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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만춘 Sep 03. 2020

성장의 포물선을 그리다

정현종,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정현종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뛰어오르는 꼴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이 시에 대한 감상문을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쓰라고 하니, 많이 나온 이야기 중에 하나가 수학 문제 풀다가 힘들어서 포기할까 하다가 끝까지 풀었다는 이야기였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이 그동안 그래도 많이 힘들게 살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싶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경험이 부족하구나 싶어서 아쉽기도 했다.


수학 문제나 진로 문제로 인한 고민 얘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한 학생이 교우 관계의 어려움을 겪으며 세상을 향한 문을 닫아걸고 싶을 만큼 자신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내용을 진솔하게 쓴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평가 후 이름을 확인해 보니(평가할 때는  이름을 가리고 한다) 그 학생은 평소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지 않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의 글은 매우 실감 나고 진솔했으며, 대동소이한 글감으로 쥐어짠 것 같은 글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혼자만의 외롭고 힘든 시간을 겪고 다시 힘을 내는 그 학생의 모습을 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학생은 교과서에서 또는 수업 시간에 가르쳐 주지 않는 값진 경험을 했고 꼭 필요한 배움을 얻었다는 것, 그만큼 속이 영글고 더 성장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 없이 그저 남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다 보면 머지않아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와 조종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미 지금도 페이스북, 유튜브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내가 좋아할 만한 뉴스, 영상, 책을 추천해 주는 것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나 자신이 분석되고 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취향까지도 알아버린다면 나는 어느 날에는 그들이 추천하는 상품을 소비하고 문화생활을 하고, 심지어 그들이 짜놓은 여정 대로 여행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선택을 고민할 필요가 줄어드니 분명 ‘편리’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오롯이 ‘나’인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인가? 맞춤형 옷을 입고, 맞춤형 헤어스타일을 한 나는 맞춤형 집에 살며 맞춤형 책과 뉴스를 보며 점차 나의 생각도 어느새 ‘맞춤형’이 되어 갈지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위에 언급한 저 학생이 친구와의 관계에서 ‘상처’ 받고 힘들어하며 자기 자신과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것이 오히려 좋아 보인다. 그 자체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럴 시간에 영어 단어를 하나 더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하나 더 풀어! 그게 너한테 남는 거야.”라는 말, 앞으로는 맞는 말이 될까?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거나 수학 문제 하나 더 푸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이 앞으로는 더 ‘남는’ 것이 될지 모른다. 정여울은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에서

"상처를 극복하는 내면의 힘은 자신도 모르는 면역력처럼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단련되어온 회복탄력성이다. "

라고 했다. 급변하는 시대를 사는 아이들에게는 회복탄력성의 단련이 필요해 보인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어른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나 역시 동의한다. 물론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도와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과 지금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질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누구도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단언할 수 없는 세상이다. 유발 하라리는  어른들 자신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교사도 예외가 아니다. 옛날식 교육 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불안한 것도 사실이고, 심지어 두렵기도 하다. ‘변화만이 유일한 상수’라는 미래의 일을 예측할 수 없으니 대응 방안의 정답지도 없다.  

그럼에도 ‘최선’은 아닐지 모르나 ‘차선’의 방법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을 계속하는 자세와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자신을 아는 것, 그래서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 것이다. 아이들이 훗날 세상에 나갔을 때 외롭게 세찬 바람 맞으며 막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이상 세상살이의 정답이 되는 길을 가르쳐 줄 스승은 될 수 없겠지만 최소한 아이들이 헤치며 찾아나갈 길 입구의 덤불이라도 좀 치워주고 싶다. 자기 생각을 키울 수 있도록,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와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방법이 아닐까 싶다.


© kevinmueller,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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