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Feb 10. 2017

208호 : 賞冊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208호에는 내일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내일만 사는 사람들은 여자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여자는 오늘만 사는 게 더 좋았기 때문에 모두와 오늘 만나 오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는 오늘 그들의 첫인상을 가늠하면서 내일 만날 것을 기약하곤 했는데, 그 오늘로부터 3년이나 멀어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내일만 살고 있다.


그러니까 3년 전 여름, 여자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글 쓰고 싶은 마음이야 늘 갖고 있지만 일수도장을 여러 날 못 찍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일과 더위와 빚에 치이던 어느 날, 여자는 공고문을 보았다. 짧은 글을 써내면 그중 잘 쓴 사람을 가려 뽑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100명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처음으로, 계획적인 ━습관을 잘못들이기도 했고 숲 보다 나무에 집착을 하는 바람에 계획이란 것은 늘 뒷전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획적으로 쓴 글을 계획적으로 보내고 발표하는 날, 계획적으로 무심하게 오늘을 보내던 여자는 전화 한 통을 받는다. “1등 축하드려요. 짤막하게 소감 한 말씀해주시겠어요?” 여자는 좀 더 계획적으로 상냥하게 통화를 끝냈고, 며칠 뒤 여자의 집으로 정말 100명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100명 중에 스무 명은 친분이 있는 극단에 보내어 무대를 보게 했고, 또 스무 명쯤은 지인들과 단체 미팅을 시켜주었고, 또 스무 명쯤은 아이들에게 보내주었다. 그러고 남은 사람이 마 흔남 짓. 그중 일부가 208호에 남았고, 208호에 못 다 들어간 나머지 사람들이 35번지 곳곳에 흩어져 산다. 그 덕분에 35번지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강 제이 주를 겪어야 했고, 강제이주였지만 나름 평화롭게 마무리되어 지금의 35번지와 같은 꼴을 갖추게 되었다.



208호에서 내일만 사는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 영혼의 자서전 상·하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예브게니 오네긴 / 알렉산드르 뿌쉬낀 § 무기여 잘 있거라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우신예찬/ 에라스무스 § 장미의 이름 상·하 / 움베르토 에코 § 수용소군도 /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 유토피아 / 토마스 모어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 토마스 만 § 소송 / 프란츠 카프카 § 모비딕 상·하 / 허먼 멜빌




여자가 3년 전 여름 써냈던 글은 [제1회 낭만서점 짧은 이야기 공모전]이었다. ‘서점에 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짧은 글을 써내야 했다. 그래서 여자는 ‘서점에 갔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글을 썼고, 공모전이니만큼 뭔가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계획 아래 쓴 글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두컴컴함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여자는 어두컴컴한 것으로 자그마한 긍정을 확대시키는 것을 계획하여 쓴 글이었다. 공식적으로 ‘그동안 헛짓한 거 아님’ 인증을 받은 것이라 참 기쁘고 고마웠던 일이다. 요즘 기쁨이 조금 필요해서 겸사겸사 3년 전 글을 다시 꺼내어 걸어본다. 




그 여자의 파랑


   서점에 갔다. 서점 바닥에 주저앉아 책 읽는 사람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인문학 코너로 갔다. 남자가 들고 있으라고 했던 책을 찾아 손끝으로 책 등을 훑어 내려갔다. 손끝에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남자가 지목한 책을 집어 들었다. 책 표지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지중해의 물빛 같은 색깔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는 시늉이라도 하려는데 누군가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를 옮기시죠.”

   남자였다. 앞장서는 남자를 따라 서점 밖으로 나왔다. 툭, 커다란 물방울이 콧잔등 위로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마주 앉은 남자의 외모는 평범했다.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와 사진을 내밀며 이런 남자 본 적 있느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할 것은 없습니다.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마음이 바뀌게 되면 어쩌죠? 해지도 가능한가요?”

  “모레쯤 저희 직원이 댁으로 방문할 겁니다. 사전에 전화로 공지 드릴 거구요. 방문한 직원이 다시 한번 계약 내용을 설명 드릴 텐데 혹시 마음이 바뀐 경우엔 그때 해지 의사를 밝히시면 됩니다.”

   이미 오래 생각했던 일이었다. 남자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물었다.

  “계약, 하시겠습니까?”

   돌이키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만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몰라도. 가방에서 펜을 꺼내 계약서에 사인했다. 계약서를 받아 든 남자가 먼저 일어났다. 카페의 전면 유리에 번지는 빗물 자국 때문에 남자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남자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멀어진 것인지 빗 자국에 스며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거웠다. 수식어를 찾아 붙이기도 귀찮을 만큼 더운 날이었다.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음료수 얼룩과 먼저 앉았던 사람들이 놓아두고 갔을 쓰레기로 지저분한 테이블, 기대기도 등을 세우기도 불편한 플라스틱 의자, 내뱉은 숨이 파고들 틈도 없게 꽉 막힌 공기, 맥주 광고 포스터에 누렇게 눌어붙은 햇볕까지 뭐하나 쾌적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런데도 거기 앉아 있었다.

   목이 말라 사 마시고 테이블에 올려둔 생수병에 맺힌 물방울들이 쉬지 않고 흘러내려 병 주위에 부풀어 오르다 이내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무겁다고 혼잣말을 했다. 당연한 것들이 무거웠다. 여름이니까 더운 것이나 회사원이니까 출퇴근을 하는 것, 자식이니까 부모를 공경해야 하고 살아 있으니까 밥 먹고 똥오줌을 가리고 예의를 차리고 남의 시선을 적당히 신경 쓰는, 그런 것들이 무거웠다. 당연한 것들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 것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 쏟았을 음료수에 젖어 눅눅해진 전단지를 플라스틱 테이블에서 떼어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하필 그때 그가 생각났다. 그의 살짝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에는 늘 한숨과 미소가 반씩 섞여 있어서 어떻게 웃어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너만 힘든 거 아냐. 너만 아픈 거 아냐. 너만 고민하는 거 아냐. 너만 고달픈 게 아냐. 찢어버리고 싶게 얇은 입술로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그에게 너만 닥치면 참 좋겠다고 말하지 못했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서는 그의 긴 그림자가 입 밖으로 비어져 나오려는 모난 말들을 틀어막곤 했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만 보는 그는 점점 무거워졌다. 무거워진 그를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던 물방울이 마침내 툭, 떨어지듯 떨어져 나갔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다간 집에 갈 수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단지가 테이블에서 반쯤 떨어졌을 때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스팔트는 새로 도포한 것처럼 끈끈했다. 자꾸 달라붙는 아스팔트와 실랑이하며 집에 돌아오니 현관문에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활짝 열린 좁은 문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인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진 전단지였다. 그림 아래에는 또렷하고 단정하게 www.shadow.com이라고 쓰여 있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섀도 닷컴의 직원이었다. 직원이 계약 내용을 다시 한번 설명하는 동안에도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직원은 들고 온 가방에서 손바닥만 한 빗자루와 쓰레받기, 핀셋과 검은색 유리병을 꺼냈다.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작업이 끝날 때까지 서 계셔 주세요.”

   직원은 빗자루로 거실 바닥을 꼼꼼히 쓸었다. 쓸어낸 먼지를 내 발 밑에 쌓아 두었는데, 오전에 청소를 했는데도 꽤 많은 먼지와 머리카락이 나와서 놀랐다. 직원은 먼지 속에서 핀셋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 작은 봉투에 따로 담고, 먼지는 검은색 유리병에 담았다.

  “이제 다 됐습니다.”

  “정말요?”

   직원은 빙긋 웃으며 검은색 유리병과 물건들을 가방에 담아 나갔다. 양손을 펼쳐 형광등에 비춰봤다. 거실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가 조금 희미해진 것 같았다. 전구를 갈 때가 되어 그런 건지 직원이 내 그림자를 가져갔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사고팔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고, 딱히 신경 써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없어지면 그 순간 뭔가 기묘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기대가 현실이 되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아침 먹고 출근하고 점심 먹고 퇴근하고 저녁 먹고 잠을 잤다. 샤워할 때마다 거울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꼼꼼하고 신중하게 변화를 살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희미해지긴 했지만 그림자도 여전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어딘가 모양이 조금 달라진 것도 같았지만 그림자는 원래 때마다 조금씩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였다. 이렇다 할 변화가 일어나야만 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왼손 검지에 종이에 베인 상처가 생겼고 턱에 뾰루지가 생겼고 가슴이 조금 커졌고 허리가 뻐근해졌고 공연히 신경 쓰이는 일이 늘었고 변비가 생겼고 생리가 시작됐다. 달라졌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달라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섀도 닷컴에 접속해 곧장 고객센터로 들어가 따지기 시작했다. 제 그림자가 여전한 이유는 뭡니까. 하루에 한 번씩 같은 질문을 올린 지 열흘 만에 답장이 왔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사무실로 찾아와 달라고 했다. 사무실로 찾아가는 것과 하루에 한 번, 매번 조금씩 다른 항의글을 홈페이지 고객센터에 올리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번거로운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 문을 여니 미로를 세워 놓은 것 같은 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책장 속에 책이 꽂혀 있듯이 미로의 구획마다 각양각색의 고양이가 앉아 있거나 자고 있거나 미로 속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당신의 그림자는 저기 앉아 있네요.”

   돌아보니 서점 근처 카페에서 만났던 남자가 서 있었다.

  “저게 내 그림자라구요?”

   남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때는요.”

   그림자들은 이곳에 와 고양이가 된다고 했다. 얼룩덜룩한 무늬의 고양이들은 충동적으로 팔려온 그림자였다. 확실한 한 가지 이유가 있어 팔려온 고양이들은 코 주변과 발 끝, 꼬리 끝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계기가 되어 팔려온 그림자일수록 밝은 색깔의 털과 일정한 무늬를 갖고 있었다.

  “이 고양이들은 여기서 살아요?”

  “아뇨. 새로운 친구를 찾게 되면 여길 떠납니다.”

  “입양된다는 말인가요? 아니, 제가 궁금한 건 왜 그림자가 그대로냐는 거죠.”

   남자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남자의 까만 동공 속에 내가 들어가 있었다. 커다래서 동그래 보이기는 했지만 위, 아래가 조금 뾰족한 것 같기도 했다.

  “따라오세요.”

   남자가 좁은 방으로 안내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남자가 불을 켜니 바닥에 동그란 빛이 맺혔다. 남자가 가만히 내 등을 밀었다. 빛 속에 서니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발끝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림자가 선명해졌어요.”

  “아주 없앨 수는 없어요. 고객님의 생활은 계속되어야 하니까요.”

  “고양이 모양이네요.”

  “어쨌든 고객님의 그림자입니다.”

  “이제 어떡하면 되죠?”

  “어떻게 해드릴까요?”

  “돌이킬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렇습니다.”

   돌이킬 수 없고 완전히 없앨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고양이 모양 그림자를 가지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쓰임새가 있다는 것일 테니까.

  “아까 그 고양이 제가 키우고 싶어요.”


   고양이와 함께 돌아왔다. 케이지에서 나온 고양이는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내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고양이의 눈에는 비 그친 뒤 맑게 갠, 깊고 푸른 하늘이 담겨 있었다.

  “파랑… 파랑아. 파랑파랑, 팔랑팔랑. 이름 좋다, 파랑아. 그치?”

   나와 눈을 맞추던 파랑이 대답처럼 귀를 파닥였다. 파랑을 위해 마련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괜히 데려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파랑에게 필요한 물건과 필요할 것 같은 물건을 찾은 다음 그중에서 어떤 것을 사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무릎 위에 있던 파랑이 한숨을 쉬었다. 마치 인터넷 쇼핑은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이라는 듯이. 고양이가 한숨을 쉬기도 할까. 그림자도 고양이 모양인 마당에 고양이가 한숨을 쉰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파랑과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파랑은 침대까지 따라왔다. 독서등을 켜고 어젯밤에 읽던 책을 펼쳐 들자 침대로 올라와 베개 옆에 자리를 잡았다. 파랑과 함께 책을 읽었다. 책장을 넘기다 파랑을 보면 녀석은 귀를 까딱이거나 나와 눈을 맞추었다. 파랑과 눈을 맞출 때마다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독서등의 조도를 낮추고 모로 누웠다. 독서등 불빛에 파랑의 그림자가 방바닥에 드리워지면서 나와 침대의 그림자까지 덮어버렸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파랑이 있었다. 파랑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가본 적 없는 지중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파랑의 푸른 물결을 타고 잠 속에 빠져들면서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마음속에 일게 할 파랑(波浪)에 대해 생각했다.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을 것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누구에게나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207호 : 畫廊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