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만춘 Sep 03. 2020

세뇌는 언제나 세뇌당하는 사람 모르게 이뤄진다.

생각의 성벽 밖으로

"우리는 하는 일이나 믿는 바에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다가 누군가 왜냐고 물으면 그냥이라거나 잘 모르겠다는 말을 웅얼거린다. 이미 특정한 생각을 믿고 따르게 되는 세뇌를 당한 꼴이다. 세뇌는 언제나 세뇌당하는 사람 모르게 이뤄진다."       -이인, <생각을 세우는 생각들>

                          


"아, 진짜. 이젠 나한테 생각까지 하래!"
사교육과 숙제에 지친 한 남학생이 토론을 할 때 내뱉은 말이다. 그 아이의 고충이 이해되면서도 '우리 교육 현실이 이 지경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AI'니 '딥러닝'이니 하며 기계가 우리를 바짝 뒤쫓고 있지만, 그래도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은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능력이 아닌가? 교육의 본질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인데 '생각까지' 하란다며 학생이 통탄해하는 이 현실이야말로 통탄할 일이다.

수업 중 아이들의 생각을 물으면 대답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고만고만하다. 어떤 활동을 하고 난 후의 아이들의 감상도 대부분 재미있었거나, 유익했거나, 다음에 이런 활동을 또 해 보고 싶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책을 읽고 나서도 생각이 비슷하다. 여러 명이 각자 읽은 것이 많나 싶게 다들 인상 깊고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그나마 자기 생각을 말하거나 쓰는 학생들이 이렇고, 그마저도 거부하는 학생들도 종종 있다. '생각하기'를 보이콧boycott 한다는 느낌이 들 만큼, 그 아이들은 "몰라요", "그냥요"라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가로젓는 경우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쩌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는 아이들을 만나면 참 반갑다. 눈이 커지고 귀가 쫑긋해진다. 그런 아이들의 생각은 나에게도 봄바람이고 나그네다. 그런 아이들을 통해 나 또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연세 드신 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가끔 답답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심지어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그분들의 성품이나 나에 대한 사랑과는 별도로, 그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견고한 생각의 성벽을 맞닥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라는 말은 그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씀 중 하나다. 상황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그래도" 변치 않는 자신들의 굳은 신념이 있으신 거다. 때로는, 세상의 거대한 변화 앞에 나약해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굳건한 성벽 안에 감추고(혹은 보호하고) 계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애처롭기도 하다.

나라고 다를까?
한때 내가 집착했던 '착함'이라는 것. 이인은 <생각을 세우는 생각들>에서
"착함은 길들여진 존재로서 하란 것을 충실히 하는 '노예'라는 표시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자유로운 존재는 얼마든지 기꺼이 착한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착한 사람은 행동을 자유로이 할 수 없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라는 말처럼 '착하다'라는 말에 익숙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 심지어 자신이 상처나 피해를 받고서도 상대방이 나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역으로 사과하기도 한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나는 그동안 수차례 해 왔다. 결코 자유롭지 않다. 세상의 규율에, 다른 사람의 시선에 길들여져서, 목줄이 없어도 집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고 그저 제자리를 맴도는 개처럼 스스로 구속된 삶을 택했던 것이다. 수동적인 생활은 생각을 가둔다.

게다가 나도 나이 들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내 성벽의 돌담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며 편협해지거나 고집스러워지는 것은 아닌지, 내 생각만 옳고 상대편은 틀리다는 생각이 점점 더 굳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 나를 위한 추천 뉴스라며 자동으로 올라오는 것들의 일관된 특징들을  보면서 한편 두렵기도 하다. '우리끼리' 뭉치고, 저쪽은 망하기를 은근히 바라게 된다.

"그래도"라는 말 대신, "그러면"이라는 말을 해 보자. 자신이 '신념'이라고 굳게 믿어 왔던 것이 사실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생각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주입되고 세뇌당한 생각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노예인 줄 모른다면 주인이 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생각의 노예가 생각의 주인이 될 수 있으려면 남의 생각만 비판할 것이 아니라, 내 생각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에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질문을 던져 봐야 한다. 나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내가 하는 말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으면 더럭 겁이 난다. 나도 틀릴 수 있는데 아이들이 들으면서 점검을 안 하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 버리는 것 같아서 '이게 틀린 이론이면 어떡하지?', '내가 잘못 설명하고 있는 건 아닌가?' 혼자 속으로 고민한다. 실제로 아이들이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던 내용을 나중에 틀렸다면서 다시 바로잡아줘야 할 때는 참 당혹스럽다.

낯선 말과 글은 생각의 성벽 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같다. 다양한 자극을 접하면 성벽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 수 있고, 그것들에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성벽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유연하되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동반사적인 '반응'으로서의 생각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을 세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힘 빼고 안단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