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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01. 2023

당신은 왜 MBTI가 불편한가

측정과 분류, 그리고 규율권력에 대하여



예전부터 한번 써볼까, 싶었던 소재인데, 왠지 점심 먹고 산책 나가기 싫은 날 써 보기로 한다. 먼저 가상의 대화부터. 


A: 저는 ESFP인데, MBTI가 어떻게 되세요? 

B: 모르겠습니다. MBTI를 별로 안 좋아해서 해본적이 없네요. 

A: 아, ISFJ이신가 보구나. 

B: 그게 뭔데요?

A: MBTI를 싫어하는 유형요. 

B: … 


MBTI가 유행하던 시기에 썼다면 분란이 일어날까 두려웠겠지만, MBTI 유형은 한참 지나간 것 같은데 이제야 뭐 어떠랴. 세상에는 A처럼 MBTI를 신봉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B처럼 거부하려는 사람도 있다. A 유형인 사람은 이 글을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좋겠고, B 유형인 사람은 ‘이래서 내가 MBTI가 불편했구나’하고 생각하면서 읽었으면 좋겠다. 다소 엉뚱한 지점에서 시작하지만 놀라지 말고, 금방 MBTI가 등장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은 존재 자체로 존엄하며, 신분, 빈부, 성별, 인종, 국가, 종교 등을 초월하여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지는 실은 얼마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존엄하다는 생각을 인도주의(人道主義)라고 하는데, 인도주의는 서양을 기준으로 하면 불과 5백년 정도 전,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처음 등장했다. 


16세기 전까지 인간은 존엄하지 않았다. 존엄은 신이나 천사, 종교인, 혹은 왕이나 귀족 등 존엄할 이유가 있는 대상과 계급에 주어졌다.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었고, 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고, 신에게 구원을 갈구해야 하는 작은 존재였다.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는 생각은 그 시대의 처벌 행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형벌은 신체형이었다. 신체를 자르거나 때리거나 태우는 형벌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잔인한 형벌들의 목적은 피지배계층에 형벌의 과정을 보여줌으로서 공포감을 심는 것이었다. 군주의 권위가 형벌의 형태로 가해지는 것이었다. 


1757년에 프랑스 루이 15세에 대한 암살 시도범에 대한 공개 처형이 있었는데, 형벌 집행인들은 먼저 범인의 손을 황산에 담가 녹였고, 그 후엔 몸의 곳곳에 말뚝을 박았다. 마지막으로 두 팔과 두 다리를 각각 말에 묶은 후,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하여 몸을 네 조각으로 찢었다. 몸이 말뚝에 고정되어 있었으니 아마 찢어진 조각은 넷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러한 잔인한 처형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이 존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종교개혁, 계몽주의의 도래를 통해 인간은 보다 높은 지위를 얻었고, 인도주의 등장 이후엔 이러한 잔인한 신체형은 사라지게 되었다. 죄를 저지른 사람도 인간에 속하게 되었기에 이제 죄인에게 잔인함을 휘두룰 수 없게 되었다. 신체가 형벌의 대상이 아니게 되자 이제 정신에 고통을 가하는 형벌이 탄생한다. 감옥이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형벌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재판관은 먼저 죄인을 관찰한다. 죄인이 어떠한 동기로 죄를 저질렀는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반성은 하고 있는지, 교화의 가능성은 있는지 관찰한다. 그 과정에서 재판관은 죄인에게 질문을 하고, 죄인은 재판관에게 답해야 한다. 


두 번째로 재판관은 죄인을 측정한다.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죄인의 치러야 하는 죗값을 계산한다. 그것은 벌금형이 되기도 하고, 징역형이 되기도 하며, 자비를 얻을 경우 집행유예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재판관은 죄인을 분류하고 기록한다. 죄인은 사형수가 될 수도 있고, 무기수가 될 수도 있고, 본인이 하기에 따라서는 모범수가 될 수도 있다. 죄인에 대한 재판 기록은 문서로 남고, 만약 죄인이 형기를 마치고 감옥을 나가서 다시 죄를 저지른다면 그 기록이 죄인에 대한 가중처벌의 명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인도주의적인, 존엄한 인간에 대한 처벌법이 새로 고안되었다. 이제 인간은 야만으로부터 멀어졌다. 인간은 보다 더 인간다워졌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으면서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정상이다. 이 시스템, 그러니까 관찰-측정-분류/기록 으로 이어지는 이 시스템은 어딘지 우리에게 익숙하고, 데자뷰를 가져온다. 


학생 때 우리는 관찰되었다. 수업 시간에 우리는 선생님에게 관찰되었고, 수업 시간이 끝난 이후의 일과는 숙제로 사후에 관찰된다. 우리는 반듯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책상에 앉았다.  3분단, 앞에서 세번째 줄, 오른쪽 자리, 우리가 오와 열을 맞추어 교실에 앉았던 것은 실은 쉽게 관찰되기 위해서였다.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교장 선생님 훈화 시간에도 줄을 맞춰 운동장에 섰었다. 


학생 때 우리는 측정되었다.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시험을 치렀고, 줄 세워졌다. 수학 80점, 국어 90점, 영어 85점. 우리는 측정된 결과로 점수를 얻었다. 우리는 누군가는 우수한 성적표를 받고, 누군가는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분류되고 기록되었다. 누군가는 우등생이 되고, 누군가는 문제아가 된다. SKY를 갈 수 있는 최우수등급 학생은 수학 특별반에 보내지고, 인서울 4년제를 노리는 학생들은 자기 교실에 남았다. 우리들에 대한 것들은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 학생부에, 성적표에.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에 나와서도 이와 똑 같은 시스템을 겪는다. 우리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인생(이력서, 자소서)을 관찰 당하고, 면접 자리에서는 인상과 태도를 관찰 당한다. 회사에 들어와서는 매주 주간 보고서를 쓰고, 매년 업적 보고서를 쓰며, 이 로서 상사와 회사에게 측정된다. (분류에 대해서는 굳이 쓰지 않겠다) 이렇게, 누군가 행사하지 않아도 언제나 우리의 주변에서 동작하는 권력을 규율권력이라고 한다. 


우리는 규율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이 규율권력의 시스템, 관찰-측정-분류/기록의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시스템은 국가 사회 그 자체가 구동하는 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MBTI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왜 MBTI를 불편해했는가? 


먼저 MBTI는 관찰한다. 당신이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 감각중심적인지, 직관중심적인지, 사고기반으로 판단하는지, 감정기반으로 판단하는지 말이다. 기존 규율권력과의 차이점은 권력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자신을 관찰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MBTI는 측정한다. 당신의 E 점수가 몇 점인지, I 점수가 몇 점인지. S 점수가 더 높은지, N 점수가 더 높은지. 


예상했겠지만 MBTI는 분류하고 기록한다. 그 결과로 당신은 ISTJ가 되고, ENFP가 된다. 당신이 MBTI 테스트를 한 결과는, 그 MBTI 검사를 제공하는 사이트에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느낌이 오는가? 그렇다. MBTI는 실은 근대 규율권력의 원리대로 동작하는 분류 시스템이다. 단지 그 관찰과 측정의 대상이 사회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일 뿐이다. 규율권력에 익숙해진 인간은, 이제 규율권력에 복종하는 것도 모자라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서 규율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MBTI가 재미있는 이유다. 우리는 한 번도 재판관이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늘 죄인의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관찰당하고 측정당하고 분류당했다. 하지만 MBTI는 우리에게 재판관의 역할을 부여한다. 우리는 MBTI를 통해 우리 스스로를 관찰하고, 측정하고, 분류한다. 재미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처음으로 재판관이 되어 본 것이다. 


그리고 MBTI를 불편해하는 당신에게 얘기한다면, 이것이 바로 MBTI에 대한 묘한 반감의 정체다. MBTI가 왜 싫냐고 물으면 대개 이런 대답이 나온다. “인간을 어떻게 겨우 열 여섯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가 있어?” 이렇게 반론해 놓으면 시원한가? 아마 아닐 것이다. MBTI 자체가 시시하기 때문에 반감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MBTI가 근대 규율권력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싫은 것이다. 측정과 분류를 통해 스스로에게 규율권력을 휘두르고, 본인 스스로에게 복종하는 태도가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깨닫지 못했기에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기묘한 반감은 규율권력에 대한 어렴풋한 알아차림에 기인한다. 


자 그렇다면 나는 MBTI에 대해 혐오감을 갖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아쉽지만 그건 아니다. 우리는 자유로운가?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김대리는 정시에 출근했다. 그리고 오늘 업무로 할당된 코딩을 시작했다. 나는 김대리의 출근을 관찰했지만, 김대리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김대리가 오늘 분량의 코딩을 마쳐야 조직의 성과를 이끌 수 있다. 그리고 김대리가 다행히 약속된 시간에 출근한 것은 규율권력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리는 자유로운가? 물론 김대리는 자유롭다. 그러니 내 눈치를 쓱 보더니 사내 커피숍에 모닝 커피를 사러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규율권력은 ‘이미’ 구조로서 작동하고 있다. 규율권력이 존재함을 어쩔 수 없는 세상에서, 규율권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복종하겠다는 태도는 이상한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태도다. 아크릴판에 둥근 조각칼로 자유롭게 구불구불한 길을 내 보자. 아크릴판을 기울인 후, 홈을 따라 구슬을 굴려보자. 구슬은 자유롭게 ‘길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 구슬에게 그 길 밖에도 세상이 있다고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는 아니다. 규율권력에 익숙한 사람에게, 자신이 자신을 관찰하고, 측정하고, 분류하는 재미를 주는 MBTI는 충분히 즐거운 놀이가 된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하고 이해할 만하다. 


내가 하고 싶었다는 말은, 이렇다.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MBTI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구슬이 굴러가는 홈 바깥의 세상에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규율권력 바깥의 자유에도 관심을 갖고, 그것이 어떻게 동작하고 있는지 관심 가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당신이 미워했던 것은 실은 MBTI가 아니고, 구조로 작동하고 있는 규율권력 그 자체였다는 것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양치도 안 했는데 점심시간 끝났네. 생각보다 글이 너무 길어졌다. 이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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