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다른 곳에 비해 입주자가 적은 것도 아니고, 유휴공간 비율이 더 큰 것도 아닌데 203호는 유난히 한산해 보인다. 여자는 203호 앞에 서면 헛헛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마치 지식이나 정보처럼, 머물러 있지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닌 사람들이 많기 때문인 듯하다.
여자는 벌레를 무서워했다. 여자는 여전히, 몇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크기의 벌레를, 무서워하고 있는지 소름 끼치도록 싫어하는지 고민하고 있지만, 무서움이 더 크기 때문에 무서워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게다가 오른쪽 바깥귀길 속에 입주한 나방과 1박 2일을 함께한 경험은 분명 싫었다기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아마 여자의 무의식이 벌레 학자*를 데려왔을 것이다. 곤충학자도 아니고 벌레 학자라 불리는 것이 벌레 학자로서는 싫기도 하겠지만 여자는 그를 벌레 학자라고 불렀다. 벌레 학자는 여러 가지 ‘벌레’들을 상세한 그림과 함께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벌레 학자는 조금 독특한 언어를 사용했는데 이를테면 ‘Annyeonghaseyo’처럼, 알아듣기도 뭣하고 못 알아듣기도 애매한 언어를 썼다. 더듬더듬 학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도무지 실재하지 않을 것 같은 벌레 그림들을 구경하던 여자는 별 소득 없이 벌레 학자와 이별했다. 벌레 학자를 만난다고 해서 없어질 무서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벌레에 대한 여자의 무서움은 벌레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벌레 때문만은 아니었으니까.
해경 씨는 여자의 첫사랑 중 한 명이다. 첫사랑은 보통… 한 명만 꼽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자의 첫사랑은 되바라지게도 문어발식이어서 비슷한 시기에 여러 명의 첫사랑을 겪었다. 여자의 첫사랑‘들’은 모두 나이가 많았고, 모두 글 깨나 쓰던 사람들이었고, 여자가 아닌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빼어난 외모를 자랑했다. 해경 씨의 외모는 다른 남자들에 비하면 단조로운 편이었지만 오뚝한 콧날과 짙은 눈썹, 날렵한 입술 끝에 매단 고집은 여자를 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여자가 진짜 마음을 뺏겼던 건 그의 빛나는 문장 때문이었다. 여자는 몰래 해경 씨가 집을 비울 때면 그의 노트를 들여다보곤 했다. 포슬포슬한 질감의 종잇장들을 넘기면서 그가 새겨놓은 잉크를 훑어 내릴 때마다 설레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암호 같은 글자들, 문장들. 해경 씨가 세상을 떠나고 여자는 자주 이사를 다녔고, 그의 빛나는 문장들이 담긴 노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잃어버린 해경 씨의 노트를 떠올릴 때마다 여자는 소중한 것들은 어쩌면 기억 속에만 간직해 두는 것이 가장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고, 읊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우연히, 빈 책상 위에서 해경 씨의 노트*를 발견했다. 이미 회사를 떠난 사람이 남기고 간 것인지, 아니면 그저 거기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해경 씨의 노트 중 하나임이 분명했기에 여자는 그 노트를 집으로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그건 해경 씨의 노트가 아니었다. 해경 씨를 흠모한 누군가가 해경 씨를 흉내 내어 알 수 없는 말들을 흘려 써 놓은 노트였다. 하지만 여자는 해경 씨의 흐릿한 기억을 붙들고 있고 싶은 마음에 그 노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진짜 해경 씨의 노트를 다시 손에 넣기 전까지 여자는 그 노트를 간직할 것이었다.
번역가*는 아마 35번지를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여자는 언젠가 번역가에 관한 이야기를 ‘번역’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다. 번역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물들의 이야기를 번역했고, 번역가가 번역한 이야기들은 또 다른 많은 ‘번역가’들에 의해 번역되어 왔는데, 어떻게 번역이 되더라도 동물들의 이야기는 변함없이 다채로웠다. 올곧은 심지를 가진 번역가가, 흔들리지 않고 써내려 간 통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자는 그것이 흥미로웠다. 번역가는 그저 동물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 옮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이해를 바탕으로 쐐기를 박는 해설을 곁들여 전무후무한 ‘작품’을 남겼다. 그래서 수많은 번역가들이 그의 작품을 한 번 더 번역해왔고, 많은 사람들이 아쉬운 대로 ━번역은 정말이지 수많은 함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공감을 표할 수 있었다. 여자는 번역가 덕분에, 의외의 곳에서 세상에 넘쳐나는 ‘번역’에 대한 해답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번역이라는 것, 나부끼는 것들을 읽어내고 넘쳐흐르는 것들을 드러내는 것… 여자가 낱말에, 낱말을 이루는 문자들의 숨은 뜻에 자꾸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는 어찌 보면 모두 ‘번역’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무당*이 좋았다. 여자가 만난 무당들은 열이면 열, ‘반투명한 베일’을 사이에 두고 만난 터라 깊이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여자는 ‘속속들이 알게 되어도 실망하지 않을 존재 목록’에 무당도 올려두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위로. 무엇이든 위로하는 그 넓이, 슬픔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그 깊이로 감싸지 못할 것은 없을 거였다. 그런 무당이 요즈음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손가락질받고 있어 여자는 속상하다. 손가락질받는 건 ‘가짜 무당’이니까,라고 애써 쓴 마음을 달래 보는 여자였다.
뜬금없는 초성 놀이* 하나. “ㅅㅅ을 생각한다”. ㅅㅅ을 보고 어떤 단어가 떠오르든 떠오른 ㅅㅅ을 생각하면 된다. 불과 한두 달 전만 되었어도 ㅅㅅ을 보면 볼이 발그레해졌는데 요즘은 한숨만 나오는 여자였다.
다산*은 4년 전 처음 만났다. 그를 만나러 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다산을 찾으러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 다른 주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있는 곳이 모두 달랐기 때문에 가리키는 방향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지만 어쨌든 그 ‘방향’들은 한 곳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손가락들이 모두 한 군데 모여서 그를 가리켰다면 수월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워낙 이곳저곳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고, 일일이 손가락들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고, 손가락들은 당연히 ‘자신을 기준’으로 다산을 가리킬 수밖에 없었고, 여자는 바닥에 쏟아진 1,000조각짜리 퍼즐 조각을 맞추듯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했다. 그래도 그 과정이 재미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건, 길 위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 위에서 낯선 사람이 되어 낯선 시공간과 낯선 사람을 만나고… 우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하늘이 보기보다 높고 넓다는 사실을 맞닥뜨린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만난 다산은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고, 의외로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친근해진 사람일수록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어려운 것은 왜일까. 드물게 만나 겉도는 이야기만 나누다 헤어지려는 순간 짧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 그것이 너무나 아쉬워 다음에 올 만남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되는 것은 아마도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겨울과 봄 사이, 하지만 봄이 올 것 같지 않던 그즈음 여자는 광화문에서 글 쓰는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사방의 길이와 두께가 똑같이 떨어져 어느 한 군데 어긋난 곳 없이 가지런히 쌓여 있는 책더미 같은 인상을 주었다. 그런데 정갈한 책더미에 한걸음 더 다가서면 되바라졌다는 인상을 주는 책 제목들이 쓰여 있었는데, 가지런히 늘어선 덕분에 책등에 새겨진 각각의 책 제목들은 하나의 의도된 문장처럼 읽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여자가 갖고 있는 ‘글 짓는 사람에 대한 판타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사람이었다. 고운 입술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은 어려운 것이 없었고, 오래된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따뜻했으며, 가슴에 맺히는 남자의 말을 따라 읊으면 마치 오래도록 품어왔던 여자의 생각을 말하는 것처럼 걸리는 곳이 없었다. 이런 남자를 왜 이제야 만났는지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래서 여자는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이런 남자와 연애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망설임 없이 남자에게 좋아한다 고백했고, 남자는 여자의 뜨거운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며 미소 지었다. 그 날부터 글 쓰는 남자는 35번지에 살게 되었다.
벌레 학자 : INSECTA ERECTUS / THOMAS JUNG / H.A.NUKU / G&
해경 씨의 노트 :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 신범순 / 현암사 / 초판 2007년 9월 15일 / 25,000원
번역가 : 이솝우화 -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정본 / 이솝 / 천병희 / 도서출판 숲 / 1판 2쇄 2013년 12월 20일 / 18,000원 § 이솝우화 / 이솝 / 공성표 / 학일출판사 / 초판 1986년 5월 20일 / 2,000원 § 파라독스 이솝우화 / 로버트 짐러 / 김정우 / 정신세계사 / 초판 1991년 5월 9일 / 3,200원
무당 : 개성신당굿 / 양종승 / 샤머니즘박물관 / 초판 1쇄 2013년 7월 31일 / 15,000원
초성놀이 : 삼성을 생각한다 / 변호사 김용철 / 사회평론 / 초판 10쇄 2010년 3월 29일 / 22,000원
다산 : 대한민국 목민심서 / 다산을 사랑하는 공무원 모임 / 아침미디어 / 2012년 8월 3일 / 15,000원 § 다산 정약용과 아담 스미스 / 박홍기 / 백산서당 / 초판 1쇄 2008년 7월 30일 / 22,000원 § 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 / 유봉학·김동욱·조성을 / 백산서당 / 초판 1쇄 2001년 11월 25일 / 12,000원 § 동서 지성사의 교차로 - 괴테와 다산 통하다 / 최종고 / 추수밭 / 1판 4쇄 2008년 3월 25일 / 12,000원 § 최진연의 답사기 - 수원 화성, 긴 여정 / 최진연 / 주류성 / 2011년 4월 29일 / 18,000원
글 쓰는 남자 : 낭송 이옥 / 이옥 / 채운 / 고미숙 / 북드라망 / 초판 1쇄 2015년 2월 4일(乙未年 戊寅月 辛亥日 立春) / 9,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