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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20. 2016

103호 : 雜誌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103호에는 문 역할을 하는 커다란 시계가 있다. 딱히 걸어둘 곳이 마땅치 않았고, 걸지 않으면 바닥에 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잘 보이는 바닥에 두어야 했는데 103호 앞에 맞춤했다. 시계는 동그랗고 초침 움직이는 소리가 제법 크다. 어쩌다 바람소리도 없이 조용할 때면 째깍째깍 초침 소리가 온 건물을 울릴 정도다. 건물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고양이 두 마리가 저희끼리 '우다다' 하느라 시계를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시계는 대개 조금 삐뚤어진 채로 103호의 문 노릇을 하고 있다. 문을 열듯 시계를 열고 들여다보면 103호는 좀 시끄러운 편이다.


103호에서 가장 역할을 하는 이는 선생 1*이다. 학생 1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 모셔온 선생 1을 소개해 준 것은 학생 1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국어 선생이었다. 그는 학생 1이 습작을 한다는 것에 관심을 보였고, 학생 1이 판타지 소설 습작━당시 고등학생들의 가슴을 두드린 것은 판타지였다. 이우혁이라든가, 이영도라든가, 이우혁과 이영도 같은 작가들이 풀어내는 판타지에 많은 고딩들이 허우적댔었다━에게 자신의 습작을 보여주기도 했고, 학생 1의 습작을 독려하기도 했다. 국어 선생의 이름은 저명한 소설가의 이름과 같았는데, 학생 1에게는 그저 선생 중 한 사람이었다. 여느 여고생이 그러하듯 선생을 연모하는 일도 없었고, 자신에게 보여주는 관심이 고마웠지만 그뿐이었다. 학생 1의 데면데면한 반응에 국어 선생은 조금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그에게 도 학생은 그저 학생 1이었으므로, 다른 선생 2, 3, 4… 들이 다른 학생 2, 3, 4… 에게 그러하듯 보통의 배려로 선생 1을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선생 1은 학생 1에게 3~4시간쯤 특강을 해 주었다. 화려한 언변과 유려한 문체를 체조선수가 리본 휘두르듯 휘두르며 학생 1을 쥐락펴락하던 선생 1은 그 특강 이후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도 선생 1은 꼰대가 아니라 어른이었다. 다른 집과 다른 구조 때문에 한층 더 부대끼며 지내야 하는 103호 입주자들의 불만을 다독이고, 잘 지낼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 일러주면서 지금껏 어른 노릇을 하고 있다.


여자는 스무 살이 되던 해부터 4년 동안 가을 계곡에 머물렀다. 머무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나고 보니 4년 내내 여자의 계절은 가을이었다. 여자의 몸 안에서는 늘 바람이 불었고, 바람이 자꾸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바람에 여자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4년 동안 여자는 꾸준히 돈을 벌었고, 차곡차곡 모았고, 첫 번째 연애를 끝내고 시작한 두 번째 연애에 모은 돈의 대부분을 탕진했다. 이 시기 여자의 관심은 돈, 연애, 문장 세 가지뿐이었다. 돈, 연애, 문장 모두 엄청나게 마셔댔다. 그 술값을 대느라 여자의 한숨이 늘었다. 제 속에 고인 바람을 토해내느라 여자는 자꾸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얻은 것은 바윗돌* 세 개. 아주 가끔, 여자는 35번지를 불탑 돌듯 돌다 바윗돌들을 한 번씩 쓸어보기는 했지만 오래 들여다보는 일은 없었다. 바윗돌에 새겨둔 여자의 문장들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비뚤어져 있던 시간들, 기울어져 있던 시선들, 여물지 못한 시간들이 위태롭게 새겨져 있다. 시간이 지나면 여물게 할 수 있을 거라고, 기울면 기운대로 비뚤면 비뚤어진 채로도 괜찮다고, 작은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부끄러웠다. 한 번 부끄러운 것은 계속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지, 그래도, 그때보다는 여물고 기운 것을 조금 더 기울이고 비뚤어진 것을 조금쯤 바로 잡았어도 여자는 여전히 부끄러웠다. 그때는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 여자는 조금이라도 덜 부끄러우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데 그게 잘 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여자는 몇 사람의 논객*을 들였다. 여자는 ‘생각’을 갖고 싶었는데, 그걸 가지려면 논객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권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자에게 논객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인문학 분야의 논객들을 추천했지만 여자는 문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평양감사도 싫으면 그만이니까. 그보다도 여자가 집에 들인 논객들의 대부분은 그녀가 흠모하던 소설가를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아서, 일껏 여자의 집까지 와서 입 한 번 제대로 떼어 본 논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생각도 않으면서 논객들을 내보내지 않는 이유를 여자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명씨*들. 글 쓰는 무명씨들이 103호에 살고 있다. 그들은 새 봄을 알리는 역할을 했지만 정작 봄을 만끽한 사람은, 여자가 알기로 없었다. 여자로 하여금 살아남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던 대부분의 무명씨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화려한 데뷔’라는 두 번째 환상을 제 손으로 꺾어 버린 뒤부터, 여자는 더 이상 글 쓰는 무명씨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빛나는 문장’을 갖겠다고 문장 하나 쓰는데 일주일을 꼬박 쏟아부어가며 굳혔던 고집을 무너뜨린 뒤부터, 여자는 무명씨에서 벗어나는 일을 기약 없이 미뤘고, 서서히 글 쓰는 무명씨들을 찾지 않게 되었다. 같은 무명씨 주제에 ‘그래도 내가 낫다’는 치기를 부리고 싶었고, 당장 먹고사는 게 바빴고, 먹고사는 일도 다 글감이 되는 거니까 괜찮다고 합리화를 했고… 글 쓰는 무명씨들에게 질투는 줄 수 있어도 선망은 줄 수 없었기 때문도 있었을 테고… ‘현실’ 같은 것을 마주 보는 것이 힘들었을 수도 있었을 테고… 얻는 것 없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그 싸움이라는 것이 덧없기도 했고… 여자가 글 쓰는 무명씨들을 멀리하게 된 이유를 세어 보자면 수백 가지가 넘겠지만 굳이 그걸 헤아리고 싶지도 않았고… 생계를 위해서라는 쓸데없지만 절박한 이유로 글 짓는 기계가 되는 연습을 하는데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글 쓰는 무명씨들은 방치되었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생각도 없으면서 무명씨들을 내보내지 않는 이유를, 여자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자는 남의 상장*을 모으는데 몰두하기도 했다. 여자는 이 상장을 수집할 때마다 짐짓 지성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그것은 정말 잠깐이었다. 상장을 받은 사람과 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과하다 싶게 공감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기출문제집을 풀듯 상장을 수집했지만 여자는 공부가 싫었고, 무엇보다 분석 같은 것에 젬병이었고, 어쩌다 비법 비슷한 것이 보여도 감정에 치여 물음표를 놓치기 일쑤였다. 좋은 문장이 다 무어냐, 감동이라는 게, 카타르시스라는 게 다 무어냐, 결국은 스스로를 허물어내는 길 밖에 없다, 어떻게 허물고 어떻게 늘어놓아야 하나… 뭐 그런 고민으로 끝이 나곤 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으로 부러움을 눌러 덮으며 못 먹는 감 찔러보기는커녕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짐짓 결연한 마음으로 수집한 상장들을 103호의 현관문 노릇하는 시계로 덮어놓았다.


여자는 상장들과 함께 수료증*도 하나 덮어두었다. 여자는 5년 전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대책 없이 그만두었다. 월급이라는 것을 다람쥐가 도토리 숨기듯 이곳저곳에 나누어 숨겨두기를 좋아했던 여자였는데 ━숨겨놓은 도토리의 대부분을 먹어 없애긴 했지만, 도토리 숨기는 것은 여자에게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여자가 세우는 모든 생활 계획의 토대가 되는 그 ‘도토리 숨기기’를 더 이상할 수 없다는 것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쨌든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꼭 한 페이지씩, 딱 한 페이지씩만 글을 써서 공유하면 소설가가 한 편의 한 페이지를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제는 분석이라는 걸 해보자고, 아니 도식에 맞춰 장치라는 걸 써 보자고, 다짐한 여자는 꼬박꼬박 글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쓴 한 페이지짜리 글이 당선되었다. 당선된 글이 100편씩 모일 때마다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여자는 이 책을 수료증 삼아 구입했었다.

그러니까 이 수료증은 여자에게 ‘괜찮다’는인증이었다. 소속이 없어도 괜찮다는, 여자 스스로가 ‘소속’이 되어도 괜찮다는 인증이었다. 이 수료증이 이끄는 대로 계속 글만 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여자는, 용돈━이라 쓰고 술값이라 읽는다━을 번다는 명목으로 돈벌이가 될 만한 일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여자는, 술값 치르는 데 쓸 것 말고도 더 많은 도토리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여자는 글 쓰는 일보다 돈 되는 일을 우선으로 두기 시작했고, 글은 조금씩 멀어졌다. 이게 다 글 쓰는데 도움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그게 다 글 쓰는 데 도움되진 않는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그렇게 글 쓰는 일을 외면하는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여자는 허방을 디뎠다. 넘어지지 않으려 딛는 곳마다 하필 허공이어서, 여자는 계속, 마음을 접질렸다. 여자는 접질린 마음에 압박붕대만 대강 감아두었는데,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너무 세게 감아 놓은 압박붕대 때문에 접질린 곳이 욱신거릴 때마다 여자는, 글 지어다 밥상 차리는 일에 대해 고민하면서, 마음 접질린 데에는 무엇이 좋은지 궁금해하면서, 글을, 쓴다.



103호 사람들

선생 1 : 다시 읽고 싶은 소설 1 / 최일남 외 / 도서출판 삼문 / 초판 1쇄 1993년 12월 15일 / 5,000원

가을 계곡 바윗돌 1 : 추계문학 제13호 / 추계예술대학교 / 2005년 2월 12일

가을 계곡 바윗돌 2 : 추계문학 제12호 / 추계예술대학교 / 2004년 2월 21일

가을 계곡 바윗돌 3 : 청사문예 제19호 / 추계예술대학교 / 2005년 2월 21일 

논객 1 : 문예중앙 2001년 봄호 /중앙 M&B / 2001년 2월 25일 발행 / 10,000원

논객 2 : 문학사상 제33권 12호 / 문학사상 / 2004년 12월 1일 발행 / 8,300원

논객 3 : 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 문학동네 / 1판 4쇄 2015년 1월 23일 / 15,000원

무명씨 1 : 1996 신춘문예 당선 작품집 1 / 윤종영 외 / 예하출판 / 초판 1996년 1월 25일 / 6,500원

무명씨 2 : 1999 신춘문예 / 구경미 외 / 프레스21 / 초판 1999년 1월 29일 / 10,000원

무명씨 3 : 2001 신춘문예 당선 소설 작품집 / 곽상희 외 / 프레스21 / 초판 2쇄 2001년 1월 15일 / 12,000원

무명씨 4 : 2002 신춘문예 당선 소설 작품집 / 가백현 외 / 프레스21 / 초판 2쇄 2002년 2월 15일 / 12,000원

상장 1 : 2005 제5회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 / 김훈 외 / 랜덤하우스중앙 / 초판 3쇄 2005년 10월 4일 / 8,900원

상장 2 : 2008 제32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 / 권여선 외 / 문학사상사 / 초판 2008년 1월 18일 / 11,000원

상장 3 : 2011 제56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 전경린 외 / 현대문학 / 초판 1쇄 2010년 12월 6일 / 12,000원

상장 4 : 2013 제14회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 윤성희 외 / 문학의숲 / 1판 1쇄 2013년 9월 6일 / 12,000원

상장 5 : 2012 제36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 / 김영하 외 / 문학사상 / 1판 14쇄 2012년 2월 6일 / 13,800원

상장 6 : 2013 제37회 이상 문학상 작품집 / 김애란 외 / 문학사상 / 1판 11쇄 2013년 2월 5일 / 13,800원 

수료증 : 한 페이지 단편소설 700 / 이나경 외 / 2010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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