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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an 01. 2017

204호 : 奧妙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끼리끼리 모여 사는 35번지에서 204호는 그 구성이 다채로운 편에 속한다. 의도하지 않게 이곳도 저곳도 속하지 못한 삶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이곳에 모이게 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204호 사람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다녔던 것은 그들이 어딘가 부족하거나 가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물 흐르듯 흘러 다녔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 위에 떠다닐 만큼 가벼웠지만 스치는 풍경 하나 놓치지 않고 꼭꼭 씹어 삼키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무거운 사람들이기도 했다.


코트 깃을 세운 남자*는 ‘자신의 잘못을 태양 탓으로 돌리던 남자’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첫 만남은 좀 까다로웠지만 좋은 인상으로 남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만나고 싶었다. 유난히 태양이 뜨겁던 어느 날 코트 깃을 세운 남자를 다시 만났다.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잘생겼는데, 여자는 잘생긴 외모보다 허공 어딘가에 있을 태양을 가리키고 있기라도 한 듯 날렵하게 각을 세운 남자의 코트 깃이 더 좋았다. 남자는 빛과 빛 그림자로 그린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프로방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여자는 프로방스가 지명이 아니라 바람결에 흐르는 꽃잎을 가리키는 형용사처럼 느껴졌다.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어느 지명(地名)에 대한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여자는 사진들을 손끝으로 읽어 내려갔다. 남자의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빛과 빛 그림자로 그려진 사진들은 각기 다른 농담으로 풀어지고, 여자의 손끝이 마지막 사진에서 떨어졌을 때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코트 깃이 이끄는 대로, 태양 속으로 사라졌대도 믿을 만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여자는 차를 타고 지방 소도시로 가고 있었다. 도착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여자는 그 지명이 낯설기만 했고, 차 안 공기는 조금 무거웠고, 저만치 터널 입구가 보였으므로 차창을 열 수도 없었다. 터널은 생각보다 길어서 터널을 통과할 때까지 숨을 참아보려던 여자는 무료하게 하나 건너 하나씩 불이 꺼져 있는 조명등을 헤아리다 문득 터널 안을 걷는 남자*를 보았다. 시속 100킬로미터쯤의 속도로 지나쳤기 때문에 그저 남자라는 것만 분간할 수 있었다. 터널 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으레 남자겠거니, 하고 짐작한 것이었으니 그 남자는 여자였을 수도 있었다. 시속 100킬로미터쯤으로 멀어지면서 여자는 사이드미러로 점점 작아지는 남자를 보았다. 어쩐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짧은 순간 여자는 환청처럼 터널 안을 걷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돈!” 끝이 없을 것 같은 터널 안에서 여자는 갑자기 허기를 느꼈고, 당장 무언가 먹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고, 그래서 차 안이 정말 답답하게 느껴졌다. 터널 안을 걸으며 외친 말이 돈이라니. 어쩌면 남자는 터널 밖으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자를 태운 차는 터널을 벗어나고 있었다. 흐린 가을 하늘에선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자가 가을 계곡━103호 이야기 참조━에서 만난 ‘이대 나온 여자’는 당시 학생들에게 몇몇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뭐랄까, 방향 감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가 어디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 관심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이대 졸업장을 기꺼워할 뿐. 그런 이유였는지 몰라도 여자는 그녀가 발표했다는 문장들도, 그녀가 소개하는 사람들도, 관심이 없었다. 이대 나온 여자가 소개한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관심 두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으면서 여자는 204호 한쪽에 남자로부터 받은 명함을 넣어두었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자랐는데도, 심지어 중국 글씨를 배우기까지 했는데도 좀처럼 중국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비현실적일지라도 차라리 ‘프로방스’가 더 친근한 지명일 정도였다. 여전히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공간이지만 ━거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는 또 별개다━ 중국 남자*를 만나고는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조금 생겼다. 중국 남자가 전해준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었고 삶이었으나 소맷부리를 잡아채듯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그 ‘뭔가’에 대해 탐구하려면 너무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고 있고 무얼 보고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뭐 그런 것들. 생각보다 방대하고 짐작보다 연결 짓기가 어려워 제대로 시도조차 못해보고 있지만 중국 남자와는 종종 이야기를 나눈다. 어쩐 일인지 중국 남자와의 대화에 ‘위화’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꽤 오랜 인연이 있다. 여자가 학생 1일 때 처음 만났고, 지금까지도 아줌마는 여자에게 ‘되게 멋진 여자’다. 아줌마는 가끔 시시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아줌마라고 늘 앞서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여자는 아줌마의 시시한 이야기마저 좋았다. 무엇보다 아줌마는 그렇게 천천히 걸어도 된다고 다독여주는 사람이었다. 걸음이 나아가는 꼭 그만큼만 등을 밀어주는 더없이 따뜻한 손. 여자는 그 손이 너무나 좋았다.


술이라면 눈이 빛나는 여자였지만 어쩐지 섞어 마셔야 하는 술은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삿뽀로 여인숙에서 만난 여자가 소개한 테킬라 선라이즈*만큼은 종종 마시곤 했다. 허세 부리고 싶은 날에는 바텐더에게 “테킬라 선라이즈, 테킬라 말고 보드카로 바꿔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가면서, 아마도 대개 허세를 부리고 싶거나 도무지 선택지가 없는 날에는 테킬라 선라이즈를 마시곤 했다. 삿뽀로 여인숙에서 만난 여자는, 창밖에 있는 겨울 햇빛 같은 사람이었다. 겨울 햇빛이란, 으레 창밖에 있으면서도 창틀만 넘어오면 겨울이라는 계절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려서 창 밖 풍경이 아무리 겨울이어도 춥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는데, 현실이 가혹해지리만큼 비현실적인 환상을 보여주었다. 처음부터 삿뽀로 여인숙이라는 곳도 여자에게는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으니 여인숙에서 만난 여자가 비현실적이래도 이상할 것 없었고, 배신감 같은 것도 들지 않았지만, 여자는 삿뽀로 여인숙에서 만난 여자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헛헛했다. 그래서 삿뽀로 여인숙에서 만난 여자가 생각날 때마다, 그녀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흰 숨을 뱉어 놓던 모습이 그리울 때마다 어쩔 수 없이 테킬라 선라이즈를 마시게 되는 것이었다.


옛날 사람*은 여자에게 술 생각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여자가 언제인들 술 생각을 안 할까마는… 옛날 사람은 유난했다.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말도 지겨우리만큼 아름답고, 정말이지 은 쟁반에 옥구슬을 굴리면 저런 소리가 날까 싶게 고운 음성에, 어둠 한 조각을 떼어내 얹어 놓은 것 같은 머리카락… 그보다도 옛날 사람에게는 욕심이 있었다. 저와 싸워 이겨보겠다는 욕심. 그것이 그 사람을 살아있게 했다. 그 욕심은 여자로 하여금 옛날 사람에 관한 무수한 소문은 다 부질없는 것이라고, 그깟 것, 티끌만도 못한 그것들 치워버리면 그만이라고, 맹신하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옛날 사람은 여전히 ‘옛 날’을 살고 있지만 그 ‘옛 날’이 무수한 소문으로 채워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여자는 옛날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술을 찾게 된다. 그 소문이 칭송으로 덧칠된 것이라 해도 덧칠된 소문일 뿐, 옛날 사람이 가진 진짜 욕심을 보여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204호 앞을 서성이던 여자는 문득 204호가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래거나 왜곡될 기억마저도 없이 존재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큼 오묘한 것이 또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어느 봄, 여자는 오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고민하는 남자*를 데려왔고, 술자리 내내 고민하는 남자 대신 여자와 친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자와 친구는 고민거리가 많았고, 자신들의 고민을 고민하기에도 바빠서 고민하는 남자가 무얼 고민하고 있는지 물어볼 짬이 없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여자는 고민하는 남자를 앉혀 놓고 술자리 내내 말없이 있느라 고생한 그의 고민을 들어보기로 했다. 남자는 마침 여자가 고민하고 있던 100가지 중에 하나였던 언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 고민들이 여자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서 한참 귀 기울여 들었더랬다. 그런데 남자의 고민들은 하나같이 오래 두고 생각하고 확인해야 할 것들이어서 여자는 이내 지쳐버렸다. 조만간 다시 이야기해 보자고, 204호에 남자의 거처를 마련해 준 여자는 1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고민하는 남자를 다시 찾지 못하고 있다. 남자의 고민을 공유하기에는 여자 스스로의 고민이 너무나 많았고, 여자의 고민들은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내일의 고민까지 오늘 당겨 쓰는 여자였음에도 고민들이 너무나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고민이라는 것이 백해무익한 것까진 아니지만 피로하게 만드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서 여자는 좀 쉬고 싶었다. 쉼 다운 쉼도 못하고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여자는 평소처럼 늘 고민해오던 100가지 중에 하나인 마음에 대해 고민하다 고민하는 여자*를 만났다. 하지만 고민하는 여자는 여자와 결이 조금 달라서 고민하는 여자에 대한 관심은 이내 식어버리고 말았다. 마음 한가운데서 마음을 고민하는 것과 마음 바깥에서 마음을 고민하는 것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일이었는데, 고민하는 여자의 고민은 마음 바깥에 있었다. 바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고민하는 여자에게 샘이 나서 그만,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았다.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자주 만나면 된다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서.


여자는 길 찾는 남자*와의 만남을 기분 좋은 우연이라 생각한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우연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은 것이 될 수 있었다고도 생각한다. 남자가 찾고 있던 길을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몰라도, 못 찾았대도 좋았다. 그 남자도 여자도 계속 찾고 또 찾아야 할 것이 길이었으니, 잘못된 길로 접어들기도 하고 제 길로 찾아들기도 하고… 뭐, 그래야만 하니까. 무언가를 찾고 있고 그 무엇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좋은 우연이 되고 좋은 길동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을 마주한 여자*를 만나고 나서 여자는 더더욱 죽음이라는 것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사는 게 뭐라고’ 죽음이 무서울까. 죽는 게 뭐라고 죽음이 싫을까. 여기 있으면 저기 없으며 저기 있으면 여기 없고, 그런 것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여자는 그저 세상에 닮은 것들이 참 많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저 이미 너무 오래 살아온 것만 같아 노곤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백수동 35번지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생명은 고양이가 아닐까 싶다. 고양이가 바글바글, 아, 좋아라. 204호에는 고양이 네 마리*가 살고 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저마다 애정하는 사람을 마음에 품은 네 마리의 고양이들. 여자는 35번지에 살고 있는 고양이들을 마주칠 때마다 왜 고양이가 좋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다른 결론을 내리곤 했다. 그래서 여자는 고양이가 좋은 이유가 너무 많거나 도통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마다 고양이는 정말 오묘한 생명체라고, 머릿속에 우글거리는 고양이들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에 갖다 대곤 했다. 



204호 사람들

코트 깃을 세운 남자 : 태양의 후예 / 알베르 카뮈 / 김화영 / 책세상 / 개정 1판 1998년 3월 10일 / 8,000원

터널 안을 걷는 남자 : 서커스 서커스 / 최인석 / 책세상 / 초판 1쇄 2002년 10월 5일 / 7,000원

‘이대 나온 여자’가 소개한 남자 :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 / 가브리엘 G. 마르케스 외 / 김훈 외 / 푸른숲 / 첫판 6쇄 2003년 4월 10일 / 8,000원

중국 남자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위화 / 이보경 / 푸른숲 / 첫판 1쇄 2000년 5월 31일 / 8,500원

아줌마 : 아주 오래된 농담 / 박완서 / 실천문학사 / 초판 2쇄 2000년 11월 1일 / 8,000원

테킬라 선라이즈 : 삿뽀로 여인숙 / 하성란 / 이룸 / 1판 6쇄 2000년 10월 9일 / 7,500원

옛날 사람 : 나, 황진이 / 김탁환 / 푸른역사 / 초판 4쇄 2002년 9월 18일 / 9,500원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 : 부엌 / 오수연 / 이룸 / 초판 3쇄 2001년 11월 8일 / 7,500원 § 잠자는 숲 속의 남자 / 신이현 / 이가서 / 초판 1쇄 2003년 11월 29일 / 8,800원 § 내 사랑은 그 집에서 죽었다 / 김형경 / 사람풍경 / 초판 1쇄 2012년 7월 27일 / 14,500원 § 뉴욕 이야기 : 고담 핸드북 / 소피 칼 · 폴 오스터 / 심은진 / 마음산책 / 1판 1쇄 2007년 1월 25일 / 9,500원

고민하는 남자 : 인간과 말 / 막스 피카르트 / 배수아 / 봄날의 책 / 초판 4쇄 2014년 11월 20일 / 13,000원

고민하는 여자 : 마음사전 / 김소연 / 마음산책 / 1판 2쇄 2008년 1월 30일 / 12,000원

길 찾는 남자 : 실내인간 / 이석원 / 달 / 1판 3쇄 2013년 9월 9일 / 12,000원

죽음을 마주한 여자 : 사는 게 뭐라고 / 사노 요코 / 이지수 / 마음산책 / 1판 1쇄 2015년 7월 15일 / 12,000원

고양이 네 마리 : 여백이 / 봉현 / 난다 / 초판 1쇄 2015년 12월 15일 / 14,000원 § 탐묘인간 / SOON / 애니북스 / 1판 3쇄 2012년 10월 22일 14,000원 § 탐묘인간 NEW 1·2·3 / SOON / 애니북스 / 12,000원·13,000원·13,500원§ 고양이가 봉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 제프리 브라운 / 사나 / 애니북스 / 초판 4쇄 2010년 9월 17일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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