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처음 백수동 35번지에 이 건물이 지어질 때부터 205호는 그 자체로 한 동네고 마을이었다. 몇 번의 보수 끝에 울타리가 좀 흐트러지고, 그러다 보니 좀 어색해지기는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205호는 하나의 부락처럼 보인다.
대답하는 고양이*는 여자가 급히 궁금한 것이 있어 데려온 고양이다. 여자는 어느덧 5년 넘게 두 마리 고양이와 살아왔으니만큼 고양이에 대해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있었다. 대답하는 고양이는 아는 것만큼 묻는 것만큼 대답해주기는 했지만 여자의 고양이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대답하는 고양이와 시간을 보낸 여자가 깨달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사람이 사람이듯 고양이는 고양이일 뿐이라는 것. 쓸모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는 고양이라는 존재가, 아름답고 쓸모없는 또 다른 존재들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는 것.
여자의 ‘헌팅’━101호 이야기 참조━은 시간이 흐를수록 뜸해졌고, 그나마도 직접 나서기보다 온라인에서 한층 가벼워진 만남을 더 즐기는 일이 많아졌다. 집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헌팅을 나설 때마다 한두 번은 꼭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른바 커다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늘 여자로 하여금 쌈짓돈을 먼저 고민하게 만들었고 결국 헌팅 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고심 끝에 205호에 커다란 사람들의 거처를 마련했다. 그들을 만나고 나면 여자는 주둥이가 열린 고무풍선에서 마지막 바람 한 줌이 빠져나가는 순간을 본 기분이 들었다. 공기 없이 무거워진 몸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 든 것이 없어 빈 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무언가 있었음을 기억하는 몸의 기억을 만나게 되는 순간. 찰나이기에 다행인 순간. 그들은 커다래서 땅을 디뎌야만 설 수 있었고, 어디에 서 있는지 늘 인지해야만 했지만 커다란 덕분에 무엇이든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때로 단조로웠지만 자꾸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고 정전기 때문에 자꾸 얼굴에 들러붙는 머리카락처럼 한동안 마음에 뭔가를 붙여 놓기도 했다. 그래서 여자는 언젠가 커다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의 여자는 제 그릇이 커다래지기보다 깊어지는 쪽이 더 어울리는 게 아닌가 싶다. 도긴개긴인 듯 보여도 커다래지는 것보다는 꼼지락꼼지락 땅을 파는 쪽이 제 성향에는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여자였다.
첫 만남부터 마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다. 여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압도까진 아니어도 시선을 끄는 카리스마, 뭐 그런 걸 갖고 싶었는데. 그런 것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부터는 그저 선망하는데 전념하기로 했다. 가끔 지나치게 전념하고 몰입해서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여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호랑 아낙*을 선망하게 되었다. 고양잇과 동물이라면 덜컥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여자인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호랑 아낙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때 그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팽개치고 나온 그 순간부터 호랑 아낙은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기에 관심 밖에서 암약하던 호랑 아낙의 성과는 관심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 뿐이라는 게 슬플 뿐. 그러니까 호랑 아낙 또한 어쩔 수 없이 숱한 ‘곰’들에게 윤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좋았다. 여자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는 호랑 아낙이어서. 여자가 갖고 있지 못한 것들을 갖고 있는 호랑 아낙이어서. 여자가 할 수 없고 갖지 못한 것들이 과연 할 수 없고 갖지 못해 슬퍼해야만 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한 때 헌책방에 빠져 있던 여자는 신촌 어디쯤에 있는 유명 헌책방━헌책방이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몇 군데 없다는 이유로 유명해졌다는 게 서글퍼서 헌책방에 잠시 잠깐 혹해있었다━에서 어떤 교보재*를 발견했다. 두꺼운 데다 헌책방에 있었으니만큼 원래 가격의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되었던 터라 여자는 냉큼 교보재를 구입했었다. 여자는 사실 이 교보재를, 교보재로써 구입한 것은 아니었고 한 여자의 삶이 궁금해 구입한 것이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든 생각이 ‘이것은 교보재다’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이 책은 한 여인의 일대기가 아닌 교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책’은 한 여인의 삶을 마구잡이로 가져다 한 권의 교보재로 만든 셈이었다. ‘이것은 교보재다’라는 것에는 놀랍다는 감탄이 더 많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는 그 감탄이 부끄러워졌고, 스스로가 얼마나 ‘남성적 시선’에 길들여지도록 학습받았는지 깨달았고, 생각보다 더 많이 ‘남성적 시선’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러려고 여자로 태어났나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순종이었다고 해서 잘못이 덮어지는 게 아니어서 더 슬펐다. 여자와 함께 사는 두 고양이 중 한 마리가 제 발톱으로 책 등을 할퀴어 놓음으로써 일차적인 처벌(?)이 있었고, 또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이 교보재는 아직 205호에 있다. 아, 어떤 장르의 교보재냐면… ㅂㅈㅅ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불온한 구성원이 있는가 하면 이인간*처럼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는 구성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씨 성에 인할 인因, 볼 간看자를 쓰는 이인간씨는 늘 유쾌하다. 가끔 얄밉기도, 복장 터지게도 하지만 그래도 미워만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인간이 정말!’하고 일갈하는 순간 온갖 미움이 다 녹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책 읽는 행위란 매우 위험한 것*이다. ㅇㅇ. ㅇㄱㄹㅇ.
틀리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의 차이를 따지게 되면서부터 여자에게 ‘다르다’는 것은 무궁무진한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다른 것이 가득할 수 있는 이유부터 무엇이 다르고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차라리 틀린 것은 쉬웠지만 그마저도 다르다는 것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누구든 ‘다르다’를 ‘틀리다’고 할 때, 혹은 정말 달라서 다르다고 할 때, 이것은 정말 다른 것인지 아니면 틀린 것인지를 따져야 할 때마다 여자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그러다 상문 씨*를 만났다. 상문 씨는 여자의 취향에 부합하기도, 부합하지 않기도 했다.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는 취향, 마치 컴퓨터처럼 세상 모든 지식을 다 꿰고 있는 듯 명석한 두뇌를 선망하는 취향에 부합했다. 부합하지 않는 것은… 사실 딱히 없었다. 여자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았다기보다 그저 여자 스스로 이 ‘다름’을 어찌 대해야 하는지 난감했을 뿐. 어쨌든 상문 씨는 다른 듯 다르지 않은 곳에서 출발했고 일반적인 것이나 통계적인 것에서도 많이 벗어나 있을 만큼 달랐다. 그밖에 다른 점들이 굉장히 많은 상문 씨였지만 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주워섬긴다는 것이 여자와 가장 다른 부분이었다. 그래서 여자는 상문 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공감은 할 수 있었어도 이해하기는 어려웠는데, 아마도 다르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공감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사실 공감이라는 것도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긴 했지만, 공감이 무협만화 주인공이 물 긷고 청소하고 밥 지으며 수련하듯 수련하다 보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해는 뭐랄까, 차원이 다르달까. 떠나가는 상문 씨의 뒷모습이 씁쓸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공감은 가는데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지지하겠다고 약속할 수 없는 스스로가 참 부족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저 상문 씨와 여자는 ‘다르기 때문에 괜찮다’는 핑계도 부끄러웠다. 상문 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서던 여자는 문득 이게 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원망스러운 누군가에게 욕이라도 하듯 지껄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여자는 이름도 낯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자연스레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어쩌다 나서면 늘 보던 골목, 가게와도 어색해 부유하듯 길 위를 떠다니다 집으로 돌아오기 바빴다. 광장 같은 곳에 주저앉아 볕 쬐는 일을 즐기던 때도 있기는 했다. 여자가 사람 많은 장소를 꺼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여자도 궁금했지만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한두 가지가 아닐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는데, 그 숱한 이유 중에 광장*도 있는 것 같았다. 광장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자의 기억 속에 또렷이 자리한 몇 광장이 있었고, 그 광장에 설 때마다 여자는 따뜻한 햇살이 아니라 거센 바람을 마주해야만 했었다. 광장에 선다는 것은 태풍의 눈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일과 같았다. 광장에서는 조금만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기면 거센 바람에 휩쓸려버렸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바람에 휩쓸려 어딘가로 사라졌고, 여자는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이 무거워져서 한숨짓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여자는 광장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광장을 감싸고도는 바람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광장 한 쪽에 개미 눈곱만한 희망을 심었다.
‘잘못 쓴 글씨’가 흔치 않은 요즘 세상에서 지우개를 쓸 일은 없다. 생각도 사람도 하다못해 사랑도 연필로 쓰는 일은커녕 볼펜으로도 쓸 일이 없는 것이다. 여자는 가장 기본적인 시행착오 조차 없어서 세상이 생각보다 빨리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지우개 없이도 저절로 지워지는 것이던 기억마저 요즘은 저절로 지워질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정말이지 지우개는 제 존재를 제 스스로 지워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여자는 지우개나 연필, 펜, 노트 같은 문구류를 수집하곤 했다. 오래도록 한결같은 노트, 잘 지워지는 연필, 예쁜 볼펜이나 만년필 같은 것들. 검은색 지우개*도 그중 하나였다. 선연히 붉은색 종이로 포장돼 있던 검은색 지우개는 정말 잘 지워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자는 그 지우개를 이따금씩 상자 속에서 꺼내 들여다보기만 했는데, 그건 지우개가 여러모로 예뻤기 때문이다. 쓸모없음으로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검은색 지우개는 상자 속에서 나올 때마다 여자의 시간을 조금씩 아주 깨끗하게 지웠기 때문에 아름다워서 쓸모없다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하긴 했다. 그래서 여자는 어디 다른 세상에라도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곤 했고, 대체 어디서 만들어진 지우개이기에 이렇게 신통방통한 기능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찾아보고도 싶고 가능하다면 만나서 어떻게 만든 지우개인지 물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렇게 하진 않았다. 세상 어딘가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어느 장인이 한 땀 한 땀 어련히 정성껏 만들었겠나 싶어서. 비밀인 채로 두어야 이 검은색 지우개가 더 쓸모없어도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여자는 꽤 오래 어떤 사랑꾼*과의 만남을 회피해 왔다. 다들 그 사랑꾼을 칭송했지만 다들 그 사랑꾼을 칭송했기 때문에 만나기 싫었다. 어떤 의무감에 어떤 사랑꾼을 만난 여자는 짤막하게 한숨을 쉬는 것으로 그와의 만남을 갈음했다. ‘하이고… 부질없다’.
203호 이야기에서 밝혀졌듯 여자의 첫사랑은 한둘이 아니다. 그들 때문에 설렜고, ━그 첫사랑‘들’이 하나같이 잘생겼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 때문에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때의 그들을 떠올리고 그때의 아이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에 첫사랑들이 남겨 놓은 조각을 수집하고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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