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와 토리노의 말
https://youtu.be/HVwLmJCXnqg?si=5nB53yH9iuGziYjX
아모르파티(Amor Fati)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 있을 것이다. 대개는 어느 유명 여가수의 댄스곡 제목으로 말이다. 이런 가사를 가지고 있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이제는 더 이상 슬픔이여 안녕
왔다 갈 한 번의 인생아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
눈물은 이별의 거품일 뿐이야
다가올 사랑은 두렵지 않아
“인생을 사랑하라”는 말은 어떻게 들리는가?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는 대목에서 느낄 수 있듯, 당신은 이미 옳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당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라,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보통 이런 힐링 테이스트 금언들이 생각 날 것이다. 아마 이 노래의 작사가도, 그리고 이 유명 여가수도 그렇게 이해하며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니체의 아모르파티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세요, 따위의 힐링 메시지가 아니다. 아모르파티는 오히려 무섭고 처절한 것이다. 무섭고 처절하다니, 니체가 말하는 인생은 어떻길래 대개는 인생에 붙지 않는 수식어들이 붙어있는 걸까?
칸트는 완벽한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을 정언명령이라고 하는데, 칸트가 쓴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좀 어렵다. 정언명령을 칸트의 언어로 그대로 쓰면 다음과 같다. “네 의지의 격률이 늘 보편적 입법의 준칙이 되도록 행동하라” 이 문장을 쉽게 풀어쓰면 이런 뜻이다.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라. 그 행동을 법률화해도 좋은가?"
예를 들어 보겠다. 길거리에 쓰레기가 있다. 두 가지 선택이 있다. 쓰레기가 있으니 내가 가진 쓰레기를 거기에 함께 놓겠다. 혹은 쓰레기가 있으면 줍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칸트는 행동하기 전에 법률화를 가정해 보라고 하는 것이다. A국가에는 "쓰레기가 있으면 내가 가진 쓰레기를 거기에 함께 놓는다"는 법률이 있다. 이 국가의 길거리는 쓰레기장이 될 것이다. 모두가 쓰레기를 버리기만 하고 아무도 주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B국가의 길거리엔 쓰레기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B국가에는 "쓰레기가 있으면 줍는다"는 법률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쓰레기를 함께 버리는 것과 쓰레기를 줍는 것, 둘 중 어느 것이 도덕적인 행동인지 알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길거리에 쓰레기가 하나도 없는 국가는 과연 올바른 국가인가? 라는 질문을 한번 더 하는 미셸 푸코의 관점이 가능하고, 나는 이 관점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이 글의 범위는 아니니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해보겠다)
여하튼 칸트는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를 가정하지 않고도, 그 행위 자체가 늘 선(善)할 수밖에 없는 행동의 절대 원칙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바로 “당신의 인생, 바로 그 인생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말은 정언명령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아모르파티는 "태어났으니 즐겨라" 같은 말이 아니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당신의 행동을 늘 도덕적일 수밖에 만드는 것처럼, 아모르파티는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니체는 필사적으로, 죽을힘을 다해서, 그것이 아니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영혼과 생명을 바쳐 당신의 인생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혼신의 힘을 다해 처절한 싸움을 경주하라고 말한다. 아모르파티는 자유를 선고받은 인간에게, 축복의 모습을 했을 뿐 형벌처럼 주어진 자유를 누리라는 실존주의적 명령에 가깝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영혼과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인생이 있는가? 그냥 순간순간 즐기면서 대충 살면 되는 게 인생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인생이란 대체 어떤 인생인가?
그래서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으로 이 질문으로 귀결된다. 대체 "사랑할만한 인생이란 어떤 인생인가?"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당신의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는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었던 그 사람이 되어 있는가?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내 기대보다는 덜 성공한 것 같기도 하고, 이 정도면 괜찮은 인생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가?
니체는 정신 차리지 않으면 당신이 당신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에 의해 당신이 살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것들에 의해 살아지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여러분이 고등학교 시절에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업을 얻길 원했던 것은 실은 누구였는가? 당신 부모님이었는가, 당신이었는가? 당신이 그 전공을, 그 직업을 가진 것은 누가 권해서였는가?
당신이 만약 '안정적인 직장'이어서 공무원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공무를 수행하는 업'을 원해서인가,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직장'을 원해서인가? 만약 후자라면 당신의 직업을 결정한 것은 당신인가, 사회인가?
당신에게 혹시 배우자 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님이나 집안의 반대, 종교나 계급의 차이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면 당신의 인생의 반려를 결정한 사람은 당신인가, 다른 것인가?
그렇게 우리의 삶을 온전히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삶을 소유하고 영위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타자를 받아들여 주체가 된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언젠가 해보겠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것들에 의해 살아지는 삶'을 살아가는 도중에도 적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있다.
버킷 리스트를 써 본 적이 있는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 말이다. 만약 있다면 그 리스트를 꺼내고, 없다면 한번 리스트를 적어보자. (적어본 적이 없는 이들은 일단 적어본 후 이 이후를 읽기를 권한다. 참고로 내 버킷리스트 항목 중에는 '눈 오는 유후인 노천탕에 앉아 아들과 함께 뜨거운 술 마시기'가 있었고, 지난겨울에 이 항목을 달성했다)
리스트를 꺼내거나 다 적었다면 이제 각 목록의 오른편에 항목을 클리어했는지, 하지 못했는지 O과 X로 표시해 보자. 목록을 새로 썼다면 아마 전부 X 표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다 했다면, 이제 매 항목별로 왜 그 항목을 달성하지 못했는지 적어보자. 참고로 '돈을 벌어야 해서'와 '시간이 없어서'는 모두 '돈'으로 적어 놓으면 된다. (시간은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돈'이라고 쓰인 항목은 모두 몇 개인가?
우리는 부모님에 의해 살아질 수는 있다. 부모님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형제나 친구에 의해 살아지거나, 배우자에 의해, 혹은 계급이나 종교에 의해 살아질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고, 사회적 관계에는 늘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돈은 그렇지 않다. 돈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다. '돈이 당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에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돈이 사회적 계급을, 성공의 정도를, 존중이나 존경을 받아야 하는 어떤 척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에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의 가치는 내가 정한다. 내 삶은 당연히 돈 보다 가치 있다. 그러니 최소한 '돈에 의해 내 삶이 살아지게'해서는 안된다. 내가 온전히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돈이 내 삶의 주인이게 해서는 안된다.
여기까지만 깨달았고, 실제로 삶에 옮길 수만 있다고 해도, 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아모르파티의 대부분을 깨달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주변에 한 명쯤은 있는, 보헤미안을 닮은 누군가가 생각났을 수도 있다. 세상의 규칙에 별 관심이 없고, 세상의 평가에 초연하며, 늘 자신이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찾아 떠나는. 사회가 말하는 속물적인 기준에서는 성공과 멀지만, 어떤지 마음 한 구석에서 다들 동경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그 친구.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만의 진리를 추구하는 그 친구.
니체는 그렇게 살라고 한 것일까?
니체가 말한 삶이 그것뿐이었다면, 그가 죽은 지 120년이 넘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읽고 있을 리가 없다. 니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니체는 이렇게까지 묻는다.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은 진리인가?" 아니 뭐라고?
아니,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진리냐고? 니체는 심지어 그 보헤미안에게도 묻고 있는 것이다. 네가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정말 세상의 기준을 벗어나는 것이냐고 말이다.
보헤미안의 인생조차 니체가 보기엔 무언가에 의해 살아지는 삶이다. 니체가 말하는 삶이란 이 정도로 치열하다. 아모르파티는 전쟁과 같다.
니체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진다. 니체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도덕적인가?", 하고 묻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금언은 민주적인가?" 하고 묻는다. "애국심을 갖는 것은 애국적인가?", "평등을 추구한다는 목표는 평등한가?" 니체는 계속해서 이렇게 묻는다. 질문 하나하나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고, 우리는 정말 아무런 고민 없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는 걸 깨닫는다.
이쯤 되면, "사랑할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그리 간단치 않은 질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 삶이 얼마나 순진했는지, 가벼웠는지, 얼마나 굴러가는 대로 굴러왔는지 깨닫게 된다.
1889년 1월 3일, 니체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거리로 산책을 나선다. 비가 온 후 갠 날씨였던지 길바닥은 온통 진흙투성이였는데, 니체는 진창에 빠진 채 누워서 허우적거리는 말을 발견한다. 마부는 화가 났는지 일어서지 못하는 말을 향해 계속해서 채찍을 내려치고 있었다. 말은 채찍을 얹어 맞을 때마다 히힝거리며 울고, 그때마다 마부는 더욱 화가 나서 말을 때렸지만, 말은 끝끝내 진창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 순간 니체는 갑자기 마차를 향해 뛰어든다. 니체는 말의 목을 끌어 앉고 목을 놓아 울었다. 사람들이 니체를 보고 놀라는 사이, 니체는 정신을 잃는다. 사람들이 니체를 집으로 데려왔지만 니체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니체는 이후 과대망상 증세와 정신발작 증세를 반복하다 정신병원에서 죽는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을까?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 장면을 '인류와의 결별'이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을 껴안고 울부짖은 것은 말에게, 지금까지 말을 비롯한 동물들을 때리고 멸시해 온 인간들을 용서해 달라는 애원이었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쓴다.
내가 사랑하는 니체는 바로 그런 니체다.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하는 테레사는 바로 그런 테레사다. 무릎에 죽어가는 개의 머리를 얹고 쓰다듬는 사람이다. 나는 니체와 테레사가 나란히 선 모습을 그려본다. 이 두 사람은 인류,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주'가 행진하는 길로부터 벗어나 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5분 뚝딱 철학>의 김필영 박사님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 그리고 나는 김필영 박사님의 해석을 좀 더 좋아한다.
아모르파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저 사랑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정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니체는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이러한 비극을 사랑해야만 하는 운명이란 얼마나 더 큰 비극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 니체는 말에게서 자신의 운명을 보았다. 그래서 니체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꺼이꺼이 운 것이다.
여러분의 인생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대부분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는데, 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액션 스릴러가 확실한데, 멀리에서 보면 따뜻한 자연주의 성장물이 아닐까 한다.
니체를 읽거나, 니체에 대해 쓰고 나면 나는 늘 마나님 생각이 난다.
토리노의 말의 삶도 니체의 삶만큼이나 비극적이었고, 아마 채찍을 들었던 마부의 삶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비극적인 삶을 기꺼이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아모르파티라면 나는 혼자서는 내 삶을 사랑해 보겠다고 감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퇴근하면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마나님과 함께 소주를 한잔 기울여야겠다. 오늘도 하루를 버텨내 줘서, 서로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며. 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