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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1) 라캉의 삼계(三界)

상상계, 상징계, 그리고 실재계

by 이상균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독서모임 [보탬] 이번 시즌 주제는 실재(實在)다. 첫 번째 시간에 우리는 양자역학이 얘기하는 실재에 대해 알아보았고, 두 번째 시간에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실재에 대해 배웠다. 이제 세 번째 시간에 우리는 라캉이 얘기하는 실재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라캉의 실재, 그러니까 실재계(The Real)의 개념은 정말 어려웠다. 꽤 많은 책들을 읽었지만 명료하게 정리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냈다. 그냥 칸트의 물자체와 비슷한 무엇(이것은 김필영 박사님의 해설이다)일까? 이 정도 상태였는데, 어느 날 인터넷에서 귀인을 만났다. 내가 여러 번 언급한 적 있는 예도 선생님이었다.


어떤 결정적 설명을 듣고, 어떤 문장을 일주일쯤 곱씹고 나서 나는 비로소 실재계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늘 그렇지만 진리를 습득하는 것은 깨닫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설명은 실재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라캉의 또 다른 개념인 대상a에 대한 설명이었다. 현재까지 내 판단으로는 대상a를 이해하지 않으면 실재계를 제대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문장은 이러하다.


"예술가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예술가가 포착한 대상 속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거기에 남는다. 작품으로 가져올 수가 없다. '거기'란 바로 실재계이고, '거기에 남는 것'이 바로 대상a다."


알듯 말듯한 문장이 아닌가? 이 문장은 대단히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고, 예술의 본질을 직관하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만들어 주는 정말 멋진 문장이다. 그리고 이 시리즈를 끝까지 읽고 나면 당신도 예도 선생님의 아포리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Jacques Lacan en 1967. ©Botti/Gamma-Rapho


라캉 철학에 들어서면 대개는 맨 처음 라캉의 삼계(三界)에 대해 배우게 된다. 그 삼계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인데, 라캉 철학을 공부하면서 맥이 탁 풀리는 첫 번째 장면이 바로 여기다. 이 세 개의 계(界)를 왜 만들었는가? 무엇을 하기 위함인가?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고 개념만 받아들이면 그 설명은 정말 뜬 구름 같다.


그래서 라캉 삼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설명을 먼저 하고 시작하겠다. 라캉이 이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삼계를 만든 이유는 정신질환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정신질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병사들에게 여러 가지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증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의 시작은 늘 그렇듯, 정신질환에 대한 연구도 분류로 시작됐다. 보고된 여러 증상들에 이름이 붙여졌다.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장애, 해리장애, 섭식장애... 이 정신질환의 목록을 DSM이라고 하는데, 이 DSM의 목록은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해서 여러 개의 버전이 있다. 최신의 버전은 DSM-5다.


라캉은 이러한 분류법이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목록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과학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라캉은 이러한 방법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증상들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새로운 방법이 바로 정신분석이다. 라캉의 삼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이를테면 라캉은 모든 정신증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일종의 위상학적 정신 모델을 개발하려 한 것이다.


이 이야기, 그러니까 라캉의 삼계를 이용하여 정신질환을 진단하고 분류하는 이야기는 다음 문서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라캉이 삼계로 설명하는 정신질환의 원리는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기대해도 좋다. 하지만 정신질환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라캉의 삼계에 대해 알아야 한다.



kaushal-mishra-p76UivR30oo-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 kaushal mishra



상상계(The Imaginary)


아기가 맨 처음 태어났을 때, 아기의 감각은 온전하지 않다. 시각도 청각도 촉각도 성인처럼 동작하지 않는다. 갓 태어난 아기의 시력은, 성인 기준으로는 실명에 가까운 초보적인 수준이다.


이때 아기는 자신과 세계를 구별하지 못한다. 아기에게는 자신이 곧 세상이다. 아기의 세상에는 배고픔, 따뜻함, 졸림, 축축함, 짜증 같은 감정과 감각의 소용돌이만이 있다. 아기는 상상한다. 아 이게 세상이로구나. 세상은 나구나. 내가 느끼는 것으로 가득하구나. 그런데 배가 고프구나. 배가 고프다. 아아 배가 고프다(운다). 아, 뭔가 따뜻한 것이 들어온다. 배가 고픈 감정이 줄어드는구나. 그렇구나. 내가 뭔가를 느끼면 문제는 해결되는구나.


아기는 울어서 자신의 요구를 엄마에게 전달한다. 엄마는 늘 아기의 요구를 적절하게 해결해 준다. 배가 고파서 우는 것 같으면 젖을 주고, 응가를 해서 기저귀가 축축해졌으면 기저귀를 갈아준다. 하지만 아기는 알지 못한다. 아기는 자신과 엄마를 구분하지도 못한다. 아기는 그저 욕구를 느끼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상상 외에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기는 오로지 자신의 상상만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상상계(The Imaginary)다. 라캉의 삼계는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다. 이렇게 인간이 자신의 감각과 경험 등을 통해 단계별로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들이다.


상상계는 우리가 세상을 배우고 사회화 과정을 겪는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늘 상상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김대리가 옆 부서 최대리에게 주말에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자신은 썸을 타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나는 김대리에게 최대리는 누구한테나 친절하니까 그런 오해를 가끔 사는 것 같다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이런 일도 상상계가 동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김대리는 최대리와 자신이 썸을 타고 있다고 상상했다. 하지만 최대리의 상상 속에서는 아니었다. 최대리의 상상으로는 그 둘은 철저히 업무 때문에 협업하는 사이였을 뿐이었다. 또한 김대리는 그와 나를 자신의 실패한 연애담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고 상상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담배터에서 가끔 마주치는, 잡담이나 나누는 별로 친분 없는 동료로 그 와의 관계를 상상하고 있었다. 라캉학파 정신분석학자인 브루스 핑크는 이러한 관계를 '상상적 관계'라고 한다.


상상계는 늘 우리의 말과 행동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대개는 별문제 없이 동작한다. 하지만 상상계가 잘못 작동하는 경우 정신질환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스토킹 범죄의 경우, 가해자는 자신과 피해자 간의 관계를 망상에 가깝게 상상한 나머지 범행을 저지른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는데 가해자는 피해자와 자신이 오래전부터 사귀어온 사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상상계와 정신질환 사이의 관계는 다음 문서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상징계(The Symbolic)


당연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훈육의 과정을 거친다. 대개는 엄마와 아빠를 통해서다. 아이는 엄마가 건네는 천, 인형, 공 같은 것들을 만지고 살펴보며 0세 훈육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은 12개월쯤 일어난다.


아기는 12개월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자신의 욕구가 거부되는 것을 경험한다. 엄마가 따뜻한 젖 대신 차가운 숟가락을 자신의 입에 집어넣는 것이다. 아기는 젖을 달라며 숟가락을 거부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엄마 젖처럼 꿀꺽꿀꺽 삼킬 수도 없는 것을 나의 본능과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18개월이 되면 배변훈련이 시작된다. 배변욕을 느끼지도 않는데 엄마는 아기를 자꾸 변기에 앉힌다. 아기는 욕구가 거부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기의 본능을 통제하는 외부의 규칙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상징계다.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세계. 당신이 지켜야 하는 법률이 있고, 당신이 지켜야 하는 출근 시간이 있고, 당신이 지켜야 하는 도덕과 규범과 예의와 매너가 있는 세계. 당신의 상상에서 출발해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당신의 외부에서 출발하여 당신이 오직 배우고, 또한 배운 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세계.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다. 상징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이렇게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의 규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라캉은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세계에 하필 상징계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IMG_0068.jpeg 서울시 50 플러스포털 제공


서울 중앙에 높이 솟아 정상에 타워가 세워진 땅 일부를 우리는 남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남산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남산인가? 남산 진입로부터 남산인가? 케이블카 요금소부터 남산인가? 남산의 지하 10m 지점은 남산인가? 누군가 남산에서 돌멩이를 하나 주워 집에 가져간다면 그는 남산의 일부를 소유한 것인가?


희한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마 쉽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의식하며 살아가지는 않지만, 세상은 분절되어 이름이 붙은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분절되어 이름이 붙어 있는 것들의 예제는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면 대한민국의 실체는 무엇인가? 영토인가? 구성원인 국민인가? 정부와 시스템인가? 혹은 역사인가?


재미있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좋은 징조다. 이 질문들이 흥미로왔다면 이번엔 조금 더 심각한 질문을 해보자. 내가 손톱을 잘랐다면 나는 지금 나를 자른 것인가? 나는 오늘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고, 햄버거는 80일 안에 내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될 것인데, 햄버거는 소화의 어느 단계부터 나인가?


어라? 싶었다면 당신은 상징으로 가득한 세계의 어떤 일면을 엿본 것이다. 잘 생각해 보면 '나'라는 개념조차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이렇게 누군가 이름 붙인 상징의 체계로 되어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임의적인 것들에 누군가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대한민국부터 '나'의 존재까지, 자본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부터 과학이나 종교, 철학 같은 학문들, 무언가를 거래하는 모든 경제 행위, 전통과 도덕, 그러니까 우리가 이름을 붙여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 엄밀하지 않은, 어떤 흐릿한 개념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은 우리가 이름 붙인 개념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모든 것에 이름이 붙여진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늘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름을 붙인 것들을 배우며 살아간다. (이 글의 범위는 아니지만, 이 이름을 붙이는 이를 라캉은 '대타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흐릿한 개념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세상에 존재했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배우고 그것이 정말 있는 것으로 믿어오고 있는 모든 개념들을 가리켜 라캉은 모두 상징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라캉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상징계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다.


우리가 상징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 안에 가득한 상징에 대해 이해했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상징이 아닌 것은 없는가? 세계는 상징만으로 되어 있나? 물론 그렇지 않다. 절대 상징에 포섭되지 않는 것, 이름을 붙여도 늘 그 이름을 넘어서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바로 실재요, 그것들이 있는 세계가 바로 실재계(The Real)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계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넘어서 있으면서, 상상계와 상징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라캉의 삼계중 실재계가 이해하기 가장 어려울 텐데, 예를 여러 개 들며 설명해 보겠다.



코타키나발루의 석양 ⓒ Citytour.com


실재계(The Real)


당신이 코타키나발루의 거대한 석양 앞에 서 있다고 하자. 그때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어머니가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이 어떻냐고 말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건 처음 봐."라고 할 것인가? "이렇게 감동한 건 처음이야"라고 할 것인가? 어느 쪽 대답이든, 그 대답은 당신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을 뿐, 그 장대한 석양의 본질을 담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언어로는 담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실제로 언어로 기술할 수 있는 세계는 세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눈치를 챘을 수도 있는데, 대표적인 상징은 바로 언어다. 상징계를 지배하는 것은 실은 언어다. (이 글의 범위는 아니지만, 라캉은 그래서 '무의식은 언어로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코타키나발루의 석양처럼, 세계에는 이렇게 언어로 포섭할 수 없는 무엇들이 있다.


실재는 이렇게 상징을(언어를) 넘어서 있다. 실재는 상징에 붙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있는 세계를 라캉은 실재계라고 말한다.


이미지_1.png ⓒ 광주시


알듯 말 듯 할 것 같으니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또 다른 실재는 사랑이다.


"이거 받아요. 우리 아들이랑 헤어져요. 혜연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무슨 뜻인지 알 거예요."


수많은 한국 드라마에서 클리셰로 쓰이는 이 장면을 알 것이다. (너무 밈화 되어서 오히려 최근 드라마에서는 본 적이 없다.) 대개는 신분, 계급 차이가 나는 여주에게 남주의 어머니가 돈을 건네며 헤어져달라고 하는 장면이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은 돈이다. 우리 세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늘 돈이다. 하지만 말했듯 사랑은 실재계에 속하는 것으로, 따라서 모든 상징을 넘어서 있다. 돈도 예외가 아니다. 이 유명한 클리셰 다음 장면은 어떻게 되는가? 작품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개 여주는 그 돈을 거절한다. 여주는 실재계에 있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상징계의 왕인 돈을 거부하는 것이다.


코타키나발루의 장대한 석양, 상징계의 왕인 돈을 거부하는 사랑, 뭔가 아름답고 달콤한 것들이 가득한 곳인가? 싶다면 절반은 맞았다. 그렇다. 실재계에는 쾌락이 가득하다. 실재계는 상징계에서 누릴 수 있는 쾌락과는 비교도 없는 쾌락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샤넬 핸드백을 가졌을 때의 쾌락과, 짝사랑하던 선배에게 고백을 하고 사귀게 되었을 때의 쾌락은 어느 쪽이 높은가? (당연히 샤넬 핸드백은 부의 상징으로, 상징계에 속한다)


하지만 반대로 실재계에는 상징계에는 없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함께 있다. 샤넬 핸드백을 도둑맞았을 때의 고통과, 짝사랑하던 선배가 내 친구와 사귀게 되었을 때의 고통은 아마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즉 인간이 상징을, 상징계를 만들어내는 이유다. 실재계에 쾌락만 있다면 좋겠지만 실재계에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함께 있다. 우리는 실재를 그대로 접할 수 없기 때문에 상징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려 하는 것이다. 여전히 어렵다. 상징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떤 참사를 겪고 나면, 우리는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그런데 그 애도식에 참사의 장면 그 자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전쟁이나 사고, 자연재해 등으로 희생된 희생자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 같은 것들은 추도식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실재를 피하려, 외면하려 한다.


대신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 짐작했겠지만 이름은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러니까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실은 참사를 상징화하는 것이다. 추모비를 세우고 추모일을 정하는 것은 실재가 범람하며 우리의 상징계를 침범할 수 없도록, 시간과 공간의 벽을 쌓는 작업이다.


우리는 상징계를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결사적으로 상징계를 지키려 한다. 우리는 실재계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예도 선생님은 “평범한 사람은 실재를 경험하면 죽는다”라고 단언하신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최근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들른 적이 있다. 장례식은 온갖 상징으로 가득하다. 영정, 상주, 애도의 말, 상복... 이런 것들은 모두 엄숙과 경건, 애도와 위로의 상징들이다. 장례식은 실은 고인을 잃은 고통을 상징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려는 시도다.


그런데 장례식이라는 상징화에 포섭되지 않는 그런 죽음도 있다. 그 옆 방의 고인은 9살 어린이였다. 그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화도, 울음소리도 없었다. 그러다 밤 11시쯤, 누군가 방에 들어갔고, 정말 창자가 끊어질 듯 한 통곡이 이어졌다. 이러한 죽음은 상징에 포섭되지 않는다. 복도는 고요해졌다. 옆으로 늘어선 모든 접객실에 앉은 사람들 중 그 방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실재는 이렇게 바라보기 조차 두려운 것이다.




어떤가, 최대한 쉽게 설명했다고 했는데 이해가 되었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면 그건 당신의 잘못은 아니고 더 쉽게 풀어쓰지 못한 나의 탓이다. 나도 라캉 삼계를 (내 딴에는) 완전히 이해하는데 거의 10년이 걸렸다.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들도 따라와 보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일단 라캉의 삼계를 정리했다. 다음 편을 읽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요점들을 몇 개 정리해 보겠다.


상상계는 나의 상상으로 출발해서 구축된 세계다.

상징계는 나의 외부의 규칙과 언어로 구성된 세계다.

실재계는 상징으로 포섭하지 못한 나머지 세계다.

실재계에는 상징계에는 없는 쾌락과, 상징계에는 없는 엄청난 고통이 있다.

우리가(인간이) 상징을 만들어 내는 이유는 실재를 직접 접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다음 편은 대체 이런 논의를 왜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 보겠다. 이 글을 시작하며 나는 라캉이 이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삼계를 만든 이유는 정신질환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고 썼다. 이제 라캉의 삼계를 이용해서 정신질환을 설명해 볼 차례다. (2) 편의 제목은 '정신질환의 진단'이다.



https://brunch.co.kr/@iyooha/130

https://brunch.co.kr/@iyooha/123

https://brunch.co.kr/brunchbook/like-fouc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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