은 그저 공동존재인 우리 인류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도구로 발명해 낸 것에 불과하다. (예상했겠지만 이를 만들어 낸 것 역시 근대의 계산적 이성이다) 본래적 시간은 이렇게 모두에게 균일하게 쪼개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설명하는 본래적 시간은 어떠한 것일까?
철학에서 '지평'이라는 개념은 대개 한계를 의미한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지평선 너머로도 땅이 펼쳐져 있고, 수평선 너머로도 바다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는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다. 지구에 비해 나는 너무 작고, 우리가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눈치채기엔 지구는 너무 크다. 그리하여 내가 볼 수 있는(내가 알 수 있는) 세계는 지평선 안쪽으로 한정된다. 이 것이 지평의 개념이다. (그래서 에바 TV판 마지막 편에서 신지는 지평선이 보이는 작은 지구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다른 학문에서도 자주 가져다 쓰곤 하는데, 예를 들어 물리학에는 '우주지평'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 정도 되었는데, 이는 지구로부터 가장 먼 천체에서 출발하여 지금 지구에 닿은 빛이 138억 년 전에 출발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므로 계산해 보면 그 천체는 지구로부터 410억 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리라 추측된다. 그렇다면 그보다 먼 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직 그곳에서 출발한 빛이 지구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410억 광년 안쪽의 우주로 한정된다. 그래서 지구를 중심으로 한 이 반지름 410억 광년짜리 구(球)를 우주지평이라 한다.
하이데거는 시간은 존재의 지평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존재란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존재자로서의 존재특성 전체이다. 하지만 그 존재 사실, 그것이 있다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나의 탄생으로부터 나의 죽음까지 존재한다. 지구는 46억 년 전 탄생 시점부터, 50억 년 후 적색거성이 된 태양에게 흡수 소멸할 때까지 존재한다. 시간을 초월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스케일을 더 확대해도 마찬가지다. 우주 전체조차 빅뱅의 순간부터 바른틀앙상블(우주의 열역학적 죽음)의 순간 사이에 존재한다.
하지만 현존재는, 즉 우리는 시간을 순수지속으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모두 동시에 경험하는 순수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부산발 수서행 SRT기차 발차 1시간 10분을 남겨 놓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수서행 321번 기차 티켓을 구입한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12시 40분을 신경 쓰고 있다. 나의 시간은 12시 40분 이전과 그 이후로 분절된다. 이전의 나는 SRT 출발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이후의 나는 수서역 도착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존재인 우리는 이미 분절되어 있는 절대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상대적인 시간을 산다. 즉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내다보고, 그 일이 현재가 될 때까지 시간이 폭(spanne)을 갖는 방식으로 각자, 그러니까 현-존재로서 우리는 스스로 주어진 시간을 분절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하이데거는 예기하면서-보유하는 현전화적 이해라고 말한다.
현존재는 이렇게 일상 속에서 이미 시간을 주체적으로 분절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평범한 세인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와 동시에 시계와 달력이 만들어 내는 공공의 시간 역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세인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덧 없이 흘러가는 기계적 흐름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알아서 도착한다. 세인에게 있어서 미래의 본질은 기대(Gewärtigen)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승진을 했으면 좋겠다, 내가 보유한 아파트 가격이 올랐으면 좋겠다, 이러한 것들이다. 적극적으로 미래를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잡담, 호기심, 애매성에 빠져(이것은 하이데거의 표현이다) 현재를 계속 연장하는 것뿐이다. 알람 소리를 듣고 아침에 깨어, 출근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만원 지하철 안에 몸을 밀어 넣고, 배가 고프지만 시계가 점심을 먹으러 가도 된다고 허락하기까지(시계가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기까지) 배고픔을 인내해 내야 하는 것이 시계와 달력 속에 갇힌 세인의 비본래적 시간이다.
그렇다면 본래적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아마 다들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2005년 스티브 잡스가 남긴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명연설 말이다. 이 연설에서 탄생한 가장 유명한 아포리즘은 아마 “Stay hungry, stay foolish"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마음에 와닿은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저는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합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나는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 라는 답이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저에게는 매우 중요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왜냐고요?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누군가의 기대,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심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과 직면하면 모두 사라지고,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이 연설이야 말로 하이데거의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연설이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끝, 거대한 허무와 마주했을 때 인간은 자신의 비본래적 일상의 붕괴를 경험한다. 일상이 붕괴된 자리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과, 자신의 본질과 마주한다. (이반 일리치의 경우도 그랬다) 스티브 잡스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자신의 삶의 도구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직시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한 현존재는 남의 시선에 끌려다니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향해 자신의 삶을 기획하고 미래를 향해 자기 스스로를 내던지게(기투하게)된다. 덧없이 흩어져 있던 나의 현재들이 비로소 나만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주체적인 순간들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시간이다. 결단하여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 자기 삶의 주인이 된 현존재가, 기획한 대로 스스로 분할하여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투하는 방식으로 열어젖히는 존재의 지평,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시간이다. 이 지평으로서의 시간 위에, 그리고 시간 위에서만 존재는 자신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하이데거의 주저 제목이 <존재와 시간>인 이유다.
여기까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사유를 정말 얕게 살펴보았다. 하이데거는 과학이 종교가 되고, 이성이 신의 자리에 올랐던 시대에 경보를 던지려 했다. 인간과 예술과 학문이 모두 자본의 노예가 되고, 생산성과 효율성과 경제성이 아름다움과 사랑과 인간적인 것들을 압도되는 시대가 와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우리에게 인식된 것만이 중요하다는 납작한 근대의 사유를 넘어서서, 세계의 모든 존재자를 오롯이 그대로 경험하며 경-탄하는 삶을 제안했다. (물론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이데거가 경고했던 그 시대가 우리에게 도래해 있음을 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도 하이데거가 읽히는, 혹은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인간의 실존성과 실존적 시간성을 파헤쳐 존재의 의미를 묻겠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이후 수많은 철학사조들의 탄생에 기여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동의 없이 내던져져 있고, 그러한 현사실성이 우리의 실존, 즉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에 지배적 영향을 준다면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생각은 사르트르, 카뮈 등으로 이어지는 실존주의가 되었다.
우리가 영원한 되어감 속에 있고, 고정할 수 있는 존재자나 존재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생각은 근대적 사유를 끝내고 현대 철학을 열어젖힌,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등으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되었다.
우리의 인식이 오롯이 우리를 구성하지 못하고 이미 우리는 현사실성 속에서 살고 있으며, 계산적 사유가 이미 분절하고 해석해 놓은 세상으로 태어나는 공동 존재일 뿐, 우리가 이성만으로 홀로 설 수 없다면 우리는 대체 누구인가? 이 생각은 자크 라캉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이 되었다.
칸트 이후의 철학들이 모두 칸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하이데거 이후의 철학은 전부 하이데거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철학의 역사에 손꼽히는 걸작, <존재와 시간>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하이데거는 이 책을 2권으로 기획했지만 결과적으로는 1권만 출판했고, 2권은 끝끝내 집필하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목표는 실은 존재 일반의 개념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존재 일반, 조금 어려운 개념이지만 여기까지 따라온 분이라면 이 내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설명하면 OO 일반이라는 것은 OO 개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개별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어떠한 공통 특성, 혹은 본질에 가까운 무엇이다. 예를 들어 학교 일반은 학생과 선생이 모여 교육이 이뤄지는 어떤 공간이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가 선택한 전략은 이러하다. 먼저 1, 2편에서 보았듯 우리가 이미 존재를 잃어버린 세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3편과 4편에서 보았듯 현존재에 대한 존재 질문, 즉 '존재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출발해서 탈은폐(Aletheia)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는 존재가 인식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런데 <존재와 시간>은 바로 이다음 대목, 우리가 오늘 본 5편, 현존재의 시간성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영원히 멈추어 버렸다.
하이데거는 왜 자신이 쌓아 올린 성벽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을까?
그것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집필하며 이 책의 치명적인 모순점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4편과 5편에서 우리는 영원한 되어감 속에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는 매 순간 변화한다. 열대 과일은 썩고, 우리는 늙으며, 우주는 열평형 상태의 죽음을 맞이한다. 모든 것이 모두 변화한다면 모든 존재자나 모든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근본 속성, 즉 존재 일반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쓰면서 깨달은 것이다.
또한 현존재에 대한 존재 질문을 통해 현존재가 죽음을 선구하고 결단하여 존재의 의미를 파헤치는 그 치열한 태도 역시 결국 인간의 이성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중심주의(혹은 계산적 사유)의 연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이데거가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인식을 이용해 존재 일반의 신비를 포섭해 보려는 모던적 시도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을 쓴 이후 하이데거는 생각을 바꾼다. 만년의 하이데거는 진리를 파헤치고 분석하려는 태도 자체에 거리를 두려 한다. 후기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계산하는 주체가 아니다. 우주, 자연, 세계의 온갖 사물들은 인간이 닦달하지 않아도 스스로 탈은폐할 것이며, 인간은 그저 조용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후기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하이데거는 존재가 스스로 열어젖히는 진리의 공간에 우리 스스로를 묵묵히 내맡기고 그 기적 앞에서 그저 경-탄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후기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삶의 태도다. 지금껏 해온 전기 하이데거와는 좀 다른 얘기지만 이 이야기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른 시리즈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정말 이 긴 텍스트를 다 읽어냈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비본래적 삶과 실존, 그리고 시간에 사로 잡혀 있음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본래석 삶과 실존, 그리고 이번 편에서 알게 된 본래적 시간을 회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노파심에서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면 (비슷한 얘기를 앞서하기도 했지만)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과 비본래적 실존, 세인들의 비본래적 시간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다. 일상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치는 경-탄의 순간에 비본래적 결정으로 그 순간을 매몰시키지 말라는 얘기를 하이데거는 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건네는 조언은 이러하다. 건강을 위해 러닝을 하다가도,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에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시간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퇴근 후 남편과 치킨을 먹으며 야구 경기를 보다가 갑자기 행복감이 솟아오르면, 아끼지 말고 사랑한다고 그 마음을 전해보라는 것이다. 누군가 철학과 과학을 재밌게 읽고 있다고 말하면 그거 읽으면 돈이 나와 쌀이 나와? 이렇게 묻지 말고 그게 왜 재밌냐고 물어보라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비본래적이면서 동시에 본래적이다. 우리는 모두 비본래적 자아와 본래적 자아 사이를 변증법적으로 운동하며 살아가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우리가 되어감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 편으로 기획했던 하이데거 시리즈가 무사히 다섯 편으로 끝났다. 25년 내내 읽었던 하이데거를 이제 떠나보낼 수 있어서 시원섭섭하다.
돌아보면 정말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삶에서 출발해서 양계장과 열대과일, 11차원의 다중우주와 스티브 잡스를 지나 우리는 방금 하이데거의 핵심 사유가 담긴 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만약 이 긴 텍스트를 정말 다 읽은 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 시리즈가 이 문서를 포함하고 있는 내 에세이북 [인문학 비스킷 2]의 마지막 꼭지가 될 것 같다. 언제 세 번째 브런치북을 열게 될지 모르겠지만 써 볼 이야기가 생기면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다.
당신의 삶에도 경-탄이 깃들기를. 긴 글과 긴 시리즈, 그리고 이 책을 마친다.
참고 문헌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21세기 북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읽기>, 박찬국, 세창미디어
<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문예출판사
<철학의 근본 물음>, 마르틴 하이데거 / 한충수, 이학사
<존재와 시간> 서문, 마르틴 하이데거 / 이기상, 까치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 이상원, 니케북스
<예도 TV> 하이데거 단편강좌 재생목록, 존재와 시간 강독 재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