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초인은 돈의 죽음 위에서 일어선다
니체,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경구가 있다. 바로 “신은 죽었다”이다. 이 경구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만 실은 이 경구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할까? 신이 죽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런 밑밥을 까는 이유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이 글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읽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밑에 나오니 조금만 따라오시기를. (최대한 쉽게 쓸 테니까 어려울 것 같다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
우선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명품 핸드백과 고급 스포츠카는 좋은 것에는 해당하지만, 선한 것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등장 이전엔 좋음과 나쁨의 구분만 있었다. 예를 들어 노예의 식사는 형편없는(나쁜)것이었고, 노예의 주인의 식사는 훌륭한(좋은) 것이었다. 노예의 굴종과 주인의 지배는 신분의 차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기엔 선과 악의 구분은 없었다. 주인은 진취적으로, 확실성을 갖고, 결단하며, 창조적으로 행동했고, 노예는 겸손하게, 근면하게, 친절하게, 순종하며 행동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등장 이후 이 구분법은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라고 한다. 그 순간 강자의(주인의) 도덕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주인에게 억눌린 원한과 죄의식을 도덕의 본질로 바꾸었다. 즉 그리스도교는 약자(노예)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금욕적이고, 겸손하고, 희생하는 선한 너희들은 천국에 갈 것이고, 진취적이고, 지배적이며, 결단하고, 창조하는 악한 주인은 지옥에 갈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했다. 니체가 보기에 선악은 실존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도입한 개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아가기보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어진 대로, 규정된 대로 살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신의 삶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니체가 보기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19세기 유럽인들은 이렇게 병들어 있었다. 니체는 그들이 빼앗기고 또 빼앗기면서도 자신이 뭔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늘 빼앗기는 삶을 정당화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구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진단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썼다.
특히 그들 중 <복종을 가르치는 자>들이 그렇게 외쳐.
나는 바로 그들의 귓구멍에 대고 이렇게 고함지르고 싶어.
'그래! 내가 바로 신을 안 믿는 차라투스트라야!'
(중략)
너희가 믿는 <복종의 가르침>은 '주어진 것'을 따르라고 하지.
하지만 내가 정확하게 말해 주지. 너희, 안락한 사람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야.
앞으로 너희는 더 많이 빼앗길 거야.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본문에 나와 있는 <복종을 가르치려는 자들>은 그리스도교 그 자체이고, <복종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이다. 니체의 이 본문에서 니체는 진취성, 결단력, 창조력을 ‘빼앗기’ 고도 겸손, 근면, 순종 등 ‘주어진’ 것을 순순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너희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빼앗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라고.
니체는 '좋은 것'을 모두 빼앗기고, 그리고 앞으로도 빼앗길 거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교의 노예들 앞에서, 그래서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너희들에게 노예의 도덕을 속삭였던 그 종교는 사라졌다. 너희들의 것을 주인이 빼앗아 가는 것을 정당화했던 그 교리는 사라졌다. 그러니 이제 스스로 자유로워져라. 너를 규정하고 있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네 인생 앞에 서라. 니체는 억압된 현실 세계를 해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는가?
니체는 우리는 초인(위버멘쉬)이 됨으로써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의 초인은 스스로의 가치관을 창조해 가는 사람이다. (이 지점에서 약간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거 안다. 조금만 더 따라오면 된다. 곧 재밌어진다)
스스로의 가치관을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은 어떤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해 스스로 명확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택시를 탔을 때, 사회적 혹은 정치적 이슈에 대해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기사 아저씨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견과 택시 기사 아저씨의 의견이 달라 불편함을 느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아저씨의 의견은 정말 본인에 가치관에 기인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 의견은 아마도 어느 라디오 프로에 참석한 패널의 것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자신에게 묻지 않고, 대개는 이렇게 타인에게 의존하며 살아간다. (니체는 이 거대한 타인이 그리스도교라고 본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자신에게 묻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했기 때문에 발생한 역사상 최악의 비극을 다룬 작품이 바로 유대인 600만 명 학살의 총책임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아이히만도 인간이었고, 히틀러에게서 최종해결책(유대인의 신체적 전멸)에 대해 들었을 때 강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최말단 서기로서 참석한 최상위 고위층 관료들의 토론회에서 국가를 책임지는 엘리트 관료들 중 단 한 명도 최종해결책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아이히만은 스스로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중에는 아이히만이 생각하기에 충분히 착하고 선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의 통찰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에게 삼켜진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엘리트 관료들의 생각에 스스로 삼켜졌고, 그렇게 자기 자신의 의견, 자신의 생각, 자신 안의 양심의 소리로부터 도망쳤다.
그렇다면 오직 아이히만 누군가에게 삼켜져 있는 걸까?
아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개 누군가에게 삼켜져 있다. 삼킨 주체는 배우자일 수도 있고, 부모나 상사일 수도 있고,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회사, 혹은 지지 정당이나 심지어 인터넷 커뮤니티일 수도 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매우 드물다.
무언가에게 삼켜진 이들은 하나 같이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예를 돌아보면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조차 실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는 "진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이에게 "그것을 왜 묻는가?" 하고 되묻는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태도는 진리가 이미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태도다. 니체는 누군가에게 삼켜지지 않으려고 결사적으로 항전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부단한 태도의 경주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누군가가 한 말을 재생산하지 않고도, 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내 생각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언제, 누구라도 아이히만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치에 부역하지 않을 뿐,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아이히만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평범성'은 이러한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자신의 가치관을 스스로 창조해 낸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마음에 드는가? 자신의 가치관을 창조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이 마음에 와닿는가?
이런 얘기를 읽었다면 보통은 허탈한 기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현실을 돌아보면 나는 오늘도 회사에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며, 나에게 자유가 허락된 시간은 저녁나절 몇 시간뿐이다. 맥주 한잔하고 잠드는 것도 모자란 시간에, 내가 스스로 나의 가치관을 창조한다는 것이 나의 인생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는가? 정말 나는 초인이 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옛 철학자의 또 다른 공허한 선동일뿐이 아닐까?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약자들이 있다. 현대 경쟁사회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이들에게, 바꿔 말하면 “너 자신을 찾으라”는 말과 다름없는 니체의 웅변은, 과나의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 봐> 같은 독백 혹은 조롱이나 불러오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otgbtLj148o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니체의 예언대로 신은 죽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현대에도 위세를 떨치는 세계적 종교지만,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는 현대인은 드물다. 현대인의 삶은 중세나 근대보다 훨씬 세속적이며, 복잡하고, 다양하다. 만약 오늘 니체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면 “누가 죽었다구요?” 정도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니체는 자신이 신을 죽이면, 우리가 모두 초인이 될 줄 알았지만, 니체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다. 신이 죽자 우리는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는 그리스도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배척할 수많은 이교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다. 유일한 이교도였던 공산주의는 스스로 붕괴했다. 이제 현대인 중 자본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 신이 바뀌었다면 이제 노예의 도덕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교 시대엔 겸양, 순종, 검소, 겸손 같은 것들이 노예의 도덕이었다면, 현재의 노예 도덕은 부자에 대한 질투, 부자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거라는 믿음, 못 가진 자에 대한 경멸, 내가 못 가졌음에 대한 불안, 돈 버는 방법에 대한 탐구, 다른 이들이 가진 것과 내가 가진 것을 비교, 같은 것들이다. 니체의 시대에는 주일에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고백했지만, 현대에는 경제적 자유 모임에서 자기 개발서를 읽으며 신앙을 고백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가? 그리스도교 도덕과 자본주의 신앙이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이.
그래서 니체의 초인이 신의 죽음 위에서 일어서듯, 우리 시대의 초인은 돈의 죽음 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돈을 초월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서 늘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초인은 어떻게 일어서는가?
니체는 "진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이에게 "그것을 왜 묻는가?" 하고 되묻는다고 했다. "진리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태도는 이미 진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태도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초인도 질문을 하면서 일어선다. "당신은 돈을 충분히 벌고 있는가?" 하고 묻는 누군가에게 우리 시대의 초인은 "그것을 왜 묻는가?" 하고 되묻는다. "당신은 돈을 충분히 벌고 있는가?"는 질문은 돈이 이미 중요하다가는 것을 전제하든 태도다. 우리는 계속해서 물어야 한다. “나는 왜 돈을 버는가?”, “나는 왜 회사에 가는가?”, “나는 얼마만큼의 돈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그 정도의 돈을 벌면 행복해질 것인가?"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는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에게 한 축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 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학교 졸업생 축사 中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내가 보내는 하루하루가 대답으로 쌓일 것이다. 그 마지막에서 비로소 나를 오래 기다렸던 나를 만나게 되었을 때, 부디 그때 아쉬움이 없기를. 허준이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병원 휠체어에 앉아 나를 오래 기다렸던 나를 만났을 때, 나는 나에게 어떤 말을 들을 것인가? 당신은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즐겁게 지냈었구나. 아쉬움은 없겠다",
"많이 사랑했구나, 좋았겠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었구나, 그들도 고마워할 거다"
같은 말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가?
그럼 이 말은 어떤가?
"돈을 많이 벌었구나, 수고했다"
방금 뭔가 철렁한 느낌이 들었다면, 당신은 초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을 디딘 것이다. 허준이 교수의 졸업식 축사는 매우 니체적이다. 니체 시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교의 노예라는 것을 몰랐듯, 우리는 우리가 돈의 노예라는 것을 잘 모른다. 돈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기에, 돈을 번다는 행위는 호흡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필사적인 것도, 좋은 이직 자리가 없나 알아보는 것도, 이번에 임원이 된 동기를 질투하는 것도, 실은 돈을 번다는 자연스러운 목표가 야기한 것이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노예로 남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추구하는, 돈이 아닌 가치관을 창조해 내는 것으로 초인이 되어야 한다. 돈 보다 중요한 목적(목표 아님 주의)이 인생에 있어야 한다. 니체가 신을 살해했듯, 우리는 돈을 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분들은 물론, 멋진 몸을 갖기 위해 운동을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등산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독서모임에 나오는, 이런 이들은 모두 니체 관점에서는 초인적이다.
니체는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을 (조건부이긴 했으나) 초인의 유형으로 꼽았다.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초인이 등장하는 영상을 링크한다.
https://youtu.be/F4HPOWRmGIg?si=FpyHeWC_sYrTrKk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