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날씨가 좋아서 마나님과 동네 산책을 나왔다.

마나님: 와 날씨 좋다. 나무 냄새 확 나네. 벌써 여름이네. 올해도 덥겠다.
나: 그렇네, 기적이 또 찾아왔네.
마나님: (쓱 쳐다보며) 결국 와인으로 귀결될 기적 타령 하려는 거지?
나: (웃는다)
마나님: 또 들어준다, 해봐.

나: 나무 냄새라는 건 실은 나무에서 증발한 유기화합물이 우리 코 점막에 닿았다는 걸 뇌에게 알리는 전기 신호야.
마나님: 전에 비슷한 얘기 했었지. 빨간색도, 짠맛도 실은 전기 신호라고.
나: 그런데 냄새를 구성하는 유기화합물은 대개는 탄소(C), 산소(O), 수소(H)로 되어 있어.
마나님: 어디서 들어본 말인 것 같은데, 우리 몸도 그런 것들로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 그렇지. 우리 몸도 탄소, 산소, 수소, 질소 같은 것들로 되어 있어. 나무에서 증발한 냄새와, 냄새를 맡은 우리는 실은 같은 물질로 되어 있는 거지.
마나님: 전에 한 얘기랑 비슷한 얘기네.
나: 우주에는 수많은 물질들이 있어. 이 엄청나게 많은 물질들은 실은 모두 같은 물질이야. 냄새를 구성하는 원자와 냄새를 맡는 나를 구성하는 원자는 구별할 수 없어.
마나님: ㅇㅇ (아는 얘기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 이 우주에 있는 수많은 물질 중에, 냄새를 맡는 것이 허락된 물질, 그러니까 우리 인간처럼 의식을 가진 존재는 너무나 적어. 나무 자신조차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지. 저기 있는 담벼락도, 저기 있는 전봇대도 여름을 경험하지 못하는 거지. 물질로 구성된 대부분의 존재들은 한 번도 의식을 가져보지 못하고 이 우주의 끝을 경험하게 될 거야.
마나님: 그렇구나. 의식을 가져볼 기회라... 그런데 우주의 끝?
나: 우주엔 시작과 끝이 있어. 우주의 시작인 빅뱅으로부터 우리는 138억 년이 지난 시간을 살고 있고, 앞으로 200조 년이 지나면 우주는 죽어. 이것 또한 기적이지.
마나님: (계속 듣는다)
나: 우주가 24시간의 목숨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0시 0분 6초에 태어난 셈이야. 우리가 만약 2시 10분에, 15시 30분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의식을 가지지 못했을 수 있어. 고작 75억 년 후에, 그러니까 3초 후에 태양은 적색거성이 되어 지구를 삼킬 예정이거든.
마나님: 와, 그건 좀 설득된다.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불과 몇 초인데 우리는 그 순간에 딱 태어나 살아 있는 거네?

나: 이 정도 기적이면 와인 좀 따도 돼?
마나님: (웃는다) 좋아, 오늘은 좀 괜찮은 걸 따게 해 줄게.
나: (충성충성)
(일러두기) 우주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별의 형성이 멈추는 1조~200조년 후를 죽음으로 보는 경우도 있고, 블랙홀이 모두 증발하는 시점 (10^(40))년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며, 완전한 열역학적 평형(바른틀 앙상블)이 도래하는 10^(100)년 후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비교적 짧은 시간인 200조년을 우주의 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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