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ktail Blues
우울증 진단을 받기 훨씬 전부터 나는 내란 중이었다. 늘 내 안은 시끄러웠고, ㄱ이 ㄱ-1의 멱살을 잡으면 ㄴ이 ㄱ의 머리채를 잡았고, ㄱ-2가 ㄴ의 팔목을 물었으며, ㄱ-3은 ㄴ과 ㄱ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 버둥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ㄱ도, ㄴ도 쪼개지고 ㄷ, ㄹ, ㅁ, ㅂ, ㅅ, ㅇ... 생겨나더니 각각의 자음들은 새끼를 치고 누가 누구의 멱살을 잡고 있는지 제 손에 잡힌 머리채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채 한데 얽혀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이 아수라장을, 의사는 우울증이라고 불렀다. 이런 와중에 외란이라도 생기면 안팎으로 똑 죽을 맛이었다. 지난 금요일 백일 넘게 끌던 외란이 바리케이트를 쳤다. 외란을 일으킨 자들은 그 안에 갇혔고, 하나하나 잡아다 죗값을 묻는 일이 남았다. 바리케이트 덕분에 약간 숨통이 트였으나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리케이트 세워진 기념으로 남아 있던 위스키를 털어 먹었다가 급체를 하여 꼬박 이틀을 앓았다. 탄산수에 얼음 동동, 마음도 동동, 위장도 동동. 백일홍도 아니고 꼬박 백일을 넘도록 시달리던 외란이었으니 무엇이든 동동 떠 다녀도 좋을 하루이긴 했다.
글짓기 레슨을 시작하고 두 번째 레슨부터 수강생은 '공식'을 원한다고 했다. 내가 그 공식 때문에 이과도 못 가고 공대도 못 간 것으로도 모자라 글에도 공식이 있다는 것을 지겹게 듣고 또 배우면서도 공식대로 못 써서 20년 삽질을 했는데 공식이라니, 공식이라니. 고객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일단 해준다는 서비스 원칙에 입각하여 공식을 만들어주겠다 하고, 과연 어떤 공식을 만들어줄 수 있는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아니, 냅다 쓰는 연습을 했고 앞 뒤 없이 연습만 했고 누가 툭 치면 탁 쓰는 건 할 수 있긴 한데 그건 그냥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 뿐인데, 물론 그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 나이긴 하지만 어떤 공식에 맞춰 만든 것이 아니라 이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는 데, 그런 내가 어떤 공식을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는 거라고는 마당 쓸기 3년, 물 긷기 3년, 밥 짓기 3년 차에 펜과 종이가 주어진다는 것 정도인데 AI가 대놓고 활약하는 21세기에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뭔가 그럴 듯한 공식을 만드는 것도 사기일 테고. 내가 사기칠 줄 알았으면, 진즉에, 어? 아휴... 이렇게 또 백만 스물 두 번째 내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