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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May 19. 2021

삶은 자신의 예술 작품이다.

- 이진우,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을 읽고

- 자기에 대한 관심은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는 욕구와 의지의 자연스러운 경향이지만, 업적과 성공을 절대화하는 현대 자본주의사회는 이러한 경향을 억압하거나 차단한다. 누가 강요하지 않더라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에서 자기 성찰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삶은 나의 것이지 결코 모두의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만들려면 결국 자신만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 삶은 자신의 예술 작품인 것이다.


- 자신의 삶을 돌아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성찰하는 대신, 단순히 생존하고 있는 셈이다.


이진우,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은 ‘어떻게 인생의 중심을 지킬 것인가’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저자의 말처럼 코로나 19 사태는 전 세계의 자가 격리를 초래해서 억압되고 망각되었던 자기 성찰의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작가에 따르면, 강요된 고립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기를 다시 발견하고, 무엇이 우리 삶에 의미 있는 것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2년째 시행하면서 각종 회식, 모임, 여행이 사라지거나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신 집에서 가족과 있거나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그만큼 밖으로 향하던 관심을 안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역설적으로 코로나 19라는 비극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인 셈이다.


- 현대인을 자극하는 것은 극단이다. 현재 우리의 삶과 인생을 철저하게 지배하는 자본주의도 극단의 논리다. 균형과 절제는 시시하게 느껴지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계와 극단에 도전하는 체험이 우리를 자극한다.


포털에 뜨는 뉴스 기사의 한 줄 제목은 극단적이고 자극적이다. 물론 기자나 신문사 입장에서는 그 많은 기사들 중에서도 단 한 줄로 독자들이 자기네 기사를 클릭하도록 하기 위한 궁여지책이겠지만, 종종

‘굳이 이렇게까지 표현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다. 광고나 TV쇼도 마찬가지다. 자극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다. ‘너, 어디까지 해 봤니?’라는 말로 얼마나 끝까지 가봤는지를 묻기도 한다.


‘저렇게까지 높은 음이 올라갈 수 있나?’하는 생각으로 놀라며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아이돌 그룹의 춤은 ‘칼군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정확하다. 비명을 지르고, 서로 잡아 뜯거나 저주를 퍼붓는 장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반면, 이처럼 강렬한 자극에 지친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불만 비추는 화면을 응시하기도 한다. 나 역시 폭발적인 가창력을 뽐내는 가수보다 툭 툭 이야기를 던지듯 노래하는 가수를 좋아한다. ‘스카이캐슬’이나 ‘부부의 세계’ 같은 드라마는 다시 보고 싶지 않지만 ‘나의 아저씨’ 같은 드라마는 다시 봐도 좋다. 번쩍번쩍 화려한 현대 문물-특히 매체물-이 때로는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과도하게 자극적이어서 피로감을 느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 밖에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질 때 비로소 자기 자신과 함께 한다.

- 어떤 고독은 우리에게 감정적인 고통을 주지만, 어떤 고독은 우리를 되찾게 만든다. 전자가 부정적 고독이라면, 후자는 긍정적 고독이다.

-자신을 찾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는 긍정적 고독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긍정적 고독에서 고립은 자립의 토대가 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고독할 때만 비로소 자신이 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학습은 “고독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고독을 견디는 법은 결국 자신과 사회적 관계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 모든 사람은 궁극적으로 홀로 있으며, ‘홀로 있음’은 모든 인간의 실존 조건이다. 홀로 있음을 외로움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적 관계다.


인간 사회에서 ‘고립’, ‘소외’된다는 것은 물리적, 정서적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일 만큼 심각하다. 신체적인 폭력 못지않게,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은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다.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의 심정은 비참하다. 그런 한편 늘 사람들과 섞여 있으려다 보면 자기 자신과 만날 시간을 잃는다. 혹은 원하지 않아도 늘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도 견디기 힘들다. 그 상대가 아무리 소중한 자신의 아이이거나 연인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이가 세 살이었을 때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했는데 -남편은 진로 준비로 휴일에도 집을 나가 있었다-하루 한두 시간만이라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베이비시터를 검색하곤 했다. 결국 불안해서 실행에 옮기진 못하면서도 꾸준히 검색하기를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저자의 표현대로 ‘홀로 있음’이 인간의 실존 조건이기 때문이었나 보다. 지금 학교에서 만나는 동료도 자신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이유가 잠을 더 자고 싶은 욕구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자기 삶의 색채가 달라진다. 세상을 등지고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자발적 고독이 필요하다. 자유롭지 못하고 자신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평균대 위에 올라가 걷던 기억이 난다. 요즘 내 삶에 빗대자면, 평균대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나를 주변에서 온갖 자극적인 소리와 이미지로 부르고 있는 상황이다.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걸어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의식해야 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나아가고 있고, 내 몸의 균형 상태는 어떠한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섣불리 대답하며 몸을 틀었다가는 균형을 잃고 떨어지기 십상이다.


내가 만들어가는 나의 삶, 균형이라는 삶의 기술을 되새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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