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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편안함은 누군가 감수한 불편의 대가이다.

by 양만춘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가 얼마큼 감수한 불편의 대가이다.”

-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나의 편안함이 누구가가 감수한 불편의 대가임을 잊고 살거나, 알면서도 나의 편안함을 위해 남이 불편을 감수해 줄 것을 요구할 때가 있다. '이전에 내가 해 준 것이 있으니 이 정도는 상대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기대를 걸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섭섭해한다. 돌려받고자 친절을 베푼 것이 아니었음에도, 장사에 밑진 것처럼 헛헛함을 느끼고, '에이, 다음엔 잘해주지 말까 보다.'하는 속 좁고 유치한 결심이 선다.


인간관계에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이만큼 해 줬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가 그만큼 되돌려 주리란 법이 없다. 부모나 지인들로부터 내가 주는 것 이상을 받는 경우가 많고, 자식이나 후배에게 내가 받는 것 이상을 주곤 한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인간관계에서 균형의 추를 맞추고 손해 보지 않는 관계를 좇는다.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된 것 같으면 덜 사랑하는 사람과의 불평등, 격차가 발생한 것이 아프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톨스토이는 말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잘해 준다고 해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에게 잘해 주면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하는 의문이 들 만큼 나는 오히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좋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타인이 불편을 감수한 대가로 내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편안함을 위해선 내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편안함'에 그치지만, 후자에서는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아직 톨스토이의 말처럼 '잘해 주면서 그를 사랑하게 되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사랑하기 때문에 잘해 주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사랑을 강요할 순 없다. "내가 이만큼 널 사랑하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이만큼 너에게 잘해줬는데 너는 왜 그만큼 나에게 잘해주지 않느냐?"라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나의 편안함을 위해 상대가 불편을 겪어도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인간관계는 장사가 아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는 관계만을 추구한다면, 내 주변 사람들이 손해를 볼 것이다. 인간관계를 '관리'하면서 산다면, 내 주변 사람들은 '관리의 대상'이 될 뿐이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나를 열어 보여줄 수 있겠는가? 나는 점점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감염병의 유행으로 '거리 두기'라는 말이 우리 일상에 깊이 뿌리내렸다. '거리 두기'는 방역 상황에서 건강하고 안전한 생활을 위한 방법으로, '신체적 거리 두기'를 의미하지만, '심리적 거리 두기' 또한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으로 회자된다. 인간관계에서 거리를 둔다면 마음을 단속함으로써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아 상처받는 일을 줄일 수 있다. 대신, 거리를 멀리 둘수록 그 인간관계도 점차 무의미해질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를 이용하거나, 내게 함부로 대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난다. 나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당연히 그런 사람들과는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들과의 거리 두기에 앞서, 누구를 떠나보내고, 누구를 내 곁에 남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오래도록 내 곁에 남아 주기를 바란다면,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대는 안 하는 것이 좋다.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커지고, 실망이 클수록 인간관계에 위협이 된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받는 상대의 친절과 배려가 더 반갑고 기쁜 법이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 상대가 불편을 감수하지 않도록 하고, 언젠가 돌려받을 생각을 하며 나의 친절을 적립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에게 덜 기대하고, 내가 준 만큼 똑같이 받으려고 욕심내지 않는 것이 인간 관계에서 실망하지 않는 방법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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