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Cocktail Blues

028 - 꾸준하다

Cocktail Blues

by 유정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마지막 진학 상담에서 나에게 ‘예쁘고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는데 공부만 조금 더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하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고, 뜻밖에 진심이 전해져 아리송했다. 내가? 진짜? 왜? 근데 성적의 발목을 잡는 건 수학 말고는 없고, 그 수학의 끝을 한 남자가 잡고 있다는 걸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온통 물음표만 가득했던 상담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 담임 선생님 평온하신지, 평안하시기를.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렵고, 싫은데 예나 지금이나 연습은 좋아한다. 나름대로는 꾸준히 성실하게 한다고는 하는데 어디 한 군데 이가 빠진 것인지 도통 결실이 맺어지지 않는다. 이럴 바에는 깨끗이 털어버릴까 싶은데 놓을 수가 없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라는 게, 꽤나 짠하기도 한 거구나.

사실 모 아니면 도, 퍽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은 지금까지 서너 번 되려나. 5년 혹은 10년마다 한 번씩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결과는 뭐, 대체로 안 좋았다. 결과라는 건 모 아니면 도처럼 양단간에 결단이 나는 게 아니더라. 선택은 그럴 수 있어도 결과는 그게 안 되는 거더라. 이제는 극단적인 게 조금 꺼려지는데 그건 그만큼 겁(怯)이 늘었다, 라고 보기에는 한평생 늘 겁이 많았으나 겁이 없었고 다만 겁(劫)의 무게가... 괴로웠다. 때 되면 문신이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모 아니면 도, 개걸윷은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낀다. 차라리 시한부라면 망설임 없었을 것 같은데 버텨야 할 날들이 까마득하여 망설여지는 기분이라니. 이것은 미련인가 두려움인가.


이를테면 하극상의 느낌으로 회사에서 홀몸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다. 주 5회, 다섯 가지 콘텐츠를 연재하는 프로젝트다. 4주 차를 준비 중이고, 그런 콘텐츠를 기획하고 윗선을 들이받은 과거의 나를 원망하는 중이다. 생각해 보니 이건 하극상이 아니라 석고대죄하는 꼴이 아니었나 싶은데, 당시 마음은 ‘니미럴, 드잡이 한 번 씨게 해 보자구’였다. 아, 몰라. 여차하면 판 엎고 관둘 테야. 어차피 마지막 칼부림이라 생각하고 빼든 칼이었다. 다만 나랑 싸우는 게 힘에 부친다. 이 프로젝트도, 수정을 거듭하는 시나리오도.



그래도 쉼표 같은 순간이 있다. 온종일 시달리고, 저녁도 못 먹고 도착한 공방에서, 선생님들은 자꾸 나에게 뭐든 먹이려 든다. 유부초밥 하나, 알싸한 무생채, 따뜻한 옥수수차 한 잔을 곱게도 먹여 주신다. 유부초밥이 하나뿐이라 미안하다는 선생님께 열 개 같은 하나라 배부르다고 했더니 수줍어하셨다. 모르긴 몰라도 선생님들도 꼬부랑 고개 좀 넘고 산에서 물에서 숱하게 싸워보신 분들인 것 같다. 선생님들은 마을처럼 사람을 품으신다. 아, 이 와중에 향악, 두레가 떠오르는 건 뭐람.


하여간... 지나치게 꾸준한 것도 병인양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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