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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Sep 30. 2023

금욕주의의 배후

<도덕의 계보>,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두 주저 중 하나, <도덕의 계보>를 다 읽었다. (다른 하나는 <선악의 저편>이다) 이 책은 니체의 후기 대표 저작이다. 


니체는 보통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대표 저작이라기 보다는 니체 철학을 종합하여 승화한 시 형식 장편 소설에 가깝다. 읽기에 앞서 니체를 여러 권 읽지 않으면, 이 책은 사실 거의 읽히지 않는다. (주석에 의지하여 읽어내는 방법은 있겠지만, 아마 재미있는 작업은 아닐 것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기 전에 스스로 자신의 사상을 다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있게 이 책을 썼는데, 안타깝게도 책은 거의 팔리지 않았다. 크게 상심한 니체는 니체 답지 않게 자기를 성찰하는데, 그는 생각 끝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너무 잠언적이고 상징적이고 패러디적이어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안팔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보다 훨씬 쉽게 자신의 사상을 설명한 책을 저술하기로 하는 데, 그것이 <선악의 저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악의 저편> 역시 많이 팔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니체는 사실, 대학에서 출간해 준 <비극의 탄생>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책을 자비 출판했다. 그러니 실망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역시 굴하지 않고 <선악의 저편>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 중 ‘도덕’ 부분을 확대, 상세 해석한 책을 쓰는데 그 책이 바로 이 <도덕의 계보>다. 


도덕의 계보라니, 제목이 좀 무시무시하게 생겼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나는 니체가 책 제목을 참 잘 짓는다고 생각한다. 제목에서 니체는, 내가 이 책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계보학은 출발점에 대한 연구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계보는 족보다. 나의 아버지의, 그 아버지의, 그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그 아버지는 누구와 결혼하여 누구를 낳았는지. 즉 나는 누구로부터 기인했는지 찾아볼 수 있게 하여 나의 출발점을 탐색하는 문서가 족보다. 


이렇게 계보학은 어떠한 사물이나 담론이 근본적으로는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관심을 갖는다. 그럼 이 제목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니체는 제목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덕이 무엇으로부터 기원했는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알아보겠다”, 이 책은 이런 책인 것이다. 


역시나 서두가 길었다. 이 책은 세개의 논문으로 되어 있다. 


첫번째 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에서 니체는 <선악의 저편> 전체를 요약한다. 선과 악의 개념은 통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니체는 그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파헤쳐간다. 선과 악은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을까? 500년 전에, 1000년 전에, 2000년에, 선과 악은 각각 어떤 뜻을 가지고 있었을까? 계보학적 연구가 도달하는 결론은 정말 놀랍다. 


두 번째 논문, <죄, 양심의 가책>에서 니체는 죄의 개념과 양심의 가책의 개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파헤친다. 어린 양을 낚아챈 독수리는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는다. 독수리는 양을 동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비 오는 날 길가에 버려진 새끼 강아지에게 동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줍지 않았음에 대해 집에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우수하다는 것을 의미할까? 니체의 대답은 다르다. 그리고 놀랍다. 


그리고 세 번째 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니체는 금욕주의의 진실과 금욕주의자들의 진짜 의도를 폭로한다. 이 세가지 얘기 중 나는 세 번째 얘기를 골라서 조금 쉽게 풀어 써 보려고 한다. 


금욕주의란 성욕이나 소유욕, 정복욕 같은 본능적인 욕망을 죄악시하면서, 그 욕망들의 충족을 금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한다. 금욕주의자들은 욕망을 분출하거나 충족하는 자들을 타락한 자로 규정하고, 욕망을 억압하며 살아가는 삶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은 대략 이러하다. 동물은 욕망을 참지 않는다. 동물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성교하고 싶을 때 성교한다.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 그러니 인간답다는 것은 금욕하는 것이고, 금욕을 포기하는 것은 동물적인 것이다. 어떤 가, 그럴 듯 한 가?


사실 다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정도는 금욕하며 산다. 수험생 때는 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살았고, 대학생 때는 고백하여 혼내주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살았다. 누군가는 운동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고 오늘도 헬스장에 가고, 누군가는 아침 잠을 줄여가며 영어 학원에 간다. 뿐만 아니다. 각자 가진 것에 따라 누군가는 핸드백을 갖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있고, 누군가는 자동차를 지르고 싶은 욕망을 억제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금욕주의자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금욕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 낸 사람을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지독하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간 친구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차도 없이 뚜벅이로 살며 돈을 모아 결국 내 집을 마련한 사람을 보며 그러지 못했던 내 인생에 대해 조금은 후회를 한다. 죽어라 영어 공부를 하더니 결국 나 보다 먼저 진급한 김대리에게 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니체는 바로 이러한 마음이 금욕주의를 있게 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이제부터 니체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극도로 경건함을 추구했던 중세 그리스도교는 물론이고 2500년 전, 싯다르타의 시대에도 고행은 유행이었다. (싯다르타 본인은 오랜 고행을 했지만, 고행으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고행을 그만둔다) 카톨릭도, 불교도, 힌두교도 사제들의 결혼을 금지하거나, 사제 스스로 결혼을 포기한다. 이런 경향은 고대 종교적 공동체에서도 나타난다. 


결혼의 포기는 금욕의 극치다. 결혼의 포기는 단지 성교나 번식 행위의 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신적 유대를 함께 하는 반려 없이 혼자 삶을 살겠다는 것은 무서운 각오 없이 가능하지 않다. 생물학적 본능과 사회적 본능 모두를 거부하는 이러한 엄청난 고통의 감내가 어떻게 인류의 역사 곳곳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가능했을까? 이 지점에서 니체는 혹시 금욕주의는 유전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농담을 건넨다.


대단한 이유가 없이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는 성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금욕주의는, 바로 위에서 얘기한 우리의 마음, 그러니까 금욕하는 자를 나 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나아가 우러러 숭상하는 마음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니체의 설명이다. 


고대 유럽의 금욕주의자들은 어느 순간 우리의 마음을 간파해냈다. 내가 금욕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존경하는구나. 나를 우러러보는구나. 이윽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금욕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여야겠다. 더욱 많은 존경을 얻어야겠다. 이러한 기획은 플라톤 이래 서양 형이상학을 규정해온 이원론과 결합한다. 


플라톤은 세상을 둘로 나누는데, 그것이 완전한 이데아와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세계다. 금욕주의자들은 육체적인 욕망이 거짓되고 불순하며 그것이 우리의 세계에 속해있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육체와 지상의 삶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지상의 삶은 천상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다리 정도로 격하되고, 진정한 즐거움은 천상에 있는 것이 된다. 천상의 즐거움을 누르기 위해 지상의 기쁨과 즐거움은 거부되어야 한다. 금욕주의적 그리스도교가 이렇게 탄생한다. 


금욕주의적 그리스도교는 존경심을 자극하기 위해 죄의식을 이용한다. 너는 금욕하는가? 너는 충분히 금욕하는가? 나 보다 훨씬 금욕하는 자의 질문에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낀다. 더 경건해져야겠구나, 더 겸양해야겠구나, 더 검소해야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들은 금욕교도가 되어간다. 신도가 생겼으니 이제 금욕주의 역시 성립한다. 


여기까지, 본능을 거스르는 금욕주의가 어떻게 성립 가능했는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이 됐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서 그만뒀다면 니체는 세기의 철학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니체는 한 번 더 묻는다. 금욕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말 이것이 전부일까? 그저 금욕주의는 성립하기만을 꿈꾸는 것일까? 이제 니체는 금욕주의자들의 무의식을 정신분석하기 시작한다. 


금욕주의자들이 거부한 것은 세속 전체의 삶이다. 그리고 왕과 귀족과 같은 세속의 권력자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세속에 속해 있다. 금욕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모두 거짓된 것이고 불순한 것이며 경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것들이다. 그래서 금욕주의자들을 향한 존경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금욕주의자들은 세속의 군주보다 높은 곳에 서게 된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카노사의 굴욕’을 떠올릴 수 있다) 


금욕주의자들은 사실 세속적으로는 패배자다. 그들에겐 세속적으로 일궈낸 승리가 없다. 그런 그들은 세속적 승리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원한을 가지고 있고, 무의식적으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금욕주의자 스스로는 이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오직 순수한 마음에서, 본능을 거부하여 더욱 인간적이 되고자 할 뿐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세속 위에 이데아와 천상을 둠으로서 세속에서의 패배를 전복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금욕주의는 그저 성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금욕주의가 세속의 삶을 거부함으로서 세속을 뛰어 넘는 권력이 되는 것을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다는 숨겨진 진실을 폭로한다. 


니체의 설명을 쉽게 풀기 위해 다소 엄밀하지 못한 예시와 논리 비약을 가져왔지만 <도덕의 계보> 3논문에서 니체의 논리는 대략 이러하다. 그리고 니체의 생각에 동의가 된다면 한번 더 자신의 사유 수준을 도약시킬 토대가 여기에 있다. 


금욕주의의 ‘금욕’에 자신이 굳게 지지하고 있던 무엇을 넣어보자. 좋은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나는 부동산주의(?)의 예를 들어 보겠다. 


많은 부동산 카페에 가보면, 부동산 투자로 성공한 소수의 금욕주의자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보통 이렇게 얘기한다. 너는 충분히 노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너는 부동산 공부를 하고 있는가? 우리, 그러니까 카페의 멤버들은 대답한다. 아닙니다, 저는 제 노후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카페지기가 말한다. 그렇다면 너희는 금욕하라. 그래서 우리는 금욕한다. 


우리는 카페지기의 복음에 따라 미라클 모닝을 외치며 새벽에 일어나, 매일 자기개발 일기를 쓴다. (매일 감사 인사를 하라는 카페지기도 있다) 더운 여름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거부하고 양산을 쓰고 임장에 나선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부동산 투자에 성공하여 누릴 미래의 부와 기쁨이 진짜이고, 현재의 나와 내 삶은 진짜가 아니라고 믿는다. 


부동산 투자서를 읽으며 신앙을 고백하고, 부동산 투자 공부하지 않는 세속의 사람들을 이제 자신의 발 밑에 둔 것 같은 우월감을 느낀다. 이 경지에 우리를 인도한 카페지기를 찬양한다. 이렇게 우리는 복수에 성공하고, 카페지기는 권력을 얻는다. 


부동산 투자 카페의 카페지기는 ‘진심으로 카페 멤버들이 투자를 통해 부유해지기를 바란다’. 금욕주의자들이 ‘진심으로 신도들이 고행을 통해 천상의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것’ 처럼. 이렇게 금욕주의는 변형되어 여전히 현대 사회의 곳곳에 숨어있다.


내가 굳이 이렇게 약간 무리수를 둔 것은, 나는 니체가 비판한 것이 그저 금욕주의에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유럽 전체가 정신병원이라고 생각한다. 니체는 OO주의에 자신의 판단을 맡기고, 스스로 정신적 노예가 되려고 하는 모든 마음가짐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OO주의가 있다면, 니체가 비판하는 금욕주의의 구도에 한번 넣어보기를 권한다. 


길이 무진장 길어지고 있어서, 이제는 억지로라도 줄여야겠다.


<도덕의 계보>를 다 읽었으니 라캉에 이어 당분간 니체도 떠나 있을 예정이다. 이제 내가 다음으로 읽을 철학자는 미셸 푸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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