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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11. 2023

재미와 흥행의 상관관계

재미를 계량할 수 있을까



크래프톤웨이를 보다 화들짝 놀랐는데... 이 에피소드가 무려 독립된 꼭지로 나와 있군요 


의장님과 식사를 하다 나눈 대화의 일부인데, 이 부분은 게임 개발자분들도 흥미로워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 점심시간에 따로 포스팅을 하나 해볼까 합니다. 오랜만에 개발 관련 포스팅일 수도 있겠네요. 


프로젝트 EXA를 승인하는 과정에서, 장병규 의장님은 디렉터인 제게 과제를 하나 주셨습니다. "EXA의 재미를 측정하는 도구를 함께 개발하라"는 과제였습니다. 이 과제를 받았을 때는 매우 의아했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그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크래프톤(당시 블루홀)은 회사 설립 당시 "제작과 경영의 분리"를 철학으로 했습니다. 그래서 경영진이 <테라>의 개발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테라>의 흥행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이제 "견제"의 입장에 섭니다. (이 부분은 크래프톤웨이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예측 정확도를 높이고 불확실성을 낮추기 위해 이러한 요청을 하신것이죠. "재미를 측정하는 도구의 개발"

처음엔 불가능한 요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의 허리 둘레를 재거나 자아의 몸무게를 측정하라는 요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계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경영진의 일관된 태도를 보며, 이 것은 "계량 할 수 있다"나 "계량할 수 없다"로 답을 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옳은 방식이 아닐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 논의는 태도나 관점의 문제가 될 수 있고, 플라톤 이후 수천년 서양 철학이 논의해온 주제와도 닮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진리를 대하는 철학의 세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그 것은 절대주의, 상대주의, 회의주의입니다. 

절대주의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교부철학의 신, 데카르트의 이성, 하이데거의 존재 같은 것들이지요. 진리가 있기 때문에 절대주의자들의 철학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진리에 대한 탐구가 됩니다. 

피터 드러커가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개선할 수도 없다"고 했듯,게임회사 경영진은 "재미를 계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절대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금을 투입하여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예측하고, 불확실성을 줄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주의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상대주의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지만,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의 입장은 유명론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명론은 보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개념입니다. 철수, 민석이, 영선이, 지애는 존재해도 '인간'이라는 개념은 관념으로만 존재하지 실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입니다. 개념은 단지 '이름으로 존재(唯名)'한다는 주장이어서 유명론이라 합니다. 이후 영국 경험론과 현상학이 상대주의를 계승합니다. 

개발자나 게이머는 상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는 기본적으로 체험(경험)에 대한 것입니다. 체험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합리적으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내려집니다. 몬스터헌터는 제게 최고의 게임이지만, 게임이라곤 애니팡 밖에 안해보신 저희 마나님에겐 어렵고 무서운 게임이 되겠지요. 

회의주의는 진리에 대해 '상관 없다'고 말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쿨해보이지만 회의주의는 대개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지금까지 수천년 간 수 많은 철학자들의 작업이 다 의미 없다고 말하는 철학이니까요. 그리고 의미가 없어진 백지 위에 새로운 것을 써 나가기에 어렵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트스를 회의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고, 그 후 니체의 허무주의와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회의주의를 계승합니다. 

제 생각엔, 사업부나 마케팅 부서, 혹은 웹진 기자들 중 일부는 회의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재미만이 성공과 강하게 연결된 요소일까?"라는 의문, 혹은 "재미와 성공은 별로 상관이 없다"라고 결론을 가진 분들이죠. 마케팅이나 홍보 전략을 통해서도 완성도가 부족한 게임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어쩌면 장병규 의장님 본인이 회의주의자가 되어 계실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배틀그라운드>는 위대한 게임이지만 그 게임의 성공에는 핵심 재미 외에도 매우 훌륭한 시장 진입전략(트위치, 게임스컴 인비테이셔널)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계실테니까요.   

여튼 이런 개똥철학 같은 제 대답을 듣고 식사를 하시며 "아직 측정 도구를 못찾았다는 얘길 이렇게 길게 하신거죠?" 라고 핀잔을 주신 것 같은데 그 얘긴 빠졌네요.   

게임 업계에 와서 정말 좋은 것은, 자수성가한, 저보다 훨씬 큰 거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다는 겁니다. 나보다 훨씬 높은 시야와 삶과 도전에 대한 통찰을 가진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 희열까지 느껴집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의장님. 지난 번 양재천에서 마주쳤을 때 너무 놀라서 인사를 제대로 못드렸습니다. 의장님의 건강과 크래프톤의 건승을 빕니다. 저는 또 현재의 자리에서 분발하여, 저 나름대로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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