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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ocktail Blues

020 - 팁

Cocktail Blues

by 유정

'TIP'이라는 단어를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썼다. 가벼운 조언, 귀띔, 참고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도움말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다. 필요한 부분은 많았다. 밥 먹을 때, 숙면을 취하고 싶을 때, 운동할 때, 연애할 때, 다이어트를 하고 싶을 때, 무언가 잘하고 싶을 때, 실수하고 싶지 않을 때... 그렇게 '팁'을 시도 때도 없이 호명했다. 불러다 앉혀 놓고 반드시 전달할 것을 명령하곤 했는데, '팁' 앞에 '서비스'가 붙으니 어째야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실행한 서비스에 대한 팁, 이라고 거칠게 해석할 수 있는 '서비스 팁'을 벌써 세 번이나 받았다. 궁금해졌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안 했고, 내 고양이보다 더 귀하게 대했고, 있었는데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는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또 낯설었다. 하다 하다 꿈도 꾸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스트레스를 스트레스라 부르지 못한다는 것. 양가감정이라는 말로 퉁치기도 뭣한 이 감정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번 의사를 만날 때마다 의사는 '팁'을 준다. 의사의 팁은 처방조제내역서에 적히는 약의 이름, 용량, 투약 횟수로 요약되는데 어떨 때는 탐탁지 않고, 어느 때는 새겨듣게 되고, 또 어떤 때는 이렇게 알록달록해도 되나 싶다. 대개 의사가 하는 말은 한쪽으로 흐르고 마는데, 그 와중에도 한두 마디가 어떤 주술 혹은 계시처럼 박히는 날이 있다. 오늘 마음에 와 꽂힌 말은 '거리두기'. 내가 제일 못 하는 것. 꽂히면 냅다 갖다 쏟아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가장 못하는 것이 거리 두기인데, 특히 연애가 그러하다. 목숨을 걸고 뛰어들고, 대체로 목숨을 잃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뒤 지푸라기 하나 붙들고 간신히 빠져나온다. 아, 사실 목숨을 잃기 직전에 빠져나온다는 건 거짓말이다. 죽었다 살아난다는 게 맞지. 내가 나에게 몇 개의 목숨이 남았는지, 아니면 죽기는 한 건지 늘 궁금해하는 이유다. 내일이 없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오늘을 살기는 하지만 연애는 좀, 내가 생각해도 특히 심하다. 외로운 생, 외로운 삶을 어떻게 고독한 생, 고독한 삶으로 가꿔나갈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때다.


IMG_9066.jpg 밤을 알리는 것도, 아침을 알리는 것도 조류라는 게 새삼 신기하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건, '팁'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연애라 해도 무방할 만큼 의지하던 팁, 술에게서도 확연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하아, 홀로 서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니미럴, 겁나 어려운 경지였던 것이다. 그걸 꼭 해내고야 말겠다는 것보다도 그저 휘뚜루마뚜루 내둘리지 않을 만큼 흔들리지 않고, 부는 바람에 장단 맞출 수 있을 만큼만 흔들릴 수 있을 만큼만 홀로 설 수 있기를 바랄 뿐. 이미 '독존'은 글렀고, 허나 이미 '독존'이므로.


문득 내가 꽁꽁 언 강 같다, 고 생각했다. 두꺼운 얼음 밑으로 소란스러운 강 같다. 얼음은 나날이 두꺼워지고, 그럼에도 흐를 것은 흐르고... 엄청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꽤 나쁜 것 같기도 하고. 알쏭달쏭 애매모호해서 흐르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흐르면 되지, 다시 돌아오더라도, 다시 돌아올 테니까. 빙하도 녹는 마당에 강 위의 얼음이 얼마나 가겠냐고.





덧. 백조는 물에 떠 있기 위해 발을 휘젓고 있는 게 아니더라. 깃털이 어쩌고 저쩌고... 뭐 그런 이유로 그냥 잘 떠 있는 거고, 잘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고, 타고난 대로 넓적한 발을 유유자적 휘적휘적 노 젓듯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타고나지 않는 것에 자격지심 느끼지 말고, 안 보이는 데서 쎄 빠지게 노력을 해야 하느니 마느니, 했느니 마니... 그런 쌉 소리는 싹 치워버리고, 내가 타고난 걸 다시 보자. 기왕이면 거리 좀 두고 보자. 두고 보자는 사람 안 무섭다지만 굳이 무서울 필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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