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현실 세계가 더 거짓말 같고 극적이다. 우리 부모님은 동갑인데 서로 옆집에 살았다. 아빠와 엄마 성함의 끝자를 따서 각각 명이와 순이라고 하자. 명이 아버지는 아기 명이를 안고 이웃집에 놀러 가서 순이를 보고 "우리 며느릿감이구나." 하며 우스갯소리를 하셨다고 한다.
명이와 순이 모두 세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었다. 제주 4.3 사건 때문이었다. 옷도 잘 챙겨 입지 않고 흙장난을 하며 신랑각시 놀이를 하던 명이와 순이는 실제로 신랑 각시가 됐다. 손잡고 초등학교에 같이 다니던 두 아이가 팔짱 끼고 결혼식 하던 날, 신랑 신부 양쪽 집을 다 방문하는 제주도 풍습에 따르기 위해 옆집 사이를 오갔다. 마침 비 때문에 흙길이 다니기 불편해서 두 집 사이에 있던 돌담을 허물었다고 한다.
명이와 순이는 어부와 해녀로 생계를 이은 적도 잠시 있지만, 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과수원을 오간다. 명이의 친구이자 순이의 친구들은 지금도 한 동네에 같이 산다. 나고 자란 곳을 지키며 사는 두 사람과 그의 친구들은 마치 나무들처럼 마을을 이루고 있다. 명이와 순이는 소나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한 번은 과수원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은 적이 있는데 그때 명이가 전화로 "큰 소나무가 있는 밭" 이라고 했을 때 식당에서 어디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철 푸르른 그 큰 소나무 아래에는 사철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 여름 더위를 식힐 때는 물론이고 겨울에도 육지에 비해 춥지 않은 제주도에서 농사일을 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쉴 곳으로는 그 소나무 아래가 제격이다. 소나무는 씨앗이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도록 가지 제일 높은 곳에 열매를 맺고는, 바람이 세게 부는 날 미련 없이 씨앗을 날려 보낸다고 한다. 씨앗을 감싸고 있는 배젖은 싹이 제대로 틀 때까지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으로 먼 길 떠나는 씨앗에게 어미나무가 챙겨주는 도시락인 셈이다(우종영,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그렇게 순이 아이인 나는 멀리 섬 밖에 나와서 살고 있다. 이따금 큰 소나무 그늘을 그리워하면서, 아직 그 나무가 거기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음에 안도하면서…….
순이는 명이보다 겨우 두 달 먼저 태어났지만, 두 살 아니 그보다 훨씬 먼저 태어난 사람처럼 강하고 성숙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명이의 가슴에는 상처였고,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명이는 집 밖으로 도는 시간이 많았고, 한밤중에도 손님들을 집에 데리고 왔다. 순이는 명이 밥을 쇠 그릇에 담뿍 담아 이불 틈에 끼워 두었고, 자다가도 손님이 오면 일어나서 커피를 끓였다.
자식들이 다 커서 집을 떠나자 순이는 혼자 먹는 저녁이 늘었지만 변함없이 명이를 기다린다. 순이는 '삼세끼'(은퇴 후 삼시 세끼 식사를 집에서 챙겨 먹는 남편을 욕하는 말)를 알지 못하고, 한 병원에서 남편을 함부로 대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명이가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다행히 명이는 지금도 건강하다), 순이는 주위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아빠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시냐"라는 자식들의 불평에도 순이는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지 않냐!"며 명이 편을 든다. '어떻게 저렇게 위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순이는 명이를 아낀다. 명이는 이웃집 순이와 지금껏 한 집에 산다. 순이는 명이가 전부다. 명이도 실은 순이가 있어서 기가 산다. 46년생 개띠, 순이 말마따나 순이는 집개, 명이는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수캐. 풀어 놓은 개도 돌아갈 집이 있고 사랑받아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것처럼 명이도 순이가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는 집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순이는 본인 아픈 것보다 명이 밥 챙겨줘야 된다며 퇴원을 앞당기려고 했다. 명이가 아프면 순이가 옆에서 간호하지만 순이가 아프면 명이가 옆에서 간호하지 않는 상황이 자식 눈에는 이해가 안 되지만 순이 눈에는 이상할 것이 없다. 순이는 명이를 위해 밥을 짓고 명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그저 좋을 뿐인지…….
명이와 순이. 동갑내기 소꿉친구. 말도 떼기 전 이미 부부로 점쳐진(?) 사이. 명이가 수캐라면 순이는 집개가 돼서 따뜻하게 명이를 기다려주고, 두 사람이 소나무라면 순이가 든든한 뿌리와 몸통이 돼서 명이가 줄기처럼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게 해 주는 사이. 서로에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사이. 아픈 역사를 거치며 같은 시기에 아버지를 잃고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준 두 사람. 햇살 비추는 마당에서 3월생 아기와 5월생 아기를 각각 품에 안고 웃음을 나누었을 두 아버지가 눈 감는 순간까지 눈에 담고 싶었을 그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