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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05. 2016

102호 : 學校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101호 사람들이 기른 아이는 ‘학생 1’이 되었다. 학생 1은 자신이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해지고 싶었고, 특별해지려면 일찍 죽어야 했다. 자신에게는 하늘이 내린 재주 따위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망설였지만 그래도 일찍 죽는 것 말고 특별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학생 1은 커터칼에 대한 집착을 서툰 연애와 허섭한 연애소설과 톡, 치면 웁, 하고 눈물 터뜨리게 만드는 것들━학생 1은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주인공이 울면 아무 맥락 없어도 따라 울었다━과 판타지 소설 습작으로 지워가며 사춘기를 버텼다. 학생 1은 스무 살이 되면 마음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줄 알았고, 무엇이 되든 무엇보다 잘 될 수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스무 살만 기다리며 죽는 일도 미뤄두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스무 살 보다 조금 먼저 밀레니엄이 찾아왔을 때 학생 1은 무너지지 않는 세상을 보며 제 환상을 무너뜨렸다. 더 이상 스무 살을 기다리지 않게 된 학생 1은 밀레니엄 다음 해에 운 좋게도 102호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학생 1이 바라던 죽음도 유예되었다.


102호는 단정하다는 인상을 준다. 학생 1이 102호를 설명하는 할 수 있는 수식은 그것뿐이다. ‘얌전하고 바르다’는 것이 좋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부터 더더욱, 학생 1은 102호의 바라보는 사람들*이 단정하다고 느낀다. 그 반듯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학생 1은 밖으로 돌았다. 이상한 것은 학생 1이 밖으로 나돌면서도 꼭 102호 사람들 중 한 사람과 동행하곤 했다는 것이다. 102호 사람들도 학생 1과 함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학생 1도 102호 사람들도 그 소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어쨌든 아르바이트를 갈 때도, 학교 근처 술집에 갈 때도, 102호 사람들과 학생 1은 함께였다. 그들이 학생 1과 같이 다니면서 한 일은 ‘동행’ 뿐이었다. 잔소리하지 않았고 다그치거나 몰아세우지 않았으며 칭찬이나 위로 같은 것도 하지 않았다. 학생 1이 노교수가 교재만 보며 강의할 때 강의실 창문을 넘어 수업에서 도망치거나, 학부 건물 입구에 놓여 있던 소파━아무도 그 소파가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고, 그 소파가 비와 바람과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에 늘어져 있거나, 소파 아래 계단참에서 술을 마시거나, 고백한 남자애에게 차여 동아리실 구석에서 울고 있거나, 강의실에서 술을 마시거나, 컴퓨터실에서 과제 대신 게임을 하고 있거나, 수업시간에 학교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시거나, 합법적으로(?) 집에 늦게 들어가려고 늘 집과 먼 곳에서만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말없이 학생 1을 바라보았다. 그 맹숭맹숭한 바라봄은 학생 1의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맛과 향이 바뀌었는데, 대개 씁쓸한 맛과 매운 향이 나서 학생 1이 그들의 시선에 제 감정을 섞는 일도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102호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투명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시선은 학생 1이 더 이상 그들과 동행하지 않게 된 후로도 102호 사람들이 방 한 칸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지 싶다. 학생 1이 여자가 된 후로 102호 사람들은 동행을 그만두었고 지금까지 붙박이 가구처럼 지내고 있다.


102호에는 ‘바라보는 사람들’과 함께 참새*가 한 마리 살고 있다. 학생 1이 어려서부터 기르던 참새다. 참새는 굉장히 똑똑해서 쌀알로 글자를 쓸 줄 알았고, 조그만 날개로 매처럼 기류를 타고날 줄도 알았다. 날기에 대한 집념은 이국(異國)의 갈매기도 만만치 않았지만 학생 1은 참새가 더 좋았다. 꿈과 모험이라는 단어가 꼭 어울리는 참새였다. 맙소사, 학생 1에게도 없던 꿈과 모험을 손바닥보다 작은 참새가 갖고 있었다. 학생 1은 참새를 만날 때면 왕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라를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어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대신 참새에게 모험을 권하고, 몇 달 혹은 몇 년 만에 돌아온 참새가 밤마다 풀어 보이는 이야기보따리에서 꿈을 만나는 왕. 틈날 때마다 참새가 지저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학생 1은 기특한 참새에게 비단옷은 아니지만 가장 예쁜 옷을 지어 입히고, 기사 작위만큼이나 뿌듯해할 만한 이름표도 달아 주었다. 입안에 혀처럼 굴던 참새는 어느 날인가부터 더 이상 지저귀지 않았다. 학생 1도 더 이상 참새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생 1의 유년은 끊어지듯 끝났고 기대어 쉴 곳은 땅이 꺼지듯 사라졌다.


백수동 35번지에는 유난히 중이 많다. 여자의 종교는 ‘굳이 따지자면’ 천주교였지만 신부보다 중을 더 자주 만났다, 고 하기에는 절을 만난 것이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여자의 할머니도 천주교 신자였지만 절을 좋아해 바캉스 철이면 어디를 가든 꼭 절에 들르곤 했다. 그러한 연유로 여자는 지금도 성당보다 절을 더 좋아한다. 성당보다는 절에 오감을 자극하는 것들이 더 많았고, 성당이 의무라면 절은 누리는 곳이었으니 성당보다 절에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부보다 중과의 교류가 더 많아질 밖에.

첫 번째 스님*은 35번지에 가장 먼저 입주한 분이다. 어쩌다가 모셔오게 됐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집집마다 스님 모시기 열풍이 일기는 했었다. 고명한 스님을 집안에 모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던가, 뭐 그래서 덩달아 모셔왔을 것이다. 시원한 보리차랍시고 맥주를 권해 보려다 무의미한 일이다 싶어서 ━닳고 닳아 식상하지도 않을 장난이지 싶어서━ 그냥 녹차 티백을 우려 대접하고 말씀을 들었다. 스님은 살아온 이야기,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고개를 끄덕일만한 것도 부질없다 싶은 것도 학생 1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어쩌면 학생 1이 ‘어서 빨리 다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바라기 시작한 것은 그 만남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불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깨달음의 순간이라도 만난 듯 학생 1은 그 뒤로 스님이 묵는 방을 찾지 않았다.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귀 기울여 담아두려도 담아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더 많았고, 학생 1의 마음은 스님의 말씀을 담아둘 수 있을 만큼 비어있지 않았다. 


사촌 동생*은 방치되어 있다. 그 애를 방치한 것은 여자의 질투였다. 두 살 터울 아래의 사촌 동생은 똑똑하고 영리하고 제 앞가림도 잘해서 큰 외숙모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어려서는 명절이나 외할머니 생신마다 만나 그 애는 물론 다른 사촌 동생들과 그 흔한 드잡이 한 번 없이 놀았다. 사춘기가 지나면서 친척들과 만나는 일도 없다시피 했고, 그렇다고 따로 소식을 주고받는 살가운 조카도 손녀도 사촌도 못되어서 사촌 동생들이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고 그렇기 지내기만을 바랐는데, 어느 날 덜컥 연락이 왔다. 책을 내겠다는 것이었다. 원고를 봐달라고, 출판 과정은 어떠하냐고 물어왔다. 평소 산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는 이유보다 세상 곳곳을 누빈 그 애의 시간이, ‘변변치 못한 문장’이 무려 ‘서점에 깔린다’는 게 샘이나 견딜 수 없었다. ‘변변치 못한 문장’이라는 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폄하했고, 별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산문이라고 깔보았다. 그래 놓고는 깔보았던 것을 감추려고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 애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내는 동안 여자의 손가락은 자꾸 허방을 디뎠다. 갈피 잡지 못하는 손가락 때문에, 여자는 애써 무시했던 질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책이 도착하고, 큰 외숙모의 자랑 가득한 전화를 받고, 그리고 그 이후로도 책은 한 번도 펼치지 않았다. 그래도 내치지 않은 건 손에 쥐고 어찌할 줄 모르던 시샘 때문이다. 그때 그 시샘은 내려놓은 지 오래지만 그때 그 감정을 오래 두고 기억하고 싶었다. 도움이 되는 질투와 스스로를, 혹은 다른 사람까지 망가뜨리는 질투인 지구 분할 필요가 있었다. ‘경계’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그래서, 여전히 사촌 동생을 백수동 35번지에 머물게 하고 있다.


여자는 단순히 허영 때문에 집에 허씨*를 들였다. 여자는 돈이 없었고, 돈이 없을 때는 지출을 줄였어야 했지만 돈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으므로, 여자는 어떡하든 돈을 써야 했다. 그때 만난 사람이 허씨다. 허씨는 여자에게 좋은 장식품이었다. 여자를 돋보이게 해줄 것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허씨는 덩치가 컸고, 아는 것이 많았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허씨는 여자를 돋보이게 해줄 수 있었고, 그 두 가지만으로도 여자는 허씨가 좋았다. 불면 날아가고 쥐면 꺼져 버리는 여자의 감정은 굳이 입김을 불지 않았어도, 손바닥을 오므리지 않았어도 이내 스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허씨는 혼자서 바래고 있는 중이다.



102호 사람들

바라보는 사람들 1 : 문학개론 / 구인환·구창환/ 도서출판 삼지원 / 1판 16쇄 2001년 3월 26일/ 18,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2 : 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외 / 문예출판사 / 개역판 14쇄 2000년 10월 10일/ 8,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3 : 한국 현대시의 사적 탐구 / 김재홍 / 일지사 / 1쇄 1998년 9월 5일 / 15,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4 : 한국문학 강의 / 조동일 외 6인 공저 / 길벗 / 초판 9쇄 2001년 3월 12일 / 12,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5 : 현대 교양인을 위한 언어와 사회 / 최기호 김미형/ 한국문화사 / 개정쇄 2000년 2월 25일 / 10,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6 : 시 창작 이론과 실재 / 오세영 외 / 시와 시학사 / 1판 3쇄 2000년 9월 15일/ 13,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7 : 네오-헬리콘 시학 / 윤호병 / 현대미학사 / 초판 2004년 4월 20일/ 20,000원 / 사진

바라보는 사람들 8 : 한국문학사 / 김윤식·김현/ 민음사 / 개정판 8쇄 2001년 9월 1일 / 15,000원 / 사진

바라보는 사람들 9 : 비교문학 / 윤호병 / 민음사 / 개정판 2쇄 2002년 3월 15일/ 20,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10 : 미학의 기본 개념사 / W. 타타르키비츠 / 도서출판미술문화 / 초판 3쇄 2001년 9월 20일 / 12,000원

바라보는 사람들 11 : 현대사상의 모험 / 타케다 세이지 / 도서출판 우석 / 초판 1쇄 1996년 2월 29일 / 7,000원

참새 : 아기 참새 찌꾸 / 곽재구 / 국민서관/ 1판 6쇄 1992년 12월 5일 / 8,500원

첫 번째 스님 : 산에는 꽃이 피네 / 법정(류시화 엮음) / 동쪽나라 / 2판 15쇄 1999년 1월 7일 / 7,000원

사촌 동생 : 나, 지금 여기에 있어 / 신미항 / 파피루스북 / 1판 2012년 7월 7일 / 13,000원

허씨 : 철학의 책 / 윌 버킹엄 외 /지식갤러리 / 초판 1쇄 2011년 6월 15일/ 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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