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104호는 좀 애매한 방이다. 1층이지만 제법 전망이 좋아 좀 ‘그럴듯한’ 사람들이 살면 좋았을 텐데, 떠밀리듯 옮겨온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렇다고 ‘그럴듯한’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여자는 104호를 들여다볼 때면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마냥 사랑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등 떠밀려 들어와 머물고 있는 곳이 104호다.
등 떠밀려 이방 저 방 얹혀살다 104호에 정착한 애물단지들*은 차라리 내쫓기는 것이 나을 만큼 여자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냉대받았던 것은 아니다. 떠밀리듯 가져온 단지가 둘, 호기심에 들여온 단지가 하나, 파도가 굴리며 놀다 버린 빈 페트병 같은 단지가 하나,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단지가 하나, 전부 다섯 개의 단지가 있다. 어찌 됐든 여자는 그들에게 정 붙여보려고 했었다. 마음이 어찌 마음대로 되던가. 다른 단지들은 기대하지 않아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애물단지 1에 거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애물단지 1은 기대하면 실망도 크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여자의 관심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이미 관심 밖에 내놓았어도 내쫓을 수도 없어━안타깝게도 내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여자는 아예 애물단지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애물단지가 있는가 하면 선물* 같은 사람도 있다. 이들을 볼 때마다 여자는 ‘선물’이라는 게 얼마나 까다로운 것인가를 곱씹는다. 여자는 선물을 할 때, 정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성이라는 것은 한 때 ‘포장’에국한되었고, 정성이 강박으로 변해갈 무렵 ‘포장’은 ‘받을 사람’으로 옮아갔다. 직관적인 취향에 머물던 선물의 정성은 이내 막다른 골목에 가로막혔는데, 취향이라는 것이… 한 두 가지 정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고, 어중간한 ‘정성’은 폭력으로 변질되기 쉬웠고, 그 조마조마한 간극을 경계하느라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여자는 진이 다 빠졌다. 주고 나서도 마음을 전했다는 뿌듯함 보다 헛헛함이 더 커서 여자는 선물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포장’이 정성이던 시절의 여자는 선물을 받으면 행복한 비명부터 지르고 보았는데, 선물의 어려움을 알고부터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고 선물 받을 일을 만들지 않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선물을 갈망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안타깝게도 이 선물들은 정성이 ‘포장’이던 시절에 받았음에도 조금 씁쓸한 선물이었다. 씁쓸한 것은 씁쓸한 것이고, 어쨌든 여자는 생각날 때마다 이 선물을 불러내 찬찬히 들여다보며 선물 받은 ‘어느 때’를 돌이키곤 한다. 선물이 어렵고 어렵지 않고를 떠나 ‘어느 때’는 여자에게 소중한 순간이었으니까. 이 선물들을 건넨 그 손이 무척이나 따뜻했으니까.
여자는 자주 길을 잃는다. 생각 속에서도 길 위에서도 자주 길을 잃는다. 생각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은 대책이 없지만,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면 여자는 자동차 이정표부터 찾았다. 자동차 이정표를 따라 사람 대신 차와 함께 걸으며 제 길로 돌아가곤 했다. 휴대전화 속에 지도가 없던 시절에는 그랬다. 자동차 이정표를 보며 자동차와 함께 걷는 건, 자동차가 기준이어서 사람이 걷기에는 꽤 먼 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휴대전화 속에 지도가 생겼다. 여자는 지도가 좋았다. 자주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낯선 공간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도통 쓰일 일 없는 오래된 지도*를간직하고 있다. 그저 오래되기만 한 것이 아닌 데다 ‘길’ 자체보다는 길의 안팎과 길 위를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지도였지만 처음 지도를 들여왔을 때 여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살펴보았'었'다. 그렇다, 과거형이다. 과거의 지도에 과거형을 쓰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따금씩이라도 현재 진행형이 될 수 없는 지도라는 의미랄까. 그렇다, 도통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아주 오래 전의 地理는 지리할 뿐이다. 그래서 오래된 지도는 104에서 더께 앉은 부적처럼 살고 있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듯이.
104호에도 ‘두꺼운 사람들’이 ━101호 이야기 참조━ 있다. 여자는 그중에서도 부엔디아 집안*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 지금까지도 여자는 기꺼이 외롭고 싶을 때마다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을 찾아간다.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은 ‘그냥’ 사는 사람들이었다. 만수산 드렁칡이 얽히고설키는 것처럼, ‘그냥’ 거기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얽히고 ‘그냥’ 저기에 사랑이 있어서 설키고… 우연이든 필연이든 무엇이든 연기를 피운 최초의 불꽃이야 있었겠지만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에게 불꽃이라든가, 연기라든가, 얽히고설키는 방법이라든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냥’이라는 수식어 때문에 꽤 성의 없어 보이지만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성의 없이 대하진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살았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냥이라는 말로 덮어두고픈 온갖 이유들이 한순간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의 ‘백 년’을, 여자는 사랑했다. 그런 그들의 ‘고독’을 여자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네코 씨*도 ‘두꺼운 사람들’ 중 하나다. 일본에서 온 고양이인데, 고양이이긴 한데, 고양이 탈을 쓴 사람이랄까. 사람인 척하는 고양이랄까. 여자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이루어질 수 없지만 꿈꿔보고 싶은 꿈 100’ 중 하나가 큰 고양이, 사자를 키우면서, 아이를 낳으면 큰 고양이에 태워 함께 산책하는 것일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네코 씨는 좀 달랐다. 어딘지 좀 불편했다. 네코 씨가, 시쳇말로 ‘팩트 폭행’을 일삼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고양이 다운 모습’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 모두였는지.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여자가 거의 유일하게 호감보다는 어색함을 더 드러냈던 고양이가 네코 씨다.
그리고 미친 남자들*이 산다. 여자는 미친 사람들을 좋아했다. 소위 똘끼 충만한 사람들. 그렇다. 여자는 세상 물정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르지만 그래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똘끼가 있어야 아트가 충만하고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맙소사.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니까 아쉽지만 넘어가기로 하고. 게다가 104호의 미친 남자들은 여자가 ‘그때’ 동경하던 미친 사람들과는 다르다. 제대로 미쳤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전혀 다르다.
첫 번째 미친 남자는 한 가지 인상만 남아있다. ‘후련하다’는 것. 끝이 있나 싶게 긴 터널의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쏟아지는 햇살 같기도 하고, 짜임새 있는 노가다 ━시작해야 할 시간에 꼭 맞춰 일을 시작하고 새참 먹어야 할 시간에 새참을 먹고 일하는 동안에는 톱니바퀴 맞아 돌아가듯 아귀가 딱딱 맞게 일을 하고 일의 강도는 멈춰 있는 시간이 길어야 1분 남짓, 계속 움직이고 나르다가 끝나는 시간 1분 전에 모든 일과 뒷정리가 끝나 남은 1분 동안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를 끝내고 마시는 맥주 한 캔 같기도 하고. 여자는 그런 후련함을 줄 수 있다면 미친 것도 긍정적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미친 남자는 조금 고루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여자의 작은 가슴에 뜨거운 물을 끼얹어 주었다. 42도쯤 되는, 딱 기분 좋은 뜨거움. 강렬하진 않아도 기분 좋은 그런 뜨거움. 발만 담그고 있다가 엄마에게 등짝을 맞고서야 목까지 몸을 담그게 되는 온탕의 뜨거움. 시간이 지나 미지근해졌지만 온도가 내려간 만큼 자신에게 옮아온 그 뜨거움이 조금쯤 세련돼 졌을 거라고, 여자는 믿고 있다.
이 틈바구니에 생뚱맞은 잡지가 한 권 끼어 있다. 야한, 잡지*다. 굉장한 기대를 품고 여자는 서가에서 이 잡지를 꺼내어, 보란 듯이 표지와 제목이 잘 보이도록 가슴에 품고 계산대로 가 계산을 한 다음 보란 듯이 표지와 제목이 잘 보이도록 가슴에 품은 채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부푼 마음을 안고 펼친 잡지는 그러나, 기대 이하였다. 그저 취향의 문제였다면 차라리 좋았으련만. 왼 편에 페이지가 쌓일수록 여자의 실망도 함께 쌓였다. 여자는 ‘검열’에 대해 잠시 고민했고, 그 고민보다 조금 더 오래 ‘검열’을 원망한 뒤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그리고 야한 잡지는 104호 구석에 처박혔다.
LP*는 여자로 하여금 관심과 무관심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여자는 음악에 호불호랄 것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누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재즈,라고 답하던 때가 있었다. 그 대답은 어떤 의무감과, 젠 체하고 싶은 마음과 진심이 뒤섞여 있는 대답이었다. 또 ‘재즈를 좋아한다’고 하면 피차 더 아는 것도 할 말도 없어 대체로 귀찮게 캐묻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재즈는 여자에게 꽤나 유용한 대답이었다. 디지 길레스피, 마일스 데이비스, 루이 암스트롱, 스탄 게츠, 쳇 베이커… 기라성 같은 연주자들의 이름을 주워 들었지만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연주했는지는 잘 알지 못했고, 들을 때마다 어려웠고, 그들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지 못했고, 여자의 할머니가 “시작도 끝도 없는 음악”이라고 일갈했던 것에 적극 동감했었고, 악기보다 사람의 소리가 더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찾아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LP를 구입하면 CD를 덤으로 준다고 했었고, CD에는 사람 목소리가 여럿이어서 기꺼이 구입했었다. LP 속에 담긴 사람들은 하나같이 별처럼 빛나는 예술가들이었고, 하나같이 개똥밭에 구르는 게 나을 만큼 불행했다. 불행을 자초한 기행들, ‘기행’이라 포장된 폭력과 마약과… 왜 예술가들은 그래야 하는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선택했다면 선택한 대가를 치르면 그만이었지만 선택보다 휩쓸린 것이었고… 깊이 생각할수록 온통 슬픔뿐이어서 여자는 LP를 넣어두고 증정품으로 받은 CD를 들었는데 그마저도 슬퍼서 이내 작은 케이스에 넣어두었다.
그 LP 옆에는 CO 01*이 있다. 여자가 갖고 있는 다른 CD와 달리 CD 01은 규격에 맞지 않아서 ━크기가 일반적인 CD와 달랐고, 결정적으로 소리를 읽어야 하는 형식이었다━ 104호에 놓였다. 여자는 꽤 고대하며 기다리다 CD 01이 발매되자마자 구입했었다. 부푼 마음으로 CD 01을 읽었고, 여자의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와아━’ 가 아니라 ‘우와!’였고, 느낌표는 강렬한 만큼 뒤이어 따라 나올 수 있을 감정들을 싹둑 잘라버렸다. 느낌표가 여러 개였다면, 혹은 ‘우와아━’의 ‘아━’가 더 길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여자는 충분히 좋았다. 그래서 여자는 CD 01을 곱게 넣어두었다. 한 손으로 받쳐 흐트러지지 않도록 ━혹시나 다른 이들의 옷깃을 구기거나 채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넣어두었고, 그 뒤로 다시 찾아 듣진 않았지만 눈길이 가 닿을 때마다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백발의 남자*는 104호의 ‘그럴듯한’ 사람 중 하나다. 여자는 무엇엔 가 천착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다. 여자는 어느 날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여자는 영화를 보고 가슴이 울렁거렸고, 백발의 남자가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여자는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백발의 남자를 찾아내 데려왔다. 남자는 오래 고민해왔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남자의 이야기들은 여자가 파고 있던 ‘우물’ 하나를 어떻게 파고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는데, 덕분에 여자의 우물은 더 깊어졌고, 지금도 깊어지고 있는 중이다. 삽질하다 힘이 들면 여자는 그래도 깊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자위했다. 어쩌다 우물을 파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면 여자는 한 우물만 파기에는 파야할 우물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모두 팔 때까지 파야 하는 우물이라고 자위했다.
소녀*는 여자로 하여금 우물 파던 삽을 잠시 내려놓게 만들었다. 여자는 소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좀 더 신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우물 파는 일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파야 할 우물들은 많았으므로 잠시 멈추어도 괜찮았지만 어딘가 개운치 않았다. 파고 파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떤 우물도 어떻게 파야 한다는 답은 없었지만 그래도 파다 보면 끝이라는 게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는데, 소녀가 그 희망을 지워버린 것이다. 지워진 희망이 여자에게 절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우물’들은 희망이나 절망 같은 望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래도 여자는 조금 의기소침해졌다. 세상에는 여자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많았고, 알지도 못하는 데다 어찌할 수 없다는 것만큼 여자를 기운 빠지게 하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을 소개하는 문단에 쓰인 인용구는 이승희 시인의 시, 「그냥」,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시선 258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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