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의 완성과 환상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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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서 라캉의 삼계와 주체의 개념만을 이용하여 수많은 정신증의 원리를 설명하는 라캉의 정신분석 기법에 대해 배웠다.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하면 정신병자가 되고, 거세의 과정을 마치지 못하면 도착증자가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세를 너무 훌륭하게 수행하면 강박증자가 된다는 것도 배웠다.
(2)편에서 강박증자는 타자와 실재를 거부하는 자라고 했다. 강박증자는 내 안에 들어와 이미 주체를 분열시킨 타자를 바라보려 하지 않고, 실재계의 고통이 두려워 쾌락마저 거부하는 자이다. 쾌락이 매우 적은 상징계에 남아 규칙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자아를 경험하며 아주 적은 양의 쾌락만 탐닉하는, 금욕주의적인 정신질환자가 강박증자인 것이다.
즉 라캉은 거세가 이루어지되, 너무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적당한 신경증을 앓는 우리의 상태를 비교적 바람직한 상태라고 본 것이다. 대타자로부터 분리를 경험하고, 내가 가진 욕망이 나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여전히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의 모습,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향해 가끔 히스테리를 부리는 우리의 모습이 주어진 현실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사회인으로서 바람직한 인간상이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주중에는 정장을 입고 오피스에 출근해 액셀 작업을 하다가도 주말엔 멋을 부리고 클럽에 가고, 한 달째 꾹 참고 다이어트를 하다가도 밤 11시에 충동적으로 라면을 끓인다. 무릎 수술을 차일피일 미루는 엄마한테 대체 왜 내 말을 안 듣는거냐며, 왜 엄마까지 나를 힘들게 하냐며 울음을 터트리고, 남자 따위는 몇 년 동안 쳐다도 안 볼 거라고 다짐하고도 헤어진 남자 친구가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 눌러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다. 우리는 모두 완벽하지 않다. 우리가 철저히 이성적일 수 있다면 하지 않을 행동을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하고, 우리는 가끔 우리의 충동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한다. 라면을 다 먹고 나서, 엄마한테 말을 한 바가지 쏟아붓고 나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는 언젠가 또다시 그와 비슷한 일탈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우리의 신경증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다. 그래서 라캉은 "우리는 모두 치유될 수 없는 정신병자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탈과 결함은 그저 거기에 있음을, 치유할 수 없음을 알라는 정도에서 라캉은 끝나지 않는다. 이 일탈과 결함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 글을 읽고 나면 알게 될 것이다.
(3)편에서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배웠다. 타인의 욕망을 자연스럽게 욕망하는 신경증적 태도와, 타인의 욕망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욕망하는 강박증적 태도다.
신경증자는 어려서는 부모가, 학생 시절엔 교사가, 사회에 나와서는 회사나 사회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려고 한다.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장을 얻으려고 한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너무 늦지 않게 결혼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리려고 한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히 돈을 벌어 부자는 못되더라도 언제 수도권에 집 한 채를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남들과 비슷해지려고 하는 평범한 이들이 신경증자다.
일부 강박증자는 반대로 살려고 한다. (3)편에서 강박증자는 타자를 부정한다고 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자는 바로 부모다. 강박증자는 부모의 욕망을 인정하지 않는다. 강박증자는 가능한 한 타자들과 반대로 살려고 한다. 강박증자는 배우자를 찾지도, 가정을 꾸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배우자 역시 타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강박증자가 이러한 것은 아니다. '일부'라고 단서를 달아 놓은 것에 주목하길)
이러한 두 가지 태도, 즉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태도와 타인의 욕망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욕망하는 태도 외에 다른 태도는 없을까? 혹시 더 괜찮은 삶은 없을까?
(2)편과 (3)편에서 우리는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통해 신경증자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 두 과정, 소외와 분리를 합쳐 거세라고 부른다는 것도 배웠다. 행복했던 상상계를 떠나 타자들의 세계인 상징계의 이방인이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거세의 첫 단계를 소외라고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했고, 대타자에게서 결함을 발견한 다음, 대타자로부터 분리되어 타자의 욕망을 스스로 욕망하게 되는 과정이기에 거세의 두 번째 단계를 분리라고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런데 이 두 과정을 왜 거세라고 부르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알아보지 않았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할 차례다.
라캉은 거세의 대상을 상징적 남근인 팔루스(phallus)라고 부른다. (팔루스는 물리적 남근인 페니스(penis)와 다르다) 이 팔루스는 우리에게 금지된 쾌락을 상징한다. 우리는 권력, 명예, 부와 같은 쾌락을 우리는 아버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경증자는 아버지가 갖고 있는 나의 팔루스를 되찾아오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거세의 과정이란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금지를 스스로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하는 과정인 한편, 아버지에게 빼앗긴 팔루스를 탈환해 오겠다고 결심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마 다양한 연령대일 것이다. 그중 만약 당신이 40대 이상, 삶의 연륜이 어느 정도 쌓인 사람이라면 아마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유는 뒤돌아보면 보통 둘 중 하나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혹은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 그렇지 않은가?
삶에서 아버지의 인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혹시 연륜이 있다면, 자신의 경제력이 아버지의 경제력을 넘어선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런 경험을 했다면 아마도 당신을 대하는 부모님의 태도가 그 이후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인정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탈선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라캉으로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즉 팔루스를 되찾아올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팔루스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인정 자체를 가치 없는 것으로 격하시키려는 것이 탈선의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상징계의 규칙에 대한 욕망, 사회적으로 성공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고 명예를 쌓으려는 욕망, 즉 팔루스를 탈환해 오려는 욕망을 가리켜 라캉은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 신경증자들에게 거세는 이미 이루어졌다. 우리는 상징계의 법을 받아들였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로 스스로 결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팔루스를 되찾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환상이고, 착각이다. 우리가 탈환해와야만 하는 쾌락,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아버지의 인정 같은 것은 그저 환상으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인정을 위해, 타자의 욕망대로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타자의 욕망대로 살지 않는 것, 나의 욕망대로(정확히 적으면 충동대로) 사는 것, 나 만의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 조금 어렵게 라캉의 언어로 말하면 욕망의 주체에서 주이상스의 주체로 이동하는 것이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완성이다.
타자의 욕망대로 살지 않는다니, 그것이 가능한가? 분명 우리는 (2)편과 (3)편에서 우리는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며,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고 배웠는데 말이다. 타자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이제 이 얘기를 해보자. 다만 이 절 이후로는 라캉의 환상횡단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 개입해 있다는 점을 미리 말해두겠다.
신경증자인 우리는 평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출근하기 싫어하면서도 결국 제시간에 회사에 가고, 뺀질거리는 박대리가 펑크 낸 업무를 결국 야근을 하서 메운다. 퇴근길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지하철 좌석을 할머니께 양보하고, 체중 관리를 해야 하니 토요일 점심에는 두유와 샐러드를 준비한다. 점심시간에 웹서핑하다 언뜻 스쳤던 구두를 침대에 누워 다시 검색해 보지만, 잠들기 전에 결제버튼을 누르지는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결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늘 노력한다.
그렇다면 결함은 정말 발생하지 않는가? 삶을 조금만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다는 걸 쉽게 눈치챌 수 있다. 당신 역시 훌륭한 신경증자라면,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의 삶은 결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바랬던 회사에 원서를 냈지만 서류에서 떨어져 버린 날, K군은 영어 학원 앞에서 발걸음을 돌린다. 그냥 소주나 한잔하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영어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려면 학원을 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그날 K군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난 건강 검진에서 당뇨, 콜레스테롤, 혈압 수치가 전부 정상치를 초과했다는 결과지를 받은 P부장은 한 달째 샐러드를 먹고 있다. 그런데 오늘 저녁 샐러드를 씹다 충동적으로 배달앱을 켜고 에라 모르겠다 족발을 시켰다. 내친김에 맥주도 한 캔 땄다. 건강하려면 샐러드를 먹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날 P부장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뺀질이 박대리가 사업부장님 따라 매주 주말마다 골프를 치러 다니더니 이번 인사에서 과장으로 승진했다. 아니꼬움을 꾹 눌러 참고 있었는데, 옛 부서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다가 S과장이 박대리 얘기를 하자 참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안 알아주고 골프 치는 새끼나 승진시키는 병신 같은 회사! 뱉고 나서 말이 좀 과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해졌는데, 옆 동료는 말없이 소주를 따라준다.
이러한 결함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이런 예외적인 사건들을 라캉은 증상이라고 부른다. 라캉은 증상을 매우 좋은 의미로 사용한다. 라캉에 의하면 증상은 우리가 환상을 가로지를 수 있는, 즉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욕망하게 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실은 증상(symptom)과 증환(sinthome)을 엄밀히 구분해 사용하지만 이해하고자 하는 목표 수준을 위해 이 구분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이 텍스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 궁금한 분들은 추가적인 라캉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아일랜드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는 대단히 난해한 글을 쓴다. 그의 대표작 <율리시스>에는 사전에 없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튀어나오며, 문맥을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이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그저 따라가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마지막 장인 18장은 위 사진과 같이 단 한 개의 구두점도 찍혀 있지 않다. 한국말도 마찬가지지만 구두점 1개(마침표나 쉼표 같은)의 위치가 바뀌면 이어진 문장들의 뜻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알 것이다.
라캉이 보기에 제임스 조이스는 정신증을 앓았다. 라캉의 분류대로 라면 제임스 조이스는 소외를 경험하지 못한 정신병자다. 우리는 (2)편에서 소외를 경험하지 못한 정신병자는 상징계를 만들어 낼 수 없고, 그래서 상상계만으로 실재계의 범람을 방어해내려 한다는 것을 배웠다.
라캉은 제임스 조이스의 글쓰기를 그의 증상으로 본다. 즉 라캉이 보기엔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상상계를 글로 옮김으로써 실재계의 지배에 의한 정신붕괴를 막아낸 것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즉 증상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제임스 조이스는 분열증을 앓았거나, 우울증 환자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증상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라캉에 의하면 상징계의 질서나 법과 규칙, 도덕과 윤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결함들,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광기들이 오히려 우리를 살려내는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글쓰기가 증상이었다면, 우리는 어떤 증상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결함들, 우리의 실수나 일탈에 대해 얘기했다. 우리는 이미 증상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증상으로 버텨내고 있다.
영어 학원을 빼먹고 친구를 불러 소주를 마신 K군은 다음 날 더 열심히 해볼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친구의 위로가 K군에게 서류탈락에 대한 위안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족발 한 접시와 맥주 한 캔을 모두 비운 P부장은 당장은 후회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탈이 아예 없다면 다이어트는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뱉고 나서 말이 좀 과했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렇게 옛 동료들 앞에서 히스테리를 부리지 않았다면 박대리(이제 진급했으니 박과장)는 점점 더 밉게 보였을 것이고, 회사 생활은 점점 재미 없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증상은 우리를 살게 만든다. 상징계의 규칙과 법으로 뒤덮인 딱딱하고 재미없는 세계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일탈 덕분이다. 당신의 실수가, 당신의 결함이, 평소의 당신답지 않았던 그 어떤 행동이 실은 당신을 살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영어 학원 하루 빼먹어도, 참지 못하고 족발을 한 접시 시켜도, 소주 마시다 욱하여 욕을 내뱉아도, 괜찮다. 그렇게 당신은 살아간다. 영어학원을 빼먹고, 족발을 한 접시 다 비우고 당신이 느껴야 할 것은 죄책감이 아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그 증상이 당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오히려 당신을 살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라캉은 그 결함을 가지고 있는 당신 스스로를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제 라캉이 실은 '당신 스스로를 용서하라'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을 것이다.
다만 이 증상들은 상징계를 살아가게 하는 증상들에 불과하다. K군이 취업하고 싶었던 회사와 토익점수는 (2)편에서 얘기한 분류에 따르면 그저 상징일 뿐이다. P부장이 받아 든 결과지에 쓰인 수많은 수치들 역시 상징에 불과하다. 박대리가 얻은 새로운 직함인 '과장' 역시 상징계에 속하는 허상에 불과하다.
라캉이 말하는 나만의 환상은 그와 좀 다르다. 라캉은 이러한 증상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환상을 만들어, 자신만의 욕망을 욕망하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환상을 만드는 것, 상징계의 환상을 가로지르는 것, 이것을 라캉은 환상횡단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읽기와 쓰기는 상징계나 타자의 지배를 받지 않는 나만의 증상이다. 나에게 라캉을 읽으라고 얘기한 대타자는 없다. 나에게 휴일에 도서관에 나가 라캉에 대한 글을 쓰라고 강요한 타자도 없다. 라캉에 대해 읽고 쓴다고 상징계의 보상인 돈 같은 것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라캉을 읽고, 잘해야 좋아요 열 개 눌려질 이런 글을 쓰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자신만의 환상이다. 나는 무언가를 읽고 쓰는 것이 즐겁다. 나는 이런 행위를 통해 만족을 얻는다. 나는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다. 내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나는 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나는 내가 만든 환상을 만들어 나의 욕망을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일 아침, 제시간에 회사에 출근하는 상징계적 인간으로 돌아가겠지만, 라캉적으로 말하면 나는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만큼은 환상을 가로질렀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그것을 하고 있는가? 한번 물어보라. 나는 환상을 가로지르고 있나? 물론 일반적으로는 연구자나 전공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개는 이 순간 환상을 가로지르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로 당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단지 라캉이 궁금해서 이렇게 긴 글을 읽는 사람은 당연히 환상횡단자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을 주제로 한 어떤 모임에서 멤버 중 하나가 그것이 타인의 욕망인지 자신의 욕망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 좋은 질문이었다. 우리는 (2)편에서 가장 중요한 타자, 즉 대타자는 대개 부모님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욕망을 부모님께 말해보라고 말이다.
"아버지, 이번 프로젝트 열심히 해서 성공하면, 내년엔 차장으로 승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머니, 헬스장을 다닌 지 6개월째인데 건강검진 수치가 좋아졌어요. 살도 좀 빠졌고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좋아하시면 그건 타자의 욕망이다.
"아버지, 요즘 라캉이 좋아져서 인문학 비스킷이라는 블로그 글들을 읽고 있어요."
"어머니, 예술의 전당에서 하는 카라바조 전시회를 다녀왔는데 정말 좋았어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고개를 갸웃하시거나, 그걸 왜 하느냐 더 물으시면 그건 자신의 욕망이다.
자, 어떤가? 당신은 평소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욕망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부모님은 어떤 표정을 지으실 것 같은가?
이글의 범위는 아니지만, 환상횡단은 그래서 니체의 초인-되기와 무척 닮았다. 당신을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력화하고 당신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라는 니체의 말은, 상징계의 법과 규칙은 물론이고 그토록 갈구하던 아버지의 인정이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스스로의 환상을 창조하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의 목표와 닮아있다.
이제 정신분석의 모든 과정이 끝났다. 소외를 경험하여 정신병자를 면하게 된 우리는, 이어 분리를 경험함으로써 도착증자를 면하게 되었다. 너무 완벽한 거세의 과정을 겪지 않아 상징계에 구멍이 나 있는 우리는, 강박증을 면한 평범한 신경증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방금 마지막으로 한 발을 더 내디뎠다. 상징계와 대타자가 우리에게 강요했고, 결국 우리 스스로 목표했던 욕망들은 전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타자에 속한 욕망이었다. 팔루스의 탈환이 신기루 같은 목표라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이제 환상을 가로질러 환상의 저편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전히 신경증을 앓고 있지만, 우리는 이제 평범하지 않은, 훌륭한 신경증자가 된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이 말을 덧붙여 두겠다. 라캉에 대해 깊게 읽은 분은 내가 이 글에서 의도적으로 증상-증환, 욕망-충동을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엄밀한 구분보다는 라캉의 의도를 이해시키는 것이 목표였기에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말을 변명처럼 붙여준다.
자, 정신분석의 진단에 대한 긴 글이 끝났다. 본래는 두 편으로 기획을 했는데, 네 편으로 길어져버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여서 전달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마지막 편은 라캉이 말하는 예술의 정체와 대상 a에 대한 것이다.
환상을 횡단하지 못하면 우리는 상징계의 타자들의 욕망만을 욕망하게 된다. 회사의 직함으로, 경제적으로 속한 계급으로, 정치 정당의 지지자로, 본인을 정의하게 된다. 이들은 평범한 신경증자로, 스스로를 소유적 방식으로 정의하려는 태도 자체가 비난받아야 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환상횡단에 대해 배웠다. 상징계의 욕망을 넘어, 환상의 저편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뭔가를 읽고 씀으로써 환상의 저편에 닿았다. 하지만 모두에게 그렇게 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나만의 환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질만하다고 여길 환상은 있을까?
그런 것이 정말 있다. 환상을 넘어 있는 보편적인 환상.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 우리는 마지막 시간에 이 이야기를 하고, (1)편에 등장했던 예도 선생님의 아포리즘을 이해해 볼 것이다.
"예술가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예술가가 포착한 대상 속의 아름다움은 영원히 거기에 남는다. 작품으로 가져올 수가 없다. '거기'란 바로 실재계이고, '거기에 남는 것'이 바로 대상 a다."
오늘도 길었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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