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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3) 정신질환의 진단 (2)

강박증의 구조와 증상의 원리

by 이상균

(1)편과 (2)편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검색 등을 통해 유입된 분은 앞선 포스팅들을 먼저 읽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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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1)편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배웠다.


상상계는 나의 상상으로 출발해서 구축된 세계다.

상징계는 나의 외부의 규칙과 언어로 구성된 세계다.

실재계는 상징으로 포섭하지 못한 나머지 세계다.

실재계에는 상징계에는 없는 쾌락과, 상징계에는 없는 엄청난 고통이 있다.

우리가(인간이) 상징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실재를 직접 접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2)편에서 다음과 같은 정신질환들의 원리들을 배웠다.


아기는 상상계를 떠나 상징계의 이방인이 되는 소외의 과정을 겪는다.

소외의 과정을 겪지 못하면 정신병자가 된다.

소외의 과정을 겪은 다음, 대타자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신경증자가 된다.

분리의 과정을 겪지 못하면 도착증자가 된다.


오늘은 마지막 유형의 정신질환인 강박증의 원리에 대해 배우고, 강박증을 앓을 때 나타나는 주요 증상들과 그 원리에 대해 얘기해 보겠다.


강박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라캉의 주체 개념에 대해 알아야 한다. 어려울 것 같다는 걱정은 내려놓으시길. 내가 역시 쉽게 설명해 보겠다.



IMG_0104.png 프로이트가 개발한 마음에 대한 위상학적 모델


라캉에 앞서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는 위상학적 모델을 개발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의 개념이다.


이드는 우리의 본능과 관계한다. 이드는 욕구(need)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요구(demand)한다. 너는 지금 배가 고프다, 먹어라! 그래서 우리는 밤 11시에 라면을 끓이게 되는 것이다.


초자아는 법률, 혹은 사회의 규칙과 관계한다. 초자아는 금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드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게 된다. 너는 졸리다, 자라! 이드가 요구하지만 초자아는 그 요구의 수행을 금지하는 것이다. 안된다, 너는 공부를 안 했고 기말고사는 내일이다!


이드의 요구와 초자아의 금지 사이에서 중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프로이트는 이런 방식으로 자아가 분열을 통합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라캉이 반박하는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라캉은 자아의 통합이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부터 라캉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라캉은 주체(sujet)와 자아(moi)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한다. 주체와 자아는 포함관계로, 주체가 자아를 포함한다. (주체가 더 큰 개념이다)


자아는 상상계에서 탄생한다. (1)편에서 상상계는 우리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라고 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유롭게 상상하는 자가 자아다. 반면 주체는 상징계에서 탄생한다. 우리는 (1)편과 (2)편에서 우리가 소외의 과정을 통해 상징계로 진입하며 대타자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해 배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전에 이미 존재해 왔던 세상 속으로 태어난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우리의 자아에, 그러니까 본능에 속해있지 않다. (2)편에서 얘기했지만 사이코패스는 소외의 과정을 통해 상징계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른다고 했다. 즉 우리가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수많은 도덕과 양심들은 실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지하철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를 줍는 것, 부모님의 생신날 고깃집을 예약하는 것,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며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것은 당신의 본능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당신이 자라면서 상징계에서 배운 것들이다.


또한 (2)편에서 소외는 상상계를 벗어나 타자들의 세계의 이방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상징계는 타자들의 세계다. 즉 상징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타자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우리는 소외의 과정을 통해 이러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주체가 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우리 안에 이미 타자들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라캉이 보기에 자아의 통합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다. 자아는 결코 주체 전체를 장악할 수 없다. 자아가 장악할 수 없는 타자들의 존재가 주체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로소 라캉의 유명한 아포리즘, '무의식은 타자들의 담론이다'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완전히 체화(體化)되어 있는 사회의 규칙, 언어, 양심과 도덕은 실은 타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타자들의 소유인 것이다.




라캉의 분류체계에서 강박증은 신경증의 하위분류다. 즉 강박증자는 우리 같은 평범한 신경증자들과 마찬가지고 소외와 분리를 이미 경험한 자다. 즉 이미 타자들을 받아들여 주체가 된 자다.


그런데 강박증자들은 우리와 달리 주체 안에 들어와 있는 타자를 애써 못 본 체 하려는 자다. 강박증자들은 자아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타자를 무시하려고 한다. 자아와 주체 사이의 결코 메울 수 없는 균열을 메우려 하는 것이다. 강박증자들은 신경증자들과 달리 타자의 욕망과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강박증자들은 타자나 타자의 욕망이 없어도 자기 자신이 홀로 완전한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그것은 불가능하다. 앞서 단락에서 밝혔듯 소외와 분리를 경험한 주체 안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다. 강박증자가 원치 않아도 타자는 이미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만히 놓아두면 주체는 자꾸 무의식이 거기에 있음을 드러낼 것이다. 즉 타자를 드러낼 것이다. 그래서 강박증자는 의식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무의식이 치밀어 오르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의식을 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쉬운 방법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사유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강박증자들은 명상이나 환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는 어렵지만 사유 안에 있는 좋은 방법은 뭔가를 말하거나 쓰는 것이다. 내가 뭔가를 말하거나 쓰는 동안은 나는 확실히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박증자들은 같은 말을 중얼거리거나 무언가를 계속해서 쓴다. 영화나 드라마등에서 정신질환자들을 묘사할 때 그들이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계속해서 하거나 똑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쓰는 장면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이러한 강박증자의 증상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IMG_0105.png 독일 미술가 엠마 호크(1878~1920)가 정신병원에서 남편에서 쓴 편지. 모든 문장이 "내게 와요", "내게 와요 내 사랑"으로 되어 있다.




타자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자아가 있다는 것을 매 순간 확인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아의 존재를 확인하는 강박증자의 또 다른 전략은 상징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강박증자는 소외와 분리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미 상징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상징계는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했다. 상징계에 익숙한 강박증자는 상징계의 규율을 잘 지키는 한편, 지키는 것을 넘어 상징계에 기반한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수행하며 그 규칙을 수행하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많은 강박증자들은 자신의 공간에 스스로 질서를 부여한다. 모든 물건의 위치를 정해두는 것이다. 반복되는 것들은 오와 열을 맞춰 정돈한다. 자신의 모든 루틴에 순서와 규율을 부여한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희열을 느낀다. 규칙을 따르는 자아를 확인하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마다 두유와 아몬드 한 줌, 당근스틱을 먹다가 어느 날 아침 충동적으로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우리 평범한 신경증자들은 일탈의 쾌감을 느끼지만, 강박증자는 이러한 일탈에 반대로 불쾌감을 느낀다. 강박증자의 쾌락은 규칙을 따르는 데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결벽증은 강박증의 일종인데, 결벽증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손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손을 씻는 행위 자체다. 무언가가 손에 닿았으면 손을 씻는다는 규칙에 복종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고,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해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까지 강박증의 구조와 증상의 발현 원리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했다. 그런데 정신병이나 도착증과 달리, 강박증의 전형적인 증상에 대해 몇 가지 더 얘기해 보겠다. 정신병이나 도착증은 흔치 않지만, 강박을 앓는 이들은 의외로 흔하기 때문이다. (혹은 강박증에 대해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하는 분은 이 단락은 보너스 단락이니, 이 단락을 건너뛰어도 된다)


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로 강박증자는 남성이다. (라캉은 이유는 알 수 없고, 그저 임상적 결과가 그렇다고 말한다. 반대로 히스테리 환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남성 강박증자를 기준으로 쓰도록 하겠다.


1) 라캉에 의하면 자아는 나르시시즘 단계에서 생성된다. 자아는 늘 자기애적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강박증자는 타인 없이 혼자 완전한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강박증자 중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려 하는 경향을 가지는 사람이 많다. 많은 강박증자들이 결혼을 타자를(배우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좀 더 나아가면 어떤 종류의 강박증자들은 여성을 두 종류로만 구분한다. 그것은 성모와 창녀다. 한 편에는 사랑과 숭배의 대상인 엄마의 형상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성적인 대상으로서의 형상이 있다. 성모는 숭배의 대상이지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 또한 창녀는 성적 대상은 될 수 있지만 결혼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이 경우 강박증자는 성적 파트너는 가지더라도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3)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면 아예 성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단계로 나아가기도 한다. 누군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인데, 욕망의 원인에 대해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환상을 유지함으로써 강박증자는 그 결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강박증자는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자위행위를 즐기면서, 자신이 타자에 종속된 주체라는 점을 극구 부정한다.


4) 강박증을 앓는 사람의 중요한 임상적 특징 중 하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의식적이기 어렵다. 늘 말을 하거나 글을 쓰기는 쉽지 않다. 강박행위를 즐기고 싶지만 우리는 육체에 피로를 느끼는 인간이다. 그래서 강박증자는 통증을 만들어낸다. 통증을 느낌으로서 의식이 휴식하는 동안에도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라캉학파 정신분석학자 브루스 핑크에 의하면, 강박증자들이 의학적 이유 없이 통증을 느끼는 비율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고 한다.


5) 신경증자와 강박증자의 또 다른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신경증자는 타자의 욕망대로 살아가고, 강박증자는 타자의 욕망과 반대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타자는 앞서 얘기했지만 부모다. 이어서 (4)편에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신경증자의 가장 평범한 예는 부모의 바람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학교를 가서, 좋은 직장을 얻고, 부모님과 화목하고, 좋은 가정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신경증자와는 반대로 강박증자는 자신의 삶과 부모가 원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부모의 바람과 정반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련의 분석 과정을 통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강박증자가 무의식 수준에서는 타자를 의식(타자의 소망과 정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박증자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타자는 이미 거기에 있다.


6) 또 다른 강박증의 전형적인 증상 중 하나는 분석을 완강하게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 거부는 증세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거세어진다. 왜냐하면 분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상징적 타자인 분석가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 강박증자는 그래서 결코 분석에 참여하지도, 분석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이론적인 수준에서는 정신분석이나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있지만, 강박증자는 그 자신은 정신분석을 통해 무의식에 가 닿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여기까지, 강박증의 구조와 증상의 발현 원리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실은 이번 편에서 신경증자와 환상횡단에 대한 얘기까지 하고 정신질환의 진단 파트를 마치려고 했는데, 분량 때문에 실패했다. 강박증이 흥미로운 점이 너무 많은 질환이라 이것저것 다 언급하느라 분량이 이렇게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적힌 내용은 라캉이 말하는 강박증의 극히 초보적 원리와 진단들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어떤가? 이렇게 보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수많은 정신질환들을 단지 이 몇 개의 도구,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그리고 주체와 타자로 설명하는 라캉의 솜씨는 내가 보기엔 너무나 감탄스럽다. 그리고 그 설명은 너무 아름답다.


정신분석은 예전에도, 지금도 늘 비판을 받는다.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 원리를 들어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했고, 언어학자인 노엄 촘스키는 정신분석은 완전히 헛소리라고 말한다. 진화심리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도 정신분석학을 혐오했고,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정신분석학자들을 주술사에 비유한다. 실험 심리학자 중엔 정신분석을 유사과학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과학 또한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닐스 보어에 의하면 과학 또한 관측장비와 자연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에 불과하다. 인간을, 우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또한 부족한 것이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것이 진리다.


나는 정신분석이 인간, 나아가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라캉의 이론들은 인간을, 특히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데 매우 큰 도움이 되는 위대한 관점이다. 나는 나 스스로를 몇 년 동안 정신분석하며 매우 많은 것들을 깨닫고, 나를 진정으로 용서하고 응원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글이 또 길어졌다. (4)편에서는 우리 신경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다음, 환상을 가로질러 욕망의 주체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그리고 라캉이 실은 '여러분 스스로를 용서하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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