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Cocktail Blues

013 - 첫 수업

Cocktail Blues

by 유정

숨고에 고수로 등록하면서 정말 스스로를 고수라 칭하여도 괜찮은지에 대한 고민을 잠시 했다. 처음 글 쓰겠다 마음먹었던 칠세부터 치면 35년이 넘었고,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했던 스무 살부터 치면 20년이 후울쩍 넘었고, 글 지어다 밥상 차리기 시작했던 스물넷부터 쳐도 20년이 넘도록 썼으니 이만하면 고수라 해도 괜찮지 않은가. 견적서를 보내기 위한 '캐시'를 십만 원 정도 충전했을 때 글 쓰기 레슨 수강생이 나타났다.

커리큘럼을 자세히 물어보던 수강생은 바쁜 일이 정리되는 2월 초부터 수업을 시작했으면 좋겠다며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2월 중순이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 그리고 대망의 첫 수업, 길치 아니랄까 봐 장소를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수업 시작 전부터 진땀을 뺐고, 과연 돈 받고 누군가를 가르쳐도 되는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에 빠져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행히 약속한 장소는 잘못 찾아간 곳에서 2~3분 거리에 있었고, 수강생은 5분 늦게 왔고, 냉수 마시고 속 차릴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고 수업이 시작됐다.

한 시간 오십 분 동안 준비해 간 단어 카드를 -딜러처럼 혹은 마술사처럼 능수능란하게 섞어 보이고 싶었으나- 꼼지락거리며 간신히 카드를 펼쳐 고르게 하고, 수강생이 뽑은 단어로 이리저리 문장을 짓는 동안 다시 한번 숨을 골랐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하얗고 뿌예서 발을 내딛으면 낭떠러지가 아닐까 불안했다. 그래도 나는 제법 능숙하게 -어디까지나 내 기억이다. 부디 기억이 맞기를 바라고 또 바라본다- 답변했고, 수강생은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과제를 내 달라고까지 했다. 수업이 끝나고 1회 차 수업료가 입금된 계좌를 확인하면서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과연, 이 수업 계속될 수 있을까.


그래도 내가 그동안 진심으로 글 지어다 밥상 차렸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걸 새삼 깨닫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첫 수업이었다. 그러니 계속 쓰자. 쓸 수 있을 거야,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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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 준비물로 가장 공들인 건 명함이었다. 회사 그만두고 프리랜서 생활 시작하며 만들었던 것인데, 일껏 만들어 놨더니 '횟집 명함 같다'는 평을 들었다. 굳이 따지고 보면, 이렇게 저렇게 같다 붙이면 칼 쓰는 직업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할 수 있겠으나... 횟집을 차린 건 아니고 횟집이란 말이 자꾸 생각나서 새로 만들었다. 새 명함의 실물을 처음 받은 수강생은 다행히도 '글 짓는 사람'이네요, 라고 말했고 지인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거 못 읽어'라고 했다. 그래도... 새로 만들기를...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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