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칼 세이건
<코스모스> 완독, 설 연휴에 카페에 앉아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시작한다.
설에 본가에 가니, 언제나처럼 어머니는 산더미 같은 음식을 해 놓고 가족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리굴젓을 참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이번에도 어리굴젓이 담긴 접시를 쓱 내 앞으로 밀어 놓으신다. 나는 녹두전에 어리굴젓을 얹어 먹었다.
뼈를 제외한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80일이 지나면 모두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내가 삼킨 녹두전의 일부는 80일 안에 분명히 내가 될 것이다. 녹두전의 탄수화물 성분은 간에서 다른 포도당과 합성되어 글리코겐의 형태로 저장되었다가, 손톱이나 손등의 피부, 머리카락, 눈꺼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음식이라는 대상을 만들어서 먹는다는 행위를 본질과 좀 다르게 낭만적으로 인식하곤 하는데, 과학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내 몸을 재구성할 물질을 섭취하는 행위다. 나는 내가 먹은 음식으로 구성된다. 내가 어제 삼킨 녹두전은 삼킨 순간 이미 잠재적 나인 것이다.
그렇다면 녹두전은 어디에서 왔을까? 언젠가 내가 될 운명인 녹두는 어느 농부의 밭에서 자랐을 것이다. 녹두를 구성하는 주요 성분인 탄수화물은 탄소와 수소의 화합물이다. 우리 같은 동물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어서 탄소를 얻는다. 녹두는 아마도 동물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에서 탄소를 얻었을 것이다. 아마 옆 농장 송아지가 아니었을까. 그 송아지 또한 여물에 포함되었던 보리 알갱이에서 그 탄소를 얻었을 것이다.
놀랍게도 이렇게 원자는 불멸한다. 원자는 새로 생겨나지도,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핵분열과 핵융합이다) 언젠가 내가 될 녹두전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이전엔 녹두였고, 그 전엔 송아지가 뱉은 이산화탄소였으며, 그 전에는 송아지가 먹은 보리 알갱이였고, 그 이전에는 원시고래의 지느러미였고, 그 전에는 트리케라톱스의 발톱이었으며, 삼엽충이었고, 시아노박테리아였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무엇이었을까? 생명 이전이었던 아주 먼 옛날, 언젠가 녹두전이 된 후 다시 내가 될 운명이었던 탄소 한 알갱이는 아마도 우주를 떠돌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시아노박테리아가 될 때 까지 아주 오랜 시간 지구의 대기를 떠다니며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탄소의 계보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여전히 원자는 불멸한다. 그렇다면 우주를 떠돌던 그 한 알의 탄소는 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탄소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헬륨이 세 개 필요하다. 별이 팽창하며 적색거성이 되면 중심핵은 수축하는데, 이 때 온도가 1억도가 되면 헬륨의 핵융합 반응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세 개의 헬륨이 융합되어 한 개의 탄소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일단 이 헬륨 핵반응이 시작되면 적색거성은 안정화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탄소를 생성하기 시작한다. 그 탄소 알갱이는 아마 이때 만들어진 수 많은 탄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태양계에는 적색거성이 없다.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75억년이 필요하다. 믿기 힘들지만 그 탄소 알갱이는 태양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아주 먼 우주, 우리가 알 수 없는 우주의 어느 별이 적색거성이 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우리가 우주에서 왔다는 것도 사실이 된다. 칼 세이건은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적은 후, “우리는 모두 별의 아이들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는 박권 교수님의 표현을 더 좋아한다)
놀랍지 않은가? 우리는 태어나기 전부터 우주에 있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우주로부터 왔고,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우주에서 온 것을 섭취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죽은 후 우리는 다시 우주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흙이 된다’는 문장은 문학적 은유가 아니라 물리적 서술이다.
맑은 날 밤 캠핑장에서는 정말 쏟아질 듯 많은 별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우주를 마주하는 순간 경외감과 함께 약간의 슬픔을 느낀다. 나는 그 슬픔의 정체가 노스탤지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고향, 우리의 모든 것이 온 그 곳을 바라보며, 그리고 우리가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사실 우리가 곧 우주임을 깨닫는 것이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일자와의 합일을 이루는 순간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엮은 독후감을 써보려고 했는데, 이미 여기까지 너무 길어져서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나는 이 책을 세번째 읽었다. 중학생 시절 읽었을 때는 이 책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한 과학책이었고, 30대에 다시 읽었을 때는 인문학서나 철학서로 읽혔다. 이제 50대가 되어 다시 읽은 <코스모스>은 삶이라는 축복과 우주라는 기적에 대한 찬사와 감사로 가득했다. 이러한 놀라운 우주에서 살아갈 기회가 주어졌다니 이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가? 칼 세이건은 책 내내 우주에 경외를 바치고, 인류의 여정에 찬사를 보낸다.
위대한 책이지만 이 책도 출판된지 40년이 넘은 책이라 당시엔 정상과학이었으나 현대엔 틀린 것으로 밝혀진 부분도 꽤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칼 세이건은 중성미자의 질량이 광자와 같이 0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직 측정하지 못했을 뿐, 중성미자의 질량은 0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디테일은 훌훌 넘기면서, 칼 세이건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만 따라가는 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개인적으로 머리말과 1장과 2장은, 인류 역사에 남을 명문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분께 이 세 개 챕터의 일독을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찬가인 <Sid Meier’s Civilization VI> 주제곡, <Sogno di Volare> (비행의 꿈)이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아래에 이 곡을 링크한다.
https://youtu.be/6j2s4EkR36A?si=gbUHn6zUDTFbT6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