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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Jan 12. 2022

보톡스 맞으러 간 날

학부모를 만났네

피부과에 다녀왔다. 보톡스를 맞으러 간다니까 아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굳이 왜 그런 걸 맞으러 가냐, 다녀오면 엄마 얼굴을 보기가 힘들 것 같다고 강하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남편은 보톡스 안 해도 예쁘다고 말하는 걸 보니 대놓고 반대는 못하지만 찬성 입장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난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누구한테 그렇게 성을 많이 냈나 돌아보게 될 만큼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자칫, 웃고 있어도 화난 것 같은 얼굴이 될까 걱정된다. 예전에는 나도 보톡스나 피부 관리는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이나 연예인들이 받는 줄 알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 중에 피부과에 다니는 사람들이 늘면서 나도 받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피부과는 내가 가겠다고 해서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난주에 용기 내서 전화했더니 그 주는 이미 주말까지 예약이 다 찼다고 했다. 내가 처음 방문하는 거라고 하니 직원을 바꿔서 연결해 주었다. 그분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 날짜로 예약을 하고, 내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드렸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옷차림은 거의 면접룩, 치마와 모직코트. 평소엔 트레이닝 바지와 점퍼 차림으로 다니지만 오늘은 가장 좋은 옷들로 골라 입었다. 겨우 피부과 가면서 오버한다고 할지 몰라도 나란 사람, 혼자 백화점 가서 옷 사는 것도 힘들다.

“굳이 왜 그래? 그럴 필요가 있나?”

라고 주변 사람들도 이해하기 힘들어하지만,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괜히 위축되는 걸 어쩌겠는가? 그래서 오늘은 옷이라도 잘 차려입으면 기가 덜 죽을까 싶어서 집에서 가까운 거리지만 차려입고 나갔다. 가면서도 속으로

‘내가 갑이야, 내가 갑이야.’를 반복했다.(갑질은 내 생에 언감생심)


피부과가 건물 6층에 있어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 나 혼자였다. 흔히 있는 일. 그런데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덜커덕! … 덜커덕! 삐—삐—   

“잠시 이상이 생겼습니다. 인터폰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이상이 생겼습니다. 인터폰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덜커덕거리며 엘리베이터가 흔들렸을 때는 하마터면

“야, 장난치지 마!”

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곳에 나한테 장난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하필 엘리베이터 안에 나 혼자였다.


‘ ‘잠시’ 이상이 생겼다고? 잠시인 거 맞나? 어딜 눌러야 되지? 인터폰은 어디 있는 거지?’

인터폰을 찾아 눌렀는데 눌러진 건 맞는지, 그쪽에서 대답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삐— 삐— 잠시 이상이 생겼습니다. 인터폰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울리는 안내 소리에 묻혀 알 수가 없었다.


“덜커덕.”

지금 여기가 어딜까? 2층? 재빨리 2층 버튼을 눌렀다. 그다지도 천천히, 정말 내키지 않지만 겨우 입을 열어준다는 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우와, 탈출 성공! 십 년 감수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서 폐소 공포증으로 힘들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몰입해서 봤지만 그건 드라마고 오늘 일은 현실이었다.


'잠시'가 아니었다. 내가 집에 올 때까지 이 상태였다.


옆에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차마 탈 엄두가 나지 않아서 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데스크 직원들에게

“저기, 헥헥..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나가지고, 헥헥.. 인터폰 하라고 하고, 헥헥.. 2층에서 내려서 계단으로 올라왔는데, 헥헥.. 저거 아직도 안 고쳐진 것 같아요..”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해 헤매느라 시간이 조금 늦어지기도 한 데다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놀란 나머지 뛰다시피 계단을 올라왔더니 숨이 가빴다. 그래도 다른 손님이 타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다는 것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 방문하는 곳인데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혼자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아이고.. 놀라셨겠네요. 자~ 자~ 숨 좀 돌리시고…….”


나는 작은 상담실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아까 나를 진정시킨 직원이 따라와서 몇 가지 질문과 안내를 해 주셨다. 그러고 나서 매우 조심스럽게 물으셨다.

“저..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개인적인 질문? 당황스러웠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걱정되기도 하고…

“네!”

“혹시.. 00 중학교에서 근무하신 적 있으시죠?”

“네!”

“그때 선생님반, 선생님과 이름이 비슷한 00 기억하실까요? 제가 00 엄마입니다.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안 그래도 지난번 상담 전화 통화하면서 긴가 민가 했어요.”


학부모였다. 심지어 핸드폰에서 나와 그 아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나는 그 아이가 1학년 때 담임이었지만 졸업식 날 인사한다고 고맙게도 내 자리로 찾아와 준 덕분에 남길 수 있는 사진이었다. 마침 그때 나를 찾아와 준 학생들과 다 같이 찍었던 사진인데, 함께 찍힌 다른 학생의 소식도 전해 주셨다.

“이 아이는 이 사진 찍을 때는 서로 몰랐던 아이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희 앞집에 살더라고요. PD가 되고 싶다고 지금 한예종을 다니고 있어요.”

멋지다. 워낙 긍정적이고 밝았는데 스태프들과 아주 즐겁게 일하는 PD가 될 것 같다.


그분 따님 소식을 물었더니 고려대 의대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우와.. 고등학교 가서도 정말 공부 열심히 했나 보다. 그분은 내가 학부모 총회 때 했던 이야기까지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아이가 특목고 대신 일반고로 진학을 하는 데에도 많은 참고가 되었다고 하셨다. 앗, 중1 담임의 말이 그렇게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을 더 신중하게 해야겠다.


이후 원장실에 진료를 보러 갈 때에도,

“선생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하며 예의를 다해 안내해 주셨고, 진료가 끝나 집에 갈 때에는 손수 문을 열어 주시고, 문밖에까지 나와 배웅해 주셨다.

“선생님, 이거.”

내가 놀라자,

“원장님이 만드신 달력이에요. 손님들한테 드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라고 하시며 건네주셨다. 그래도 모든 손님들한테 다 주는 기념품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분뿐만 아니라 마취 크림 발라주시는 간호사님도,

“00 언니 따님 담임선생님이셨다면서요?”

라고 물으며 친근하게 대해 주셨다.

과거 학부모님, 현재 상담실장님이 챙겨주신 기념품


정말 감사했다. 지금은 담임도 아니고, 겨우 중학교 1학년 때 1년간 맡았던 선생님인 데다 내가 특별히 그 아이를 위해 뭔가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반가워해 주시고 호의를 베풀어 주시다니……. 그리고 사실, 조금 창피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그 마음도 알고 계신 듯했다. 이런 데서 아는 척하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반가워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나는 그저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옮길까..? ^^;)


저녁 시간에 그분은 내가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 아이도 내게 연락을 주었다. 오랜만에 연락하려면 정말 어색하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만큼 난감했을 텐데 용기를 내 준 그 아이가 참 고맙다. 중학생이던 그 아이의 눈빛과 목소리, 수줍고도 맑은 미소, 예쁜 글씨체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신기하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구나. 처음 가 보는 피부과에서 아는 분을 만나다니……. 그리고 이렇게 제자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니 반갑고 기쁘다.


어머님께서 주신 메시지
제자가 보내준 메시지


아이들한테 정말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를 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말이나 태도가 아이들과 학부모님께 영향을 많이 미치고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자세를 요구한다. 이 점이 이제는 교육학 이론이 아니라 내 일상을 통해 몸으로 느껴진다. 오늘, 그나마 나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분을 만나서 다행이지, 혹시 나에 대한 원망을 갖고 있는 분을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분의 불친절과 타박 속에 나는 죄인처럼 목을 집어넣고 있어야 했을 것이고, 내 얼굴의 무사도 보장받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아찔하다. 진짜 잘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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