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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Feb 15. 2021

네 인생의 엑스트라

유치환, <행복>

친구로부터 이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약속과 약속 사이 이동하는 동안 시간이 남으니 그때 맞춰 광화문 지하철역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 맞춰 그곳으로 갔고 그 친구의 다음 약속 장소까지 같이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 만남은 그 친구가 나를 위해 일부러 계획해서 마련된 시간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약속 중간에 비는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수단에 불과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인지 그 친구는 늘 약속이 많았고 나는 그 친구의 시간이 비어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남들이 먹지 않는 부위나 먹다가 남긴 음식이라도 늘 맛있게 먹을 준비가 돼 있는 심정으로...  그래도 그때 나는 행복했다.


세월이 흘렀고 정말 오랜만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우리 동네에 온 그 친구는 “친한 친구 A가 이 동네에 살아서 몇 번 와봤다”고 했다. 그리고 A 이야기를 한동안 이어갔다. 그렇구나, A는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사는구나. 그 친구에게는 중요한 A의 생각과 안부가 사실 내게는 큰 의미나 감흥이 없었다. 나를 만나면서도 A를 생각하느니 차라리 나 대신 A를 만나고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상대가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만큼 상대에게 나 역시 그런 존재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개 무리한 욕심일 것이다. 상대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어떤 이는 좌절하고 어떤 이는 분노한다. 수용을 할 경우에도 어떤 이는 계속 곁에 머물고 어떤 이는 떠난다.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고, 내가 뭔가를 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니어도 그 친구를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많고, 얼마든지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나 엑스트라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분노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쓸쓸했다. 내가 더 매력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소는 양 끝에 앉은 두 사람의 무게가 어느 정도 비슷해야 서로 재미있게 오래 탈 수 있다. 한쪽이 너무 무거워서 기울어진 채로 있다면 균형을 맞추기 어렵고 더 이상 놀이를 지속하기도 어렵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서로 균형이 맞지 않는 관계는 오래가기 어렵다. 그래서 주변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외롭게 되는지 모른다.


엑스트라는 연극이나 영화에서 비중이 크지 아니한 역 또는 그 역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extra’의 영어 뜻은 ‘추가의, 가외의’라고 한다. 인생의 엑스트라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될까? 내가 그 친구 인생의 엑스트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는 독립 영화 같은 내 인생에서 한때 상대 주연 배우 같은 존재였지만, 나는 블록버스터급 영화 같은 그 친구 인생에서 엑스트라에 그친 것이 아닐까? 촬영장 한 귀퉁이에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단역 배우가 바로 나였나 보다.


이번 만남에서는 내 사정 때문에 먼저 일어서야 했다. 그 친구와 헤어지는 순간에 엄청 아쉽거나 조만간 꼭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도 그 친구의 비중이 많이 줄어들었나 보다. 여전히 나는 그 친구 인생에서 엑스트라겠지만 출연 비중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없어서인지 태도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나를 불렀을 때 내가 시간이 되고 마음이 내키면 출연하기로 한다. 하지만 만나는 순간만큼은 그 친구가 주인공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네 인생의 엑스트라로서 사는 방식이고 내 인생의 주연이자 감독으로 사는 방식이다.


행복


          유치환


ㅡ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ㅡ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ㅡ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vonshnauze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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