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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시일 Aug 24. 2024

소설: 너의 뒤에서 #2

#2 운명의 그녀

2. 운명의 그녀

2028년 가을, S대기업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대회의실.


대형 스크린에 "신입사원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회의실은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46명의 신입사원들은 앞날의 기대감에 젖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이는 단연 이예지였다.


이예지는 신입사원 중 수석으로 입사한 만큼, 모든 시험과 면접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주목받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마치 연예인처럼 눈 부셨고, 그 미모와 당당한 태도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와 반대로, 회의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김민철은 작은 키에 수줍음을 많이 타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검은 안경테에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말수 적은 그의 모습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누구보다 큰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민철은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하게 걸어온 길. 친구들이 너드남이라 놀릴 때도, 사랑을 사치라고 여기면서, 그는 꿈을 향해 달려왔다. 그 순간, 민철은 갑자기 급해진 소변을 참지 못하고 허둥지둥 화장실로 뛰어갔다.


민철은 소변을 보면서도 중얼중얼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할 수 있어.' 그렇게 소변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대형 스크린의 화면아래 한 여성이 통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민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에 들어온 여성은 다름 아닌 이예지였다.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넘기며 차분하게 통화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민철은 그 순간,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화에서 늘 첫눈에 반하면 모든 것이 느려지게 표현하는데, 민철은 늘 이렇게 표현되는 연출에 불만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구상의 빛은 오직 두사람만 비추고 있었으며, 민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귀속으로 들려오는 본인의 심장박동 소리에 민철은 그만 핸드폰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 내 핸드폰…”

핸드폰을 줍고는 그녀를 다시 보기위해 민철의 눈동자는 그녀를 찾느라 바빴다.

'이예지...' 그녀의 이름이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녀가 통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민철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코를 비비며 교육실로 급하게 들어갔다. 고개는 돌렸으나 그녀의 얼굴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연수원에서의 첫날, 민철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분주했다. 프로그램은 빡빡했고, 다양한 교육과 활동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계속해서 이예지를 향했다. 그녀는 모든 활동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를 독차지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민철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예지가 다가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기 앉아도 될까요?"


민철은 깜짝 놀라며 코를 만지며 말했다. "아, 네! 물론입니다."


"김민철 씨 맞죠? 저희 같은 조였어요, 기억하시죠?" 이예지는 웃으며 말했다.


"네, 기억해요. 이예지 씨. 발표도 정말 잘 하시던데요." 민철은 수줍게 대답했다.


예지의 따뜻한 미소에 민철은 긴장이 풀리며 편안함을 느꼈다. 둘은 식사를 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민철은 이예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꿈만 같았다. 그녀와의 대화는 그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고, 그는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다.


연수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팀별 프로젝트 발표가 있었다. 김민철은 연구개발 팀에서 기술적인 부분을 맡아 열심히 준비했다. 발표 후, 이예지가 그에게 다가왔다.


"민철 씨, 발표 정말 잘 들었어요. 기술적인 부분이 정말 인상 깊었어요!" 이예지가 칭찬했다.


민철은 얼굴이 다시 빨개지며 코를 만지며 말했다. "고마워요, 예지 씨. 예지 씨도 정말 대단해요. 예지 씨의 아이디어는 늘 창의적인 것 같아요."


그날 이후로 민철은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예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항상 즐거웠고, 민철은 그녀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예지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행복했다.


연수 프로그램이 끝난 후, 신입사원들은 각자의 부서로 배치되었다. 김민철은 연구개발부서에, 이예지는 마케팅부서에 배치되었다. 두 사람은 회사 식당에서 가끔 마주쳤고, 서로의 근황을 묻곤 했다.


어느 날, 회사의 대규모 프로젝트 발표회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회사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행사였고, 회사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었다. 각 부서의 대표들이 프로젝트를 준비했고, 마케팅부서의 신입사원 대표로 이예지가, 연구개발부서의 신입사원 대표로 김민철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예지는 발표 준비를 하며 고민에 빠졌다. 이번 프로젝트는 새로운 제품의 개발과 마케팅 전략을 동시에 다루어야 했는데, 그녀의 팀은 기술적인 부분에서 약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김민철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떠올렸다. 그는 연수원 시절에 보여준 탁월한 기술력으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았었다.


결국 이예지는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민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예지: "민철 씨, 혹시 퇴근 후에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민철은 그녀의 메시지를 받고 놀라면서도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김민철: "물론이죠, 예지 씨. 어디서 만날까요?"

그들은 회사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김민철은 그녀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카페에 도착했고, 그녀는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철 씨, 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 이예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이에요?" 민철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예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우리 마케팅 팀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 그런데 기술적인 부분에서 도움이 필요하더라고요. 민철 씨가 그 부분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해서요."


김민철은 그녀의 요청에 놀랐지만, 동시에 그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꼈다. "물론이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드릴 게요."


"정말 고마워요, 민철 씨. 민철 씨를 알고 있어서 천만 다행이에요." 이예지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민철은 그녀의 따뜻한 손길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필요로 하고, 칭찬까지 해주는 상황에 그는 잠시 착각에 빠졌다. '혹시 이예지도 나에게 호감이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프로젝트 준비 기간 동안, 민철은 밤을 새워가며 이예지의 팀에 참여하여 기술적인 부분을 도왔다. 이예지는 그의 실력을 적극적으로 칭찬하며 그를 격려했다. 민철은 이예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녀와 함께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동안 그녀에게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민철은 밤마다 찾아보던 야동은 이제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저 이예지의 모습을 상상하며 환상과 현실을 오갔다. 


민철은 점점 그녀와의 시간이 늘어날수록 자신이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녀의 칭찬과 격려는 그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는 그녀의 인정과 관심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철은 우연히 회사의 회의실 근처를 지나가다 이예지와 박찬희 과장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박찬희 과장은 마케팅 부서에서 잘생기고 키 크고 능력 있는 인물로 유명했다.


이예지는 박찬희 과장에게 밝고 친절하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과장님,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장님 덕분에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예지가 말했다.


"예지 씨가 잘해서 그런 거죠. 앞으로도 함께 더 좋은 성과 만들어봐요." 박과장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김민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예지가 자신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고 착각했던 것이었고, 그녀가 박찬희 과장에게도 비슷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그는 이예지가 자신을 단순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용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그래 사람이 도움이 필요하면 그럴 수도 있지… 오히려 내가 더 도움이 되면 더 좋아하지 않을까?”생각하며 민철 스스로를 다독였다. 

프로젝트가 끝난 후, 김민철은 이예지에게 여러 번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에게서 답장은 점점 느려졌다. 결국 어느 날부터는 그녀의 답장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예지 씨, 잘 지내요? 지난번에 문자 보냈는데 답장이 없어서… 바쁘면 바쁘다고 하면 될 것을, 답장도 안 하면 제가 기다리잖아요.”


그렇게 문자를 보낸 후 민철은 몇 시간 동안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마치 메말라가는 식물이 물 한 방울 기다리듯 그녀의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답장은 간단한 글자 몇 개 뿐이었다. 


“민철 씨! 아! 미안해요! 제가 그때 정신이 없어서 답장한다는 게… 정말 미안해요. 잘 지내죠? 요즘 너무 정신이 없네요. 늘 건승하시길 바래요^^.”


민철은 그 메시지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언제 시간되면 커피 한잔해요.” 하지만 이예지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민철은 모든 순간이 혼란스러웠다. 이예지가 자신에게 웃음을 보이고, 때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 순간들이 단지 그가 착각에 빠졌던 환상일 뿐이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녀의 눈길이 박찬희 과장을 향하는 것을 보았을 때, 민철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아픔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그저 일시적인 관심의 대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민철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사랑은 순수했지만, 그 순수함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졌다.


민철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모자란 걸까? 나는 왜 선택 받지 못했을까?'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괴감이 쏟아졌고, 그와 동시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슬픔이 밀려왔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내가 사랑한 건 그녀였을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그녀의 환상이었을까?'


그리움과 좌절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 자신의 모습조차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민철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공감보다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줬다. 친구의 조언이 그리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생전 술도 잘 마시지 않던 민철은 회사 회식 날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식당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다음 날, 민철은 일어나지 못했다. 팀 선배의 부재중 전화가 9통이 있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이제 일어 났습니다.”

“민철씨! 지금 제정신이에요? 어제 혼자 술마셨어요? 민철씨만 오늘 출근 안했어요. 빨리 준비해서 오세요!”

민철은 밀려오는 숙취에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이에 선배에게 죄송하지만 오후에 출근하기로 양해를 구했다. 

숙취가 풀리지 않아 점심도 먹지 못하고, 사무실 근처 서점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서점 구석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멀리서 이예지와 박찬희 과장이 함께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민철은 얼굴이 빨개지며 보이지 않는 서점의 책장 코너로 숨었다. 그러나 그 두 사람도 사람이 없는 곳을 찾고 있었다.


이예지와 박찬희 과장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스릴을 느끼며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민철은 책과 책 사이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민철은 분노하며 생각했다. '왜 나는 이런 존재인가? 왜 이예지는 박과장을 택할 수밖에 없는가? 왜 나는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는가? 나는! 왜! 벌레같이 사는가?' 갑자기 그의 생각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며, **“왜!”**라고 크게 외치고 서점에서 도망쳤다.


누가 소리쳤는지 알아보지 못한 이예지와 박과장은 서로 눈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렸다.


민철은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3일간 회사에 병가를 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집에 틀어박혀 유튜브 검색창에 "못생긴 유전자"라고 검색했다. 매력적인 남성이 되는 방법에 관한 영상들로 가득했다. 그러다 민철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 하나가 있었다. 바로 여성의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영상이었다.



동영상을 클릭하자,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남성 여러분! 아직도 여성 유전자를 모르면서 여성을 마음을 사로잡겠다고요? 제 동영상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내용을 기반으로, 아주 과학적으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소개해 드립니다!"


민철은 혹시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예지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영상을 끝까지 보았다. 그리고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유전자와 인간 본성에 관한 서적들을 대량 구매하여 읽기 시작했다. 하루에 4시간만 자며 책을 읽었다.


그렇게 병가 3일을 인간 본성에 관한 책만 읽고 새벽을 맞았다. 그러나 이 새벽은 평상시와는 달랐다. 희망에 가득 찬 새벽 공기였다. 민철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으며, 그는 바로 컴퓨터를 켜고 문서 파일을 열어 사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아픔과 실망을 뒤로하고, 그는 자신만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있어 이 선택은 단순한 사직서 작성이 아닌, 삶의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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