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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an 31. 2017

207호 : 畫廊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여자는 그림에 관심이 많아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그림을 모으곤 했다. 보통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첫 그림을 선물 받는다던데, 여자는 부모로부터 그림을 선물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 학생 1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림을 보았더랬다. 어쩌면 여자는 왜인지 모르게 지워진 것 같은 유년의 무언가를 찾고 싶어서 그림을 모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여자의 그림 취향은 조금 치우쳐 있다. 여자가 좋아하는 그림에는 늘 동물이 있었고, 동물이 없으면 사람이라도 있었다. 동물도 사람도 없는 그림은 없었다. 여자는 그림을 살 때 무슨 주의니, 무슨 파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들은 굳이 그림이 아니어도 차고 넘쳤고, 그림에서까지 그런 것들을 고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그런 것을 알아두지 않아도 좋은 그림들을 모았다. 그림이나 그린 이에 얽힌 뒷이야기라면 몰라도 주의라니. 여자는 그림 볼 때 굳이 주의를 따져야 한다면 ‘손대지 마시오’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틈틈이 모은 그림들을 모아 207호를 화랑처럼 꾸몄다. 


여자가 처음 수집한 그림의 제목은 푸우*였다. 언제나 배가 고파서 늘 꿀을 찾아다니는 곰을 그린 그림이다. 곰은 정말 사랑스러웠고,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여자는 학생 1로 지내던 시절 ‘푸우 컬렉션’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의 ‘푸우 컬렉션’은 모두 카피본이었고, 사춘기 소녀의 ‘덕심’을 성급히 채우는데 급급했던 그 카피본들은 어른이 된 여자가 보기에 조잡했다. 조잡해진 컬렉션을 다 처분한 여자는 ━일기장에 붙여두었던 것은 하는 수없이 남겨두었다━ 푸우 한 점을 샀다. 자신의 윗입술이 살짝 들린 것이 공갈젖꼭지 때문이라는 사실이 떠오를 때마다 여자는 ‘푸우’ 앞에 한참을 앉아 있곤 했다. 


뭐 한 번쯤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던데 여자에게는 늘 머무는 것이었다. ‘몹시 빠르게 부는 바람과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이라더니 과연 몸을 가눌 겨를이 없었고, ‘봄을 생각하는 기간’이라고도 하던데 그래서인지 마음속에는 자꾸 온갖 잡것들이 자꾸 생겨났고… 인간에게는 네 번의 생이 있다던데 이 지랄 맞은 사춘기는 과연 몇 번째 생인지 도통 모르겠지만 어쨌든 첫 번째 사춘기가 왔을 때, 여자는 어두운 것들이 좋았다. 그러니까 첫 번째 사춘기는 어두컴컴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 어두컴컴하던 시절에 한 푼 두 푼 용돈을 모아 산 그림이 바로 소년소녀들*이다. 그림과 여자의 비슷한 듯 다른 듯 비슷해 보이는 서로 다른 어두컴컴함이 한 몸처럼 지냈던 시절이었다. 여자의 겉과 속의 온도차가 가장 컸던 시절이었다. 그림을 들이고 한동안 여자는 비록 카피본이긴 했지만 무려 ‘푸우’를 붙여 둔 일기장에 주로 두 글자로 된 단어들을 적었더랬다. 죽음, 우울, 눈물, 슬픔, 절망, 분노, 저주… 지금 같으면 꿀밤을 먹였을 ━‘오구오구, 우리 애기 그랬쪄요’라는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리면서 때려주었겠지. 주토피아에서 토끼끼리만 서로 귀엽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예민한 시기니까, 그 두 글자 단어들은 그저 지나갈 것들이었으니까━ 그런 단어들을. 한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려있던 그 그림은 이제 207호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걸려 있다. 다른 그림들이 생기기도 했고, 어두컴컴한 곳에 어울리는 그림이기도 했고, 일종의 조명처럼 은은한 어두컴컴함으로 다른 그림들을 빛나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얀 개*는 하얀 개와 노란 새, 그리고 머리카락이 몇 가닥 없는 남자애가 개집 앞에서 제각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이다. 207호에 걸린 ‘하얀 개’는 방대한 연작 중 하나다. 사실 여자는 하얀 개보다도 ‘하얀 개’ 연작에 등장하는, 늘 담요와 함께 하는 남자애를 더 좋아했다. 하얀 개는 개답게 늘 행복했고 그 모습이 보기 좋았고 그런 개 한 마리 있었으면 싶기도 했지만 여자는 그 행복을 감당하거나 맞장구 쳐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D”인 하얀 개는 저 혼자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말도 하지만 “3D”인 개들은 혼자 밥을 먹을 수도 화장실을 갈 수도 말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여자는 그림 속 개가 더 좋았다. 하얀 개보다 더 좋아하긴 했어도, 늘 담요와 함께 하는 남자애도, 비슷한 이유로 그림 속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 쓰다 보니 어쩐지… 여자가 개를 키우지 않는 이유, 혹은 연애하지 않는 이유를 쓴 것 같은 찜찜한 기분이 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하얀 개’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검은 개*는 함께 살고 있는 놀라 아줌마를 위해 모험을 떠났던 개를 그린 그림이다. ‘검은’ 개를 그린 그림이니까 개는 검은색이지만, 아니 검은 개마저 알록달록한 그림이다. 알록달록하지만 한편으로 차분한 구석도 있어서 ‘이거 뭐야, 몰라 무서워’라고 할 만큼 알록달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207호에 걸릴 수 있었다. 


여자는 서로 다른 물성들을 이어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같은 물성을 가진 것들끼리, 기왕이면 매끈하게, 기왕이면 가지런하게 이어 붙이는 걸 더 좋아했다. 그런 여자가 콜라주*를 걸어둔 것은 의외였다. 그림보다도 설명에 붙들려 덜컥 산 그림이었는데, 보다 보니 그림에도 정이 들었다. 버려져서 쓸쓸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이라 좋았다. 여자가 버린 것은 무엇이었는지, 여자는 무엇으로부터 버려졌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림이라 그림을 볼 때면 좀 쓸쓸했지만 쓸쓸해서 좋았다. 그래서 여자는 쓸쓸한 것들이 생길 때마다 슬슬 쓸어다 그림 앞에 쌓아 두었다. 


동그라미 안에 여러 가지 모양이 규칙적으로 가지런히 배치돼 있는 그림, 만다라*를 싫어할 리 없는 여자였으므로 207호에 만다라가 걸리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207호에 걸린 만다라는 계절을 담고 있어서 더 좋았다. 앞에 설 때마다 먼데서 가까이 가 구석구석 꼼꼼히 보고 다시 멀찌감치 떨어져 동그라미 속에 예쁜 색깔과 문양들이 한데 섞인 것도 보고, 여러모로 보기 좋은 그림이었다. 


놔*는 조금 독특한 세상을 여행하는 소년을 그린 그림이고, 그림 제목인 ‘놔’는 소년의 이름과 같다. 소년이 여행하는 세계가 어두컴컴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보니, 그림의 분위기나 선도 어두컴컴하다. 여자가 직장 다닐 때 구입한 것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두컴컴한 것이 마음에 들어 산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두컴컴하다는 것 말고 여자의 마음을 끄는 것이 없어서 ‘소년소녀들’ 그림이 만든 어두컴컴함의 가장 안쪽에 걸리게 됐다. 존재감 없는 ‘놔’였지만 어두컴컴한 것들은 원래 존재감 없음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들이니까, ‘놔’도 섭섭해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다. 


갤러리에서 처음 발견하고 한눈에 반해버린 붉은여우*는 여자가 아끼는 그림 중 하나다. 여자는 한 때 여우도 고양잇과 동물인 줄 알았다. 그래서 여우도 고양이 다음으로 좋아하는 동물이었는데, 갯과 동물인 것을 알고 좋아하는 마음이 시들해졌더랬다. 그래도 이 붉은여우는 정말 좋았다. 가본 적 없지만 가본 것만 같아 가보고 싶은 북유럽 어디쯤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붉은여우는 정말 예뻤다. 아유,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을 텐데. 진짜로 예쁜데. 


그림 중에서도 고양이 그림이 가장 많다, 고 하기에는 두 점뿐이지만 어쩐지 고양이 그림이 가장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207호뿐 아니라 35번지 곳곳에 고양이 투성이━고양이 털, 고양이 발톱, 고양이수염, 고양이 인형, 고양이 책, 고양이 액자… 종류가 많기도 많지만 그중 으뜸은 고양이 털━이기 때문일 것이다. 돌고 도는 고양이* 그림은 204호에 사는 ‘죽음을 마주한 여자’가 그린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는 멈추지 않고 구르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돌았다. 그렇게 돌고 돌다가 마침내 수레바퀴를 부수는데, 하아 겹겹이 쌓인 그 감정들을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을까. 그저 하염없이 그림을 바라볼 뿐…. 가장 아끼는 그림이지만 자주 볼 수 없는 그림이기도 한 이유다. 


고양이는 어떤 모습이어도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니양이* 그림도 그렇다. 비록 뚱뚱하고 욕심 많고 험상궂게(?) 생겼을지라도 다른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대화가 서툰 종족은 가족”이고 서툴러서 틈을 못 볼지라도 서툴기 때문에 틈을 내어줄 수 있고, 그 ‘틈’을 가장 잘 가지고 놀 줄 아는 것이 고양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먹으로 그린 그림도 좋았다. 보고 있으면 누군가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같아 좋았다. 207호에 걸린 두 점의 담채화*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지만 그림을 볼 때마다 여자가 느끼는 감정은 같았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좋은 것. 그리고 벼루에 먹이 갈리는 소리, 먹을 머금는 붓끝, 화선지에 선을 그을 때 종이가 물과 색을 한 번에 머금는 소리, 그리고 먹먹한 묵향. 그러고 보면… 담채화뿐 아니라 모든 그림에는 소리가 담겨 있었다.


하늘에 사는 곰*은 유명한 그림이라기에, 마침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기에 산 그림이다. 그림을 보던 여자는 어쩐지 울컥한 마음이 들어 그림을 꼼꼼히 보지 못했다. 어둑한 그림이었고, 곰은 슬펐고, 곰이 슬펐던 이유와 같은 이유로 여자도 슬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는 “유명한 그림이라더니 허명이었군” 하고 뾰로통하게 중얼거리곤 아무 빈 벽에다 대강 걸어두었다. 그림 자체만으로는 정말 만족스럽지 않았던 데다, 진실을 마주한다는 건 피곤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사진은 관광지 여행과 같았다. 늘 보던 것 혹은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그도 아니면 어느 기억 속에서 마주했던 것을 굳이 직접 봐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때 사진을 잘 찍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그래서 카메라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배워보기도 했지만 여자보다 카메라를 잘 다루는 사람은 많았고, 너무나 아름다워 오래 두고 간직하고 싶은 것들은 오롯이 가둘 수 없었고, 그래서 그런 것들은 가둬두기보다 기억 속에 풀어두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래도 이따금씩 마음에 닿는 사진들이 있었다. 늘 보던 것,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어디엔가 있을 법한 것에 감정을 담아내는 사진이 종종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한번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사진이 있었다. 정작 사진첩*에는 그런 사진들이 없었다. 그저 다른 일에 참고하기 위해 산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구도라든지 색깔이라든지 분석하는 데는 영 젬병인 여자는 그 모든 것들이 감정을 촉발시킨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덮어두기 바빴다. 아니, 열어봐야 한다는 걸 매번 잊어버린다. 이런 버릇이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가고 있지만 ━여자에게 분석하는 능력이라는 게 있기는 한 것인지, 어떤 날은 등짝을 찰지게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후우… 개가 똥을 끊지….


걸려 있을 수 없어 세워져 있는 서화첩*은 그림보다 글이 더 많아 그림 보는 재미가 좀 덜하지만 제법 볼만하다. 어린아이의 마음을 읽는다고 해서 노인의 마음을 읽는다고 해서 어린아이의 마음과 노인의 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의 곁에 있는 그림들이 참 고왔다. 어른이 되어 읽는 어린아이의 마음도 늙지 않은 채 읽는 노인의 마음이 불러내는 것은 질투뿐이라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더 이상 어린아이 일 수도 없고, 꼬박꼬박 하나씩 나이를 먹어야 늙을 수 있는 여자는 서화첩을 보고 마음이 어두워질 때면 어딘가에 ‘낑겨’ 있는 건 퍽이나 고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207호 사람들

푸우 : 푸와 벌꿀 / 세종문고 / 초판 1999년 4월 25일 / 5,000원

소년소녀들 :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 / 팀 버튼 / 윤태영 / 새터 / 초판 1999년 12월 12일 / 8,000원

하얀 개 : Dogs Are From Jupiter 목성에서 온 개(달에서 온 고양이) / 찰스 M. 슐츠 / 아이작 더스트 / 신영미디어 / 초판 2002년 10월 25일 / 7,500원

검은 개 : 위대한 뭉치 / 고경숙 / 재미마주 / 초판 2쇄 2007년 1월 19일 / 25,000원

콜라주 : 나야, 나! / 고경숙 / 재미마주 / 초판 2009년 8월 5일 / 18,000원

만다라 : 수레를 탄 해 / 강혜숙 / 상 / 1판 1쇄 2008년 6월 10일 / 12,000원

놔 : 먼지의 나라 Die Welt des Staubes / 강문선 / 초판 2006년 2월 28일

붉은여우 : 여우모자 / 김승연 / textcontext / 초판 1쇄 2009년 9월 19일 / 18,000원

돌고 도는 고양이 : 100만 번 산 고양이 / 사노 요코 / 김난주 / 비룡소 / 1판 38쇄 2015년 1월 9일 / 8,500원

니양이 : 삐약이 엄마 / 백희나 / 책읽는곰 / 초판 1쇄 2014년 12월 10일 / 12,000원

담채화 : 한밤중 개미 요정 / 신선미 / 창비 / 초판 1쇄 2016년 11월 18일 / 13,000원 § 방귀쟁이 며느리 / 신세정 / 사계절 / 1판 1쇄 2008년 10월 1일 / 9,800원

하늘에 사는 곰 : 별이 된 큰 곰 / 리비 글레슨 / 아민 그레더 / 김연수 / 중앙출판사 / 1판 5쇄 2005년 1월 15일 / 8,000원

사진첩 : CITY ROMANCE & PROCESS / 오상택 / The Center of Visual Art BODA Inc. / 2010년 4월 16일 / 18,000원

서화첩 : 처음 받은 상장 / 이상교 / 허구 / 국민서관 / 1판 2쇄 2005년 12월 10일 / 7,000원 § 먼지야, 자니? / 이상교 / 도서출판 산하 / 1판 1쇄 2006년 5월 12일 / 9,500원 § 뒤뜰에 골칫거리가 산다 / 황선미 / 봉현 / 사계절 / 1판 1쇄 2014년 3월 25일 / 12,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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