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105호와 106호는 한집이나 마찬가지다. 이 건물에서 거의 유일하게 직접적인 교류가 이뤄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교류는 먼발치에서 보아도 또렷이 보이는데, 여자는 이 ‘흐름’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서 105호와 106호 앞에 가건물을 세웠다. 가건물━두 종류의 고양이용 스크래쳐━은 ‘행복’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어 난감한 여자가 단호하게 ‘백수동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라 일컫는 두 계절, 가을과 봄이 애용한다. 어쨌든,
가건물을 이리저리 피해 105호로 들어가면 두 선배*가 보인다. 여자가 4년간 머무르던 가을 계곡━103호 이야기 참조━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을 계곡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중 선배 1과는 종종 밥을 먹었는데 그 선배와는 늘 술이 아니라 밥을 먹었다는 게, 여자는 이제야 좀 의아했다. 아무튼 그 선배는 ‘선샤인’이라는 모텔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엮어 책을 냈다. ━선배의 책을 여자가 직접 샀는지, 아니면 책을 받고 밥을 샀는지, 그도 아니면 그냥 받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게 좀 아쉽다━ 그 책에 사인해달라는 여자에게 선배는 여자의 이름 앞에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여자는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이토록 담백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자는 그 선배에 대해 ‘모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여자가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담백하게 느낄 수 있었던 건 여자가 마주 본 선배의 몇 가지 단면이 담백했기 때문이었다. 심심하긴 해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그 선배의 모텔 이야기는 좀 잔혹했다. 그 잔혹함은 깨끗한 종이에 먹물 떨어뜨릴 때의 짜릿함 같은 것을 느끼게 했는데, ‘누가’,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심지어 ‘누가’ 정말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배와는 ‘스치듯 안녕’했었다. 가을 계곡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여자 주변에는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처럼 ‘이런 게 있는데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을 따라 작은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선배였다. 그 선배는 까맣고 까마득했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기도 했고, 88학번이라고 했다. 담배와 올림픽과 유치원이 연달아 떠오르면서 ━‘88’이라는 이름의 담배가 있었고,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여자는 유치원에 들어갔다━ 책상 건너편에 않은 그 선배가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까마득한 선배는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고, 소모임도 흐지부지 나가지 않게 되었고, 선배가 증정한 이야기책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언제인가부터 여자는 연애편지*를 쓰지 않는다. 애인이 없기 때문도 아니고, 펜 보다 키보드 두드릴 일이 더 많기 때문도 아니다. 마음이 구구절절해서 구구절절 쓰는 게 막막하기 때문이다. 연애도 연애편지를 쓰는 일도 다 한 철일 뿐. 사랑이라는 게 어느 한 철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104호에 고이 넣어둔 연애편지는 사실 여자가 쓴 것이 아니다. 하지만 풋사랑에 빠져 있던 여자에게 다른 사람들이 쓴 연애편지는 꽤 많은 영감을 주었고, 여자는 당시 만나던 남자애에게 손으로, 이메일로 숱한 연애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았다. 여자가 쓴 연애편지를, 남자애의 누나가 베껴다 제 애인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남자애는 그 사실을 알고 길길이 뛰었다. ‘현실 남매’란 이런 것이구나 싶게 길길이 뛰며 제 누나를 욕하던 남자애에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여자는 조금 뿌듯했다. 좀 쓰긴 쓰는가 보다, 하면서. 풋풋해서 더 뜨거웠던 연애가 시들고, 또 다른 연애가 피어나고 또 지고… 여자가 연애편지를 쓰는 일은 줄어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써 내려간 연애편지도 뒷방 늙은이처럼 104호에 머물게 됐다. 이따금씩 104호에 넣어 둔 연애편지를 꺼내보면서 여자는 연애편지 대필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요즈음의 연애에는 편지도 없을 뿐 아니라, 뭐랄까, 낭만도 없고 뭣도 없고 텅텅 비어버린 느낌이었고… 당장 자신의 연애도 없는 마당에 남의 연애를 돕는다는 게 약이 올라 싫었다.
여자에게 사랑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었다. 첫 번째 남자와 여자*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그들의 그 밋밋한 사랑에 쉽게 돌아서고 말았다. 여자는 그 커플을 몇 번 더 만나 빠뜨린 것은 없는지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만남이 잦아질수록 귀로 들어오는 것보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 더 많았다. 그들은 간간이 그림을 곁들여가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그 그림이 오밀조밀하니 아기자기하고 은은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나만큼은 다를 거라는 환상을 믿고 싶은 것, 그것이 여자에게 사랑이었다. 그땐 그랬고, 그땐 틀렸고, 지금이라고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자는 더 이상 첫 번째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듣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우울도, 여자가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스개 삼아 여자는 ‘우울이 사람의 탈을 쓰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 ‘우울이라는 유전자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하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우울을 가지고 놀 때보다 우울에게 여자가 휘둘리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려니, 뭐 그렇게 두는 수밖에. 사진첩*은 참고할만한 것이 있어 사들인 것이었다. 여자는 사진첩의 두 번째 제목이 유독 마음에 안 들었다. ‘너만 그런 거 아니야’라는 말을, 그와 비슷한 말들을 여자는 무척 싫어한다. 알고 있는 모든 상소리를 꺼내고 싶을 만큼. 그래도 가끔 그 말을 쓴다. 아무리 찾아도 달리 쓸 말이 없을 때, 알고 있는 모든 상소리를 꺼내 덧붙이면서도 쓴다. ‘그 말’이 보이거나 들리거나 무의식 중에 읊조리거나 할 때마다 여자는, 저주한다. 여자에게 ‘그 말’을 들려준 사람을, ‘그 말’을 들은 자신의 귀를, ‘그 말’을 뱉은 자신의 입을. 참고할 일이 있어 산 사진첩이지만 참고하지 않을 이유는 충분했고, 어딘가에 처박아두거나 내다 버릴 이유도 충분했지만 여자는 사진첩을 버리지 않았다. 분노는 언제나 그것을 틔운 것에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맞닥뜨리는 분노는, 아무리 밀어내도 결국 여자에게 돌아왔고, 그것은 여자에게 지상 최대의 난제였지만 여자가 만나는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분노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다. 잘못된 곳으로 돌아간 분노는 늘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낳았다. 여자에게도 세상에게도 불행은 이미 차고 넘쳤고, 앞으로도 계속 차고 넘칠 것이었다. 하나라도 줄여야 했다.
돌이켜보면 여자가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 데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나옹*이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고양이인데. 고양이를. 고양이라니까? 무려 고양이다!
여자는 ‘거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학원’을 찾아다닌 적이 있었다. 흔한 자기개발서는 내키지 않았고 ━글로 배워 말아먹는 건 사랑으로 충분했다, 101호의 물푸레나무 커플 이야기 참조━ 보다 확실한 효과를 얻어야 했으므로 학원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러다 아들러*라는 개인교사를 소개받았다. 그의 강의시간마다 ‘이거다!’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열심히 들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필기해 놓은 것을 보면 정확한 문장이 하나도 없었다. 여러 가지 접속사를 써서 끊임없이 이어 놓은 문장을 마주했을 때처럼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러다 여자는 잠시 집을 비우며 고양이들을 친구에게 맡겼는데, 돌아오니 선생이 사라지고 없었다. 친구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던 것. 하는 수 없이 여자는 처음 개인교사를 소개해준 곳에 연락해 다른 ‘아들러’를 데려왔는데, 어쩐지 그 강의가 시들해져서 수업을 이어가진 않았다. 그의 강의에 혹하긴 했어도 명쾌하진 않았고, 그의 강의는 좋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잡히는 것이 없었다. 식당에 가서 밥그릇 싹 비워놓고 맛없다고 투덜대는 모양새지만, 배고픈 건 배고픈 거고 맛없는 건 맛없는 거니까 아들러 선생도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조세핀*은 프랑스에 산다. 여자는 그 애를, 꼭두각시일 때 만났다. 몇 가지 일련의 사건으로 여자는 매일 최악을 경신하고 있었고, 그 경이로운 기록에 너도나도 보탬이 되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재가 되어서도 스러지지 못하고 마음을 태워야 했고, 관성에 떠밀려 하루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틈만 나면 스스로를 괴롭혔고, 쓸모없는 존재라 생각했으며 그저 이용당하고 있으므로 ━그즈음의 여자는 ‘일’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느꼈다. 여자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여자의 상태가 어떻든 저희들의 이익을 위해 여자를 부려먹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더욱 쓸모없다고 생각했고, 관성의 법칙에 따라 관성이 이끄는 대로 꼭두각시처럼 돈을 벌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술을 마시고 하염없이 울다가 칼을 집어 든 여자는 끝내 그 칼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빌어먹을 책임감’을 원망하다 지쳐 잠들었다. 그때 만났다. 조세핀은. 여자는 그 애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꽤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여자는 생전 처음 보는 프랑스 여자애를 안고 스스로를 위해 울었다. 처음으로 행복해지고 싶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여자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 등을 떠밀어줘야 ━꾸준히, 끈질기게 떠밀어줘야 한다━ 엉덩이를 떼지만 여행을 가서도 한 공간에 오래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여행에 대한 ‘로망’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즉흥적으로 매 순간 결정이 바뀌는 여행을 꿈꾼다. 어느 날 문득 기차역으로 가서 아무거나 타고 ━아무거나가 제일 어렵지만━ 아무 데나 내려서 아무렇게나 걷다가 눈에 띄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그런 막무가내 여행 같은 것. 그러나 그것도 취향이 맞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혼자 가면 그만이지만 겁이 많다. 이런 겁쟁이 또 없지 싶게 혼자 낯선 곳에 있으면 겁이 폭발한다. 그래도 그 언젠가를 위해 여자는 버스 노선도* 하나를 마련해 두었다. 여자가 제 등을 계속 떠밀다 보면 언젠가 겁을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돈벌이를 할 때 여자가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은 업보(業報)*다. 얽히고설킨 인과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인지 궁금했고, 이것이 일으킬 나비효과는 어디까지이며 되돌아올 화살은 몇 개나 될 것이며…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으로 옮기면서 여자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했다. 회사 규모가 조금 커졌고, 뭔가 멋져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기능과 예술 사이를 고민하고 자부심과 오만 사이를 고민하고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그곳에서 여자는 30권의 잡지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여자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기여하다’는 단어를 써도 되는지, 늘 고민하곤 했는데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말할 수 있으면 ‘기여했다’고 해도 되지 싶었다. 이곳에서 여자는 다른 꿈을 꾸게 되었고,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까지도 고민하는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그저 열심히 하려다 보니 저지른 잘못이었다, 고 덮어두고 싶었지만 덮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이라 그랬다, 고 모르는 척하고 싶었지만 모르는 척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자는 지금도 짬이 날 때마다 고민한다. 그 고민이라는 것은 ‘선배’란 무엇인가, 하는 것. 그 시절을 후회하진 않지만 미숙했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드는 고민이다. 잘 늙는다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만드는 고민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업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민처럼 105호와 106호에 걸쳐 쌓여 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여자는 자의 반 타의 반 출사표*를 쓴다. 거창하지만 그만큼 절박한 것이었다. 갈 곳 없이 직장을 그만두었고,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다 쓰게 된 출사표였다. 부풀었던 꿈이 스러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만났고 다른 세상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고 무엇이든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셀 수 없이 많은 단추 중에 첫 번째 단추였고, 여자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예쁜 단추였다.
이름이 있어도 부르지 않는, 혹은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 스치듯 만났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만날 때 여자는 욕심을 내려놓고 통장으로 들어올 돈만 생각했다. 그 ‘돈’이라는 게 결코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은 액수이기도 했지만 여자의 욕심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여자 그 자신과 조금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들은 ‘이름이 있어도 부르지 않는, 혹은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선배 1 : 모텔 선샤인 / 전민석 / 새미 / 초판 1쇄 2001년 4월 16일 / 7,500원
선배 2 : 풀밭 위의 식사 / 채희철 / 토마토 / 초판 1997년 10월 17일 / 6,500원
연애편지 : 살고 싶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하여 / 도스토예프스키 외 / 도서출판 리을 / 초판 1994년 1월 10일 / 6,500원
첫 번째 남자와 여자 : 지상에서의 첫 번째 사랑 - 아담과 이브의 일기 / 마크 트웨인 / 이상 / 안미영 그림 / 문화사랑 / 초판 1쇄 1998년 1월 23일 / 5,000원
사진첩 : The Blue Day Book / 브래들리 트레버 그리브 / 신현림 / 바다출판사 / 개정 2판 1쇄 2011년 4월 1일 / 8,500원
나옹 : to Cats - 고양이에게 / 권윤주 / 바다출판사 / 초판 1쇄 2005년 6월 10일 / 12,800원
아들러 : 미움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 인플루엔셜 / 초판 54쇄 2016년 2월 19일 / 14,900원
조세핀 : 행복만을 보았다 / 그레구아르 들라쿠르 / 이선민 / 문학테라피 / 초판 1쇄 2015년 3월 3일 / 13,800원
버스 노선도 : 버스로 서울 여행 / 이예연, 이혜림 / 지콜론북 / 초판 1쇄 2015년 9월 14일 / 14,000원
業…報 : jungle / 200806 vol.15 ~ 201005 vol. 38
業…報 : jungle / 201006 vol. 39
業…報 : 지콜론(g:) / 201007 vol.40 ~ 201011 vol.44 / 201106 vol.51
출사표 : Fairy Pitta / fantastic scar pink / 초판 2011년 5월 18일 / 30,000원
이름이 있어도 부르지 않는, 혹은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 : 기타 등등 기고한 글이 실린 매체와 잡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