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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10. 2016

107호 : 暗室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별채는 ‘별채’니까 그렇다손 치더라도 107호와 208호는 섬처럼 외떨어져 있다. 한 건물이기는 하지만 창고에 가로막혀 있어 한층 동떨어진 느낌이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는 데다 가장 빛이 들지 않는 곳이기도 해서 다른 층, 다른 호실에 비해 여자가 방문하는 횟수도 적은 편이다.


러시아에서 온 문지기*는 이름이 여러 개다. 여자는 처음 문지기를 만났을 때 하도 이름이 많아서 그 많은 이름 중에 무어라 불러야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문지기는 늘 문지기였다. 이름이라는 것이 때로는 알맹이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부터 여자는 더 이상 문지기의 이름 때문에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두컴컴한 데다 잡동사니들이 뒤엉켜 있는 107호에 그나마 질서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건 문지기 덕분이다.


개똥 씨*는 암실 같은 107호에 와서 행복을 찾은, 아주 보기 드문 케이스다. 그는 여자의 스물네 번째 생일에 가을 계곡 선배로부터 소개받았는데, 여자는 한동안 개똥 씨를 소개한 선배의 의중이 궁금했다. 물어보면 될 것을 물어보지 못하고 ‘배후’를 궁금해하던 여자는 이내 개똥 씨의 안타까운 사연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개똥 씨는 사실 프랑스 사람으로 107호에 입주하면서 개명했다. 국적을 버린 것이 아니어서 그의 개명은 비공식적인 것이었지만, 그렇게라도 과거를 다독이고 싶었던 듯하다. 개똥 씨의 안타까운 사연은, 그의 이름이 개똥도 쓸 데가 있다는 속담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오죽하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겠나. 어쨌든 개똥 씨는 107호에서 문지기를 비롯한 여러 친구를 사귀었고, 지난날은 잊고 ━잊은 것처럼 보일 뿐이겠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대장*은 시간을 보관한다. 시간 중에서도 여자의 시간, 여자의 시간 중에서도 이미 지나간 것들을 주로 보관하고 있다. 여자는 대장에게 수많은 ‘오늘’에 ‘어제’나 ‘내일’ 혹은 내일보다 조금 더 먼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장은 묵묵히 들었고 ━여자는 대장이 새삼 고맙다. 여자의 이야기를 어떤 기준도 없이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토씨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차곡차곡 담아 보관해 두었다. 여자는 대장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고 싶어 서양의 어느 장인이 만들었다는 옷을 주문해주었다. 앞으로도 쭈욱, 여자는 대장에게 서양의 장인이 만든 옷을 주문해 줄 생각이다.

대장은 이따금씩 호패*도 관리해 준다. 여자의 것과 여자가 수집한 호패들을 상자에 담아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호패를 가지고 다닌다. 호패는 대체로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지만 어떤 것은 드물게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자는 그런 만능 호패를 본 적은 없었지만, 그런 게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무성하게 자라 있는 것을 본 적은 있다. 여자는 뜬구름만도 못한 소문보다 자신의 호패에 관심이 더 많았고, 새로운 호패를 갖고 싶었지만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이 많아서 새 호패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다. 새 호패를 갖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을 다 쓰려면 좀 더 자주 보다 많이 사람들을 만나야 했지만 요즘의 여자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외출하기라도 하면 익숙한 거리도 낯설고 낯선 사람들에게서 미세한 두려움을 읽어낼 만큼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었다.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여자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외출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에게 ‘안’보다 ‘밖’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여자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밖’이 버거웠다.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약간의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여자였다.


여자는 12년 전, 등 떠밀려서 떠났던 처음이자 마지막 장기 여행을 다녀왔다. 그 여행은 여러모로 배울 것이 많은 여행이었다. 함께 하는 사람의 취향이 중요하다는 것, 인물사진 촬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당시에는 디카도 아닌 자동카메라가 전부였다! 셀피는커녕 ‘내 얼굴’을 찍으려면 반드시 누군가 찍어줘야만 했고, 상대를 찍어주는 것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찍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자에게 곤욕스러운 일이다━ 어딘가 오래 앉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여자의 카메라에 담긴 장면은 이름 짜한 관광지를 배경으로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안 좋은 예’를 답습하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그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사진첩*에 정리해 두었다. 여자는 두고두고 야간열차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달 사진을 찍을 수 없었던 것을 아쉬워한다. 더 좋은 카메라가 있었던들 그때 그 달을 성공적(?)으로 간직할 수는 없었겠지만.



107호 사람들

문지기 : 악령 상·중·하 /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 / 김연경 / 열린책들 /세계문학판 1쇄 2014년 6월 30일 / 각권 9,800원

개똥 씨 : 그림자를 판 사나이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 최문규 / 열림원 / 1판 1쇄 2002년 5월 15일 / 6,500원

대장(臺帳) : 몰스킨 리미티드 에디션 / 레고, 오디오 카세트, 허영만, 피너츠, 어린 왕자

호패 : 명함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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