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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10. 2023

이름을 붙이는 과학

우리의 과학은 이름의 감옥에 갇혀있다

집 앞 단골 바에서 올드 패션드를 시키면, 바텐더는 늘 이렇게 계피를 잔 위에 올려준다. 



연휴가 가는 것이 아쉬워 마나님과 단골 술집에서 한 잔을 더 하기로 했다. 문득 마나님이 내가 낮에 읽던 책 얘기를 해달라고 한다. 나는 요즘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읽고 있다. 


마나님: 낮에 읽던 책, 읽으며 막 감탄하던데 어떤 내용이야? 


나: <말과 사물>?


마나님: 응. 


나: 전체 내용을 한 줄로 줄이긴 어려운데... 오늘 내가 읽은 부분만 한 줄로 줄이면 이런 내용이야. "어떤 시대의 과학은 명명하는 것에 불과했다."


마나님: 역시 어렵네. 명명하는 것? 


나: 철학은 늘 그렇지만 읽어내긴 어려운데, 읽고 나서 깨달으면 당연한 개념인 경우가 많아. 이 것도 그래. 예를 들어 이런 거야. 우리는 물이 100도에서 끓는 다는 걸 알아. 그런데 최초로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측정을 해 본 결과일까?  


마나님: 어라? 


나: 물이 끓는 것을 관찰한 후 그 온도가 100도임을 측정한 것이 아니겠지. 우리가 갖고 있는 온도는 일종의 체계야. 사람들은 물이 어는 점을 0도라고 하고, 끓는 점을 100도라고 하기로 약속했어. 온도는 과학이 아니라 일종의 약속이고, 그저 자연 현상에 붙인 이름에 불과해. 


마나님: 명명하는 것이구나! 


나: 이런 과학은 수도 없이 많아. 예를 들어 린네의 분류체계에서 개과와 고양이과의 차이점은 앞발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 하는 것이야. 현대에는 RNA 같은 유전과 진화 정보를 이용한 분자 생물학이 분류의 기준을 제시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그저 눈으로 보고 명명한 것 만으로 그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거지. 


마나님: 아하... 


나: 이런 과학을 푸코는 '스스로 명명한 이름의 감옥에 갇힌 자폐적 과학'이라고 비웃어. 


마나님: 와, 이거 뭔가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 있네. 학부 때 전공 공부를 하며 치민 생각이 있었는데... 


나: 어떤 건데? 


마나님: 예를 들어 이상심리 공부를 할 때 이상행동(abnormal behavior) 특성을 분류하는 과정에 관찰과 검사를 통해서 이 팩터(factor), 이 팩터가 몇 점이면 어떤 진단을 하고, 어떻게 분류하고, 이런 것들이 있었거든. 


나: DSM 진단 체계 같은거? 


마나님: 나는 그 때 일단 시험을 봐야 하니까 막 외우면서도 정말 이런 점수로 정상 비정상 진단이 가능하다고? 통계가 과학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나: (웃는다) 


마나님: 푸코가 딱 그 얘기를 하고 있네.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정말 과학이 맞냐고. 


나: 푸코는 늘 이렇게 묻지. "정상이 뭐죠?" (잔을 든다) 


(잔을 부딛힌다)


마나님: 나 정말 푸코 읽어봐야겠네. 지난 번에 오빠가 추천한 책이 <광기의 역사>였었지? 


나: 응, 그 책의 얇은 해설서지만. 읽어봐. 


(이렇게 푸코 영업에 성공한다)






(이 이야기가 재밌으셨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한 편 더)


https://brunch.co.kr/@iyooh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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