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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16. 2023

우리는 병원 침대를 향해 걷고 있다

오늘의 나를 오롯이 경험하기 위해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박찬국 교수님의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를 읽다가 큰 울림이 있는 에피소드를 만나서, 세번 거푸 읽고, 마나님께도 소개한 다음 여기에도 남긴다. 점심 산책 시간이 좀 줄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꼭지다. 



“스코트가 떠나기 한달 반 전, 그의 100세 생일 얼마 전 테이블에 여러 사람들과 앉아 있을 때 그가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려 합니다, 하고. 그리고 스코트는 다시는 딱딱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신중하게 목적을 갖고 떠날 시간과 방법을 선택했다. 정연하고 의식이 있는 가운데 가기 위함이었다.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같은 난폭한 형식이 아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육체가 그 생명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했다. 


나는 동물들이 흔히 택하는 죽음의 방식, 즉 보이지 않는 곳까지 기어 들어가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써 죽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코트의 선택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과일을 갈아 주스를 만들어 마시던 그는 어느 순간 ‘이제 물만 마시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병이 들지 않았다. 정신은 여전히 말짱했고, 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시험하듯 ‘좋—아’라고 말하고, 마지막 숨을 쉰 후 평온하고 조용하게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는 그 순간 그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헬렌 니어링의 자서전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中”



박찬국 교수님은 삶의 절정으로서, 의연한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해 헬렌 니어링을 인용하셨지만, 나의 지평은 죽음의 의연함 같은 고양된 가치를 받아들이기에 무척 좁다. 나는 ‘죽음’이라는 소재를 만났을 때 이미 그 소재의 크기에 압도된다. 


철학자들은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죽음은 사실 철학의 대상은 아니다. 죽음은 신비의 대상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도 죽음의 본질에는 접근할 수 없다. 우리 모두 한 번도 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전자에 각인된 막연한 공포와 슬픔을 선험적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철학자들이 죽음을 소재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고려가 인생의 본질을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개 자신의 정체성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세우려 한다.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고, 나는 스마일게이트 개발실장 직위를 '가진' 직업인이며, 열 권짜리 장편 소설 출간 이력을 '가진' 소설가이며, 가득 찬 와인 셀러를 '가진' 술꾼이다.


이렇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나를 규정하는 동안 진짜 '나'는 사라진다. 죽음은 이 소유를 벗겨내는 사고의 도구다. 내가 곧 죽는 다면 이제 내가 소유한 것들은 전혀 중요해지지 않는다. 나는 내 재산을 가지고 저 세상에 갈 수도, 내가 쓴 소설을 가지고 저 세상에 갈 수도 없다.


이제 비로소 철학은 자기 생각을 말할 준비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면, 당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나요? 이렇게 철학은 질문을 시작한다.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죽고 싶은가? 문득 프린스턴대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 졸업식 축사가 생각난다. 허준이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끝에 있는 것은 결국 병원 침대다. 아마도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의 삶은 병원 침대에서의 죽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삶은 그 병원 침대를 향해 걷는 여정이다. 허준이 교수는 그걸 지적하고 있다. 당신이 언젠가 당신에게 올 것이라고 미루고 있는 미래의 행복, 미래의 충실함의 정체는 사실은 그럴듯한 1인실의 병원 침대라는 것. 중요한 것은 침대를 향해 걷는 여정 자체이지, 병원 침대가 아니라는 것. 그러니 그 여정을 단지 돈을 벌고 승진하려 노력하는 데만 쓰지 말라는 것이다. 


내 남은 여정을 충실하게 채우고, 의연하게 죽을 것. 매일 아침에 거울을 맞이할 때 마다 내게 물어야 한다.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은 결국 그럴듯한 병원 1인실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은 나의 충실한 여정과 관련이 있는지. 오늘 나는 오롯이 오늘 하루를 나를 위해 온전히 경험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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