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적 사유와 존재 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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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1)편을 못 보신 분들은 윗 글을 먼저 보고 오세요.
지난 1편에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삶을 통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평균성의 지배 아래에서 세인(Das Man)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비본래적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이데거는 철학사적으로는 니체와 더불어 초기 현대 철학자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이전의 시대는 근대, 그러니까 모던의 시대다. 근대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 데카르트와 칸트를 꼽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는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 주체로서의 이성임을 밝혔고, 칸트는 이 사유를 더욱 발전시켜 이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밝히고, 신의 도움 없이도 우리는 도덕적일 수 있음을 논증했다. 뉴턴으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과 기술 발전은 그 시대가 이성의 시대임을 공고히 해주었다. 그 시대는, 근대는 이를테면 이성이 모두를 구원하리라 믿었던 시대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이성의 시대에 질문을 던진 철학자다. 정말 이성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이제 신이 죽은 시대에 신의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 거대담론이 된 이성은 정말 우리를 본래적 인간으로 만들어 줄 것인가?
1편에서 우리가 어떻게 비본래적 인간으로 살아가는지 살펴보았다면, 2편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비본래적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가는 세인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 이성이다. 근대의 시대에 우리를 구원하리라 믿었던 그 이성은 우리를 구원하기는커녕 퇴락시켜 비본래적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하이데거의 사유를 따라가 보자. 이번 이야기는 광산과 양계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광산에서 이번 겨울에 쓸 석탄을 캐고 있다. 그런데 석탄과 자갈 사이에서 갑자기 반짝거리는 것이 보인다. 곡괭이를 몇 번 더 내려쳤더니 황금빛을 내는 금속 덩어리가 나타난다. 금이다. 당신은 금맥을 발견해 낸 것이다. 당신은 뜻밖의 횡재에 곡괭이를 내던지고 환호한다.
그런데 당신은 방금 왜 환호했는가? 왜 기뻐했는가? 대답하기 민망할 정도로 당연한 질문이다. 황금은 비싼 금속이고, 당신은 이제 곧 부자가 될 테니까 기뻐한 것 아니겠는가?
이 당연한 장면에서 하이데거는 혀를 찬다. 비싸다는 것은 황금이 스스로 가진 속성인가? 아닐 것이다. 금은 금이 드물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비싸다. 즉 우리는 황금을 대상 그 자체로 대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에게 우리와 황금은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욕구와 욕구 충족의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욕구로서의 주체와 욕구 충족 수단으로써의 대상의 구도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닭은 어떠한가? 우리에게 닭은 자연 상태 그대로의 닭이 아니다. 닭은 우리에게 달걀이나 치킨으로서, 즉 음식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먹히는 것이 닭의 속성, 즉 본질인가? 적어도 여기에 닭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이데거의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닭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에게 닭은 좁은 양계장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모이를 먹고 끊임없이 달걀을 낳다 닭고기가 되기 직전에만 빛을 보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제 비로소 하이데거의 의도가 이해가 될 것이다. 그렇다. 인간과 관계된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본래적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관계된 모든 사물들은 인간에 의해 용도가 정해진다.
닭과 소와 양을 고기와 가죽과 털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자원으로 대하는 인간은, 산을 광석을 제공하는 자원으로 대하고, 나무와 숲을 공기를 정화하고 산소를 공급하는 자원으로 대하며, 바다는 휴가철에 우리에게 휴식을 선사하는 자원으로 대한다. 심지어 이 구도는 끝나지 않는다. 요구의 연결은 무한하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쓴다.
대지는 광석을, 광석은 우라늄을, 우라늄은 원자력을 내놓도록 강요당한다.
기뻐해도 좋다. 우리는 방금 하이데거가 직접 쓴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사물의 조건과 근거를 따져 묻고 대상을 통제하려 드는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사유 방식을 가리켜 계산적 사유라고 부른다. 계산적 사유는 당연히 근대 이성의 산물이다. 인간은 계산적 사유를 함으로써 사물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물들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상실하고, 도구로 규정된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비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광석과 우라늄, 닭과 돼지에게서 고유한 존재를 빼앗아버린 인간의 계산적 사유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향해 칼끝을 돌리기 때문이다.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이번 가을 공채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당신의 부서로 배정됐다. 부서장인 당신은 신입사원의 빠른 부서 적응을 위해 김대리에게 멘토링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팀의 막내 역할을 해온 박주임의 업무를 신입사원에게 넘기고, 박주임에게 지금껏 구상해 온, 그러나 사람이 없어 시작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업을 맡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회사 생활을 하며 만나는 수많은 순간에 대해, 하이데거는 다시 욕망과 욕망의 해소 수단 구도를 가져다 댄다. 방금 당신은 신입사원을, 김대리를, 박주임을 본래적 존재로 대했는가?
아니다. 당신은 방금 그들을 당신의 욕구 해소 도구로 대한 것이다. 당신은 부서 전체의 생산성을 올려 그것을 성과로 연결시키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다음 분기에 더 높은 고과를 얻고 싶은 당신의 욕구의 해소 수단으로써 멤버들을 대한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그뿐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인간관계를 이러한 방식으로 이용한다. 기업은 사원을 채용할 때 지원자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조건들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평가한다. 배우자를 고를 때 상대의 경제 능력이나 외적인 조건들을 따지곤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관계뿐만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는 가족도 이러한 방식으로 대할 때가 있다. 어떤 엄마는 아들을 자기실현 수단으로 대하고, 어떤 아들은 아버지를 자기 사업 빚을 갚아줄 수단으로써 대한다.
근대의 자랑스러운 발명품인 이 계산적 사유는 이렇게 인간관계마저 해체해 버린다. 원래 사회가 그렇지 뭐, 이런 것까지 비판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면, 하이데거의 마지막 비판을 더 들어보자. 당신의 오늘 하루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아침 지옥철을 견디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오전엔 이메일에 답장을 하고 오후에는 두 개의 미팅을 진행했다. 요즘 체중이 좀 는 것 같아 점심으로 테이크아웃 샐러드를 먹었더니 저녁나절에 좀 출출하다. 야근을 한 시간 정도하고 퇴근하는 길에 컵라면과 편의점 도시락을 샀다. 집에 와서 TV를 켜니 예능 프로그램 재방송이 나온다. 맥주 한 캔을 홀짝거리며 TV를 보다 당신은 잠이 들 것이다.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은 왜 이러한 방식으로 사는가? 왜냐니 돈을 벌기 위해서 회사 다니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질문을 바꿔 이렇게 물어보자.
당신은 당신을 본래적 존재로 대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면 당신은 방금 하이데거가 말한 경악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렇다. 산과 광석과 우라늄, 닭과 돼지와 양, 신입사원과 박주임만 도구인 것이 아니다. 당신은 실은 지금까지 늘 당신 자신을 도구로 대하고 있었다. 당신에게 당신은 본래적 존재가 아니다. 실은 당신에겐 당신이라는 대상마저도 당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는 본래적 존재가 아니다. 평범한 세인인 우리는 승진, 더 높은 연봉과 같은 우리의 세속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부품으로 대한다. 스스로를 갈아 넣어 성과를 내고, 테이크아웃 샐러드로 건강을 관리하며 효율적 노동 기계로서 스스로를 유지한다. 이 모든 선택은 우리의 이성에 의해, 우리 스스로의 합리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성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근대의 믿음은 이제 이 지점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이성은 우리를 주체로 만들기는커녕 세상 모든 것을 도구로 전락시킨 것도 모자라 우리 자신마저 도구적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가 1편에서 보았던 이반 일리치의 삶, 퇴락하여 세인이 되는 삶을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성인 것이다. 우리는 다름 아닌 이성에 의해 본래적 존재를 잃어버렸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 망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존재를 망각한 우리는 퇴락하여 세인으로만, 비본래적 존재로만 남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망각된 존재를 회복해 낼 수는 없는 것인가?
하이데거의 대답은 놀라운데, 이러한 질문 자체가 존재 회복의 조건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하이데거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과 침팬지가 진화의 여정에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은 대략 6백만 년 전이다. 문명은 대략 5천 년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를 하루로 압축해 보면 인간의 삶 24시간 중 문명의 역사는 1분에 불과하다. 즉 인간은 23시간 59분을 동물로 살았다. 인간은 역사의 대부분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싸우고 죽이고 짝짓기 하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도 인간의 기본 욕구가 식욕이나 성욕이라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꾀하고 번식을 도모하는 방식은 동물과 매우 다르다.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파인 다이닝을 즐기고, 기껏해야 영역 싸움이 전부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타국의 도시에 핵폭탄을 떨어뜨린다.
하이데거는 인간과 동물의 이 결정적 차이가, 동물의 욕망은 오직 '현재와 여기'에만 묶여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동물은 내일 잡을 사냥감에 대해 생각하거나, 어제 잃은 자신의 영역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지렁이의 세계는 시궁창을 넘어서지 않는다. 동물은 자신이 속하지 않은 과거나 미래, 다른 공간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현재와 여기에 묶여 있는 동물은 그래서 고독감이나 무력감, 허무함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은 어제 먹지 못한 먹이를 아쉬워하거나, 미래에 실패할 사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은 욕구를 채우는 '도구적 존재'로서의 자신 이상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먹을 만찬과 작년에 누락된 자신의 진급에 대해 생각한다. 가보지 않은 지구의 반대편은 물론이고 우리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우리 우주 바깥의 공간과 그 너머의 우주를 생각한다. 인간이 자살하는 이유는 식욕이나 성욕이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자살을 하는 이유는 고독감, 허무감, 무력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도구 이상의 무엇이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이다.
당신은 태어날 때 누군가에게 선택지를 받았는가? 태어날래, 안 태어날래? 이렇게 말이다. 터무니없는 질문이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아무도 동의를 받고 태어나지 않았다. 세계는 이미 우리에게 도착해 있었고,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세상에 동의도 없이 태어나 버린(내던져진) 것이다. 죽을 때도 마찬가지다. 악한 일을 해서 죽는 것도 아니요, 경쟁에 패배해서 죽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죽는 데엔 아무런 이유나 맥락이 없다.
동의 없이 태어나 이유 없이 죽는 존재인 인간은, 도구로 전락한 자신의 삶 속에서 고독과 무력감을 느끼며 필연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세계가 있어서 우리는 이 세계 안에 내던져져 있는가? 나는 왜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고, 짜장면 대신 샐러드를 먹어야 하고, 단지 한 캔의 맥주만을 나에게 허락해야 하는가?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이며,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 철학의 출발점이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 하고 묻는 존재다.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존재다. 인간은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단순한 도구로 여기기를 거부하고, 잃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묻고 또 그렇게 묻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자. 하이데거는 이 존재를 가리켜 '현-존재(現-存在, Dasein)'라고 부른다.
여기까지가 내가 2편에서 준비한 내용이다. 우리는 1편에서 이반 일리치를 통해 퇴락하여 세인이 되는 삶에 대해 살펴보았고, 2편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본래적 존재를 망각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이성임을 알았다. 그리고 망각한 존재를 회복하는 출발점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 나의 존재를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인 현-존재임을 알았다.
비로소 우리는 존재를 향한 여정의 출발점에 섰다. 동물과는 달리 고독과 허무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묻는 현존재인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존재를 잃어버렸다면 대체 그 존재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드디어 우리는 3편에서 존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 있다. 우리 내면에 현상계(現象界, phenomenon)라는 철벽을 쌓은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다. 이 철벽을 넘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존재에게 닿을 수 없다. 그래서 3편의 제목은 <칸트를 넘어서 존재로>가 될 것이다.
칸트는 정말 놀라운 철학자다. 칸트의 구도를 이해하고 나면 세상 모든 것을 칸트의 구도에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구도에 놓아진다. 여전히 뉴턴 물리학으로 행성의 궤도를 계산할 수 있고, 로켓을 쏘아 올릴 수 있는 것처럼. 광속에 가까운 속도나, 플랑크 공간처럼 매우 작은 양자역학적 공간을 상정하지 않으면 뉴턴 물리학이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뉴턴 물리학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빅뱅의 순간이나 블랙홀 같은 공간에서 뉴턴 물리학은 붕괴한다. 더 이상 뉴턴 물리학으로 현상을 해석할 수 없게 된다. 마찬가지다. 칸트 조차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탈이성의 시대인 현대에 와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가져와 근대의 철학인 칸트를 붕괴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3편에서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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