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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Sep 03. 2020

힘 빼고 안단테

나에게 글쓰기란

누군가에겐 글쓰기가 밥숟가락이겠지만, 나에겐 글쓰기가 지팡이와 벤치이다. 내가 글을 한 편 쓴다고 돈 한 푼 들어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글쓰기는 내게 밥벌이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글쓰기는 때로 내 두 발로 온전히 서 있기 힘들거나 걸음을 옮기기 힘들 때 마음 의지할 것이 되어 주고, 잠시 앉아 쉬며  돌리는 시간을 준다.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매일 오랜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서 창작의 고통을 견디며 정수를 뽑아내는 데 반해 나는 아무 때고 마음 내킬 때 쓴다. 전업 작가들이 보기엔 한량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나는 메모도 종종 거른다. <완벽한 날들>의 저자 메리 올리버는 산책할 때 늘 노트를 지니고 다니며 시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노트에 적었다고 한다. 펜이 없어서 낭패를 보았던 적이 있어서 숲의 나무들에 펜을 숨겨 놓기도 했다고 한다. 내 핸드폰에는 펜까지 달려 있으니 굳이 숲의 나무들에 펜을 숨겨 놓을 필요도 없지만, 손안에 있는 펜도 잘 꺼내지 않는다.


생각은 꼭 붙들고 어딘가 담아두지 않으면 깃털처럼 흩어져 버린다. 쓰고 싶은 내용이나 표현이 생각났다가도 기록을 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책상에 앉아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다. 다만 뭔가 쓰고 싶었다는 흔적만 어렴풋이 남을 뿐....   예전에는 아쉬움이 컸다. 시간이나 여건을 핑계로 나중으로 미루다 순간을 놓쳤다는 생각에 값비싼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린 것처럼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젠 이런 생각을 한다. 나중까지 기억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는 없었던 거라고... 자기 위안이고 변명인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은 이 기조*를 유지할 것 같다.(‘기조’라는 단어에는 여러 뜻이 있지만이 글에서는 ‘한 악곡 전체의 중심이 되는 가락’이라는 뜻이 어울릴 것 같다.)


나는 힘을 빼고 글을 쓰고 싶다. 글쓰기가 힘겨운 노동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글쓰기도 잘해보려고 두 주먹 불끈 쥔다면 내 삶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갈 것 같다. 김종원은 <인문학적 성장을 위한 8개의 질문>에서

"커피와 돈, 공간과 시간, 지식을 버리며 나는 글을 얻는다. 당신은 매일 무엇을 버리는가?"

라고 물었다. 하지만 난 글을 얻기 위해 버리는 것이 없다. 오히려 글을 쓰면서 마음에 위안과 평화를 얻기 때문에 가족들이 잠든 새벽에 홀로 깨어 글을 쓴다.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이스라엘 작가 데이비드 그로스만(David Grossman)은 "문학은, 그것이 정말 훌륭하다면, 독자들에게 내적 공간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런데 내게 글쓰기는 그것이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나의 내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길을 터 준다. 그러고 나서 불청객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서 잔뜩 어지러워진 마음의 방에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한다. 마법에 걸린 방처럼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물건들을 잡아서  각각 자리 배치를 하고 나면 비로소 복잡하고 어수선하던 마음의 방에도 여유 공간이 생긴다. 그래서 내게 글쓰기는 혼란스러운 내 마음의 질서를 잡아 주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소설가 안드레아스 알트만(Andreas Altman)언어를 '내 상처 위에 바르는 연고'라고 하였다. 심리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두 개의 '나'가 있음을 느낀다. 겉으로 행동하는 '나'와 내면의 방 안에 머무는 '나'. 내면의 '나'는 쉽게 상처 받는다. 그런데 표면의 '나'는 종종 내면의 '나'를 잊거나 잘 돌보지 않는다. 심지어 쉽게 내면의 '나'를 꾸짖고 책임을 묻기도 한다.
"넌 왜 이 모양이냐?"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냐?"
라는 말을 들으며 내면의 '나'는 자꾸만 작아지고 움츠러든다. 안 그래도 작은 내면의 방에서 더 구석을 찾아 웅크리고 앉아 있다. 피를 뚝뚝 흘리며....
내게 글쓰기는 두 개의 '나'가 만나는 면회 시간이다. 내면의 '나'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살펴보고 연고를 발라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서로 따뜻한 악수를 나눈다. 내면의 '나'의 움츠렸던 어깨를 펴 주고 미소를 짓게 한다.

내가 어릴 때, 당시 남자 청소년 사이에서는 오토바이가 유행이었다. 오토바이 뒤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도로를 질주하는 것을 제일 폼 나는 일로 여겼다. 그런데 한 번은 뒤에 여자 친구를 태운 채로 너무 빨리 출발해서 달리다 보니 뒤에 타고 있던 여자 친구가 떨어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남자는 오토바이의 굉음과 속도에 취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한참을 달렸다. 그때 남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기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폼 난다고 여겨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마침내 자신의 뒤에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여자 친구가 없는 걸 보았을 때 그는 얼마나 당혹스럽고 허탈했을까? 멋있다고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한없이 바보 같고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대신, 달구지를 끌고 오솔길을 가더라도 둘이 같이 가야 한다. 앞만 보며 빠른 속도로 내달리느라 소중한 나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도 모른 채 살다가 뒤늦게 후회하고 허망해하느니, 느리더라도 서로를 살피며 행복하게 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내게 글쓰기는 오솔길로 접어드는 것이며, 달구지를 끄는 것이다. 힘들어하는 내면의 '나'를 달구지에 태워주고 위로하며 걷는 일이다. 훈련된 전문 작가들이야 달구지를 끌고서도 마라토너처럼 뛸 수 있지만, 나는 아직 달구지를 끄는 일도 서툴고, 길도 잘 찾지 못해 때때로 엉뚱한 곳에 가서 멍하니 서 있곤 한다.


내가 걷는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출간 작가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글쓰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면 누군가는 "절실하게 절실하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여울 작가는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야망이나 적극성이 아니라 완연한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몸짓”이라고 했다. 앞으로 언제까지, 얼마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 내가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시간이 주는 매력과 즐거움은 앞으로 한동안 나를 계속 소요하게 할 것 같다. 힘 빼고 안단테로...


(소요하다: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니다.

안단테: 악보에서 느리게 연주하라는 말. 걷는 정도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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