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ktail Blues
모처럼 출근하지 않는 날 출근했다. 아침 온도는 적당히 추웠고, 햇빛은 색깔이 조금씩 봄을 입고 있었다. 버스를 타러 20분 정도 걸어가는데, 이 아침에 산책하는 강아지를 발견했다. 마침 눈이 마주친 강아지에게 한껏 웃어 보이고 갈 길을 가는데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하도 물려대서 이젠 아프지도 않다.
몇 년 전부터 어린아이와 동물들-대개 산책하는 강아지들이 전부지만-에게는 항상 웃어 보이 자고 다짐했고, 실천 중이다. 세상 가장 연약한 존재에게 줄 수 있는 거라곤 웃음뿐이고, 세상 가장 연약한 존재들에게 딱딱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보다 낫겠다 싶었고, 어차피 이불 밖은 위험하고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세상 가장 연약한 존재들이 세상 가장 연약한 순간에 그런 걸 알려주고 싶지 않았고, 겸사겸사 굳은 얼굴 근육도 풀어주고 -지난해 말 하도 이를 악물어대는 바람에 잇조각이 떨어질 정도여서 스플린트를 맞추었는데 좀 괜찮은 것 같더니 자꾸 이를 악물어대서 온 얼굴이 뻐근할 지경이다. 내가 알 수 없는 내 마음은 아직도 꽤나 언짢고 어두컴컴해서 한 없이 버티는 중인가 보다 - 웃으면 복이 온다니 지나가던 복이라도 좀 잡아보고 싶기도 하고. 그 생각이 엉뚱한 꼬리를 물어 몸에 멍자국이 있는 어린이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했다.
이 물감은 어디서 묻었을까.
아니에요. 이거는 물감 아니에요.
그럼 뭘까?
이건 아파서 생긴 거예요.
이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나는 녹음기를 켜고 어린이에게 무심한 듯 다정하게 질문하고 사건의 실체를 파악한 뒤 함께 경찰서에 가는 것으로 일단 가늠해 본 시나리오. 만약 가정폭력의 한가운데 놓인 어린이가 말을 꺼내지 못하면 함께 물감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족을 덧붙였던 시나리오는 자연스럽게 나의 어린이 시절을 끌어당겼고, 늘 반복하던 생각을 다시 한번 빠르게 복기한 뒤에, 어린이도 어른처럼 대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린이도, 어른도, 노인도 어차피 다 같은 사람이고 사람들은 상대가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 모른다. 관심 없음으로 퉁치기에는 좀 야박하다 싶어서 그냥 모른다고 해두었다. 어린이 다운 거, 어른다운 거, 노인 다운 거... 다운 것 좀 운운하지 말자 싶어서 어린이에게도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하고, 노인에게도 친구와 대화할 때 자주 등장하는 주제를 꺼내려고 노력했다. 결국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내가 뭘 알고 모르는지도 모르는데 어린이고 노인이고 어른이고 상대가 뭘 알고 모르는지 모르니까, 그런데 내가 무슨 생각을 어디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하면서 버스를 탔고 생각은 잠시 끊어졌다가 이내 다른 생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아, 뿌리를 모르는 건 역시 여러 가지고 궁금하고 답답한 게 많아지는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생각이란 가끔, 꽤 자주 엉뚱한 꼬리를 물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또 일을 하다가 배고픔에 집중력이 뚝뚝 떨어지고 있을 때 탕비실 냉장고에서 소주를 발견했다. 출처를 확인하고 한 병쯤 슥, 마셔도 되겠지 결론을 내렸는데 주문한 닭강정 김밥 세트의 배달 도착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냉장고를 더 뒤적이다가 소주 두 병을 더 발견했고, 역시 출처는 같았으니 더더욱 한 병쯤 슥슥 마셔도 되겠다 싶어 신이 났다.
한 병쯤 다 따라도 너끈히 담아낼 만큼 큰 종이컵이었으나 마시고 싶어 하는 다른 동료를 위해 1/3 정도 남겼다. 무심코 확인한 제조일자가 무려 23년도였다. 이런이런, 와인도 위스키도 아닌 술인데 어서 먹지 않으면 상할 거라고 주절거렸더니 동료들이 '으이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모처럼 오랜만에 야근에, 저녁에, 동료들과의 사무실 돌아가는 이야기까지 보람찼다. 역시 야근은 어쩌다 한번 가뭄에 콩 나듯이 해야 보람차다. 저녁을 먹고 마시고 정리하고 보니 오늘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낸 뒤였더라.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저녁도 먹은 마당에 바로 퇴근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음주에 할 일을 잠시 붙들고 있다가 퇴근했다. 그렇게 소박하게 보람찬 하루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