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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Feb 20. 2017

303호 : 曖昧

백수동 35번지 이야기

百修洞 三十五番地 斷面圖 • 백수동 35번지 단면도



303호는 소위 ‘프리미엄 층’의 첫 번째 세대인데도 여자가 잘 찾지 않는 곳이다. 안타깝게도 ‘프리미엄’이라는 장점을 애매하다는 단점이 빛 샐 틈 없이 덮고 있어 볕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303호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생김은 다 달랐어도 모나게 구는 사람은 없었고, 이렇다 할 사건사고도 없었고… 그야말로 평범한 곳이었다. 하지만 평범하다, 고 갈음하기에는 어딘가 아쉬웠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만든 애매함으로 채워진 곳이다.

303호와는 별개로, 지난해 크리스마스부터 여자는 애매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작은 수납상자로 네모 반듯하게 빈틈없이 정리된 서랍장인데도 뭔가 정리가 덜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 서랍장을 열어 보듯, 마음을 뒤적거린다. 차라리 어느 한 곳 이가 빠져 있었더라면 빈틈 인대로 괜찮다거나, 빈틈을 메울 수 있는 배열 방법을 고민할 텐데 이러기에도 저러기에도 애매했던 것이다. 무엇이 애매함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어서 더 애매해졌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이도 저도 아닌 303호를 들여다보면서 ‘애매해…’를 되풀이하던 여자는 정유년을 ‘애매해’라고 부르기로 한다. 


디자인 기술자*는 여자가 기술과 예술 사이, 그 어디쯤을 고민하던 때 만났다. 곰곰 생각해 보면 개나 소나 예술가나 전문가가 될 수 있었지만 기술자는 될 수 없었다. 개나 소나 스스로 기술자라고 자랑스레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도 개나 소나 자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소평가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여러 분야의 기술자 중에서도 여자를 가장 고민하게 만든 것은 디자인 분야의 기술자들이었다. 여자가 만난 디자인 분야의 기술자들은 대개 예술가에 가까웠는데, 실제로 그들은 ‘아트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아트적인’ 것이 많았다. 하지만 여자는 그들을 예술가, 혹은 작가보다 기술자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는데 ━세상 모든 기술자를 선망하고, 세상은 기술자들 덕분에 굴러가고, 여자도 갖고 싶은 기술이 몇 가지 있었고… 그저 ‘기술자’라는 말이 멋있기도 했고━ 그들은 정말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술가의 말을 썼지만 어디에 어떤 기술을 써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때로 예술보다 더 추상적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철저하게 기술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실제로 쓰일 수 있으면서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사람들을 예술적인 기술자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예술가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예술가들이 만드는 것은 아름답지만 쓸모없는 것━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실질적인 쓸모’를 말하는 것이다. 쓸모없어도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쓸모없음으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 충분한 것들, 예를 들어 고양이처럼━이지만 디자인 기술자들이 만드는 것은 아름답고도 쓸모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들도 사람이니만큼 예술가와 기술자 사이에서 헷갈려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기술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나 소나 될 수 없다는 자부심을, 뭇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디테일 위에 서야 하는 책임감을 뿌듯해했으면 좋겠다. 


여자가 품은 사랑은 때에 따라 빛깔이 달랐다. 그 빛깔이 가장 어두웠을 때 검은 아이*를 만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검은 아이는 먹빛 보다 짙은 먹먹함으로 남아 있다. 그 먹먹함을 명분으로 삼았던 그때, 여자의 사랑은 모래 위에 쌓은 두꺼비집 같은 것이었다. 그때, 여자의 명분은 억지로 물줄기를 바꾸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새집을 달라고 빌며 아무리 헌 집을 주어도 새집이 생길 리 없었다. 새집을 가진 이에게 제 값을 치러야 생겨도 생겼을 새집인데 헌 집에 사는 이에게 자꾸 헌 집을 주면 새집이 생길 리가. 헌 집이고 새집이고 남들 다 있는 내 집이 자신에게만 없어 헛헛한 여자는 집 문제와는 별개로, 검은 아이만 생각하면 숨 쉬기가 힘들어졌다. 유독 검은 아이의 주변에는 공기가 희박했다. 있다는 것도 모르게 가득한 것이 공기인데도 검은 아이 곁에는 부족하기만 한 것은 아이가 검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이는 차라리 산소통이었다.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아이의 몸에 가늘고 긴 튜브를 꽂아, 아이에게서 나오는 산소로 숨을 쉬었다. 그래서 정작 아이에게는 자신의 숨을 위한 산소가 없었던 것이다. 검은 아이가 살던 때보다 더 많은 ‘검은 아이’들이 태어났고 ‘하얗게 질린 사람들’ 역시 수 없이 태어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검은 아이들의 몸에 꽂힌 튜브를 자르는 사람들도 태어났다는 것이다. 있는 줄 몰랐겠지만 여기 공기라는 것이 차고 넘친다고, 우리 그냥 함께 숨 쉬면 된다고 속삭이는 사람들이 더 많이 태어났으면 좋겠다. 


영국 괴짜*를 소개해 준 사람은 여자가 앙망하는 스승이었다. 여자는 스승이 스스로를 野人이라고 소개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이제와 곰곰 생각해 보면 스승은 정말로 들에 사는 사람이었다. 너른 들에 살면서 보지 않는 것이 없고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못하는 것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무엇에든 막힘이 없었다. 그런 스승이 어느 날 영국 괴짜를 소개해 주었다. 스승은 별다른 설명을 보태지 않았는데, 사람을 사람에게 소개할 때 덧붙이는 설명만큼 부질없는 게 또 있을까 싶어 ━좋아하는 것을 해주려는 것보다 싫은 것을 권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관점에서━ 여자도 영국 괴짜를 소개해 주는 이유를 묻지 않았으나 다만, 여느 때보다 조금만 더 신중하게 영국 괴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괴짜가 들려준 이야기는 대개 모호했지만 꽤 흥미로웠다. 잡힐 듯 말 듯 어찌나 밀당을 하던지 슬며시 멱살을 잡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여자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살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었는데, 이게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말로 풀어 설명하려 들면 무른 갱엿이라도 먹은 것처럼 옹알이를 하게 되어 도통 설명을 못하겠다━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그러니까 멱살을 잡아볼까 했던 건 애정 표현의 일종이었다. 어디서 요런 사람이 튀어나왔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뜬 눈으로 지새우는 여자*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여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있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이라고 여겼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가 그들의 눈을 가린 것인지 그들 스스로 눈을 감은 것인지 모호해졌다. 어쨌든 여자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그 많은 시간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감아도 보였기 때문에 그냥 뜬 눈으로 지냈다. 뜻밖의 외로움을 뜬 눈으로 지새우는 동안 여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감은 눈에 수긍하고 적응해 나갔듯 여자도 뜬 눈을 수긍하고 적응해 나갔다. 그저 사람들이 스스로 눈을 감았는지, 다른 누군가가 그들의 눈을 감겼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정말 답이 정해진 것인지, 정해진 답이 과연 맞는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고민이 그렇듯 고민은 고민이 해결된 뒤에나 답을 알려주었으므로, 여자는 도시의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감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 대개의 기다림이 그렇듯 기다림은 기다림이 끝난 뒤에나 단잠을 주었으므로, 여자는 긴 기다림과 외로움 속을 뜬 눈으로 걷고 또 걸었다.


여자는 전생이 궁금했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은 무언가가 제 어깨에 얹혀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무슨 업을 쌓아 고된지, 무슨 덕을 쌓아 좋은 일이 생기는지, 사과할 건 사과하고 고마울 건 고마워하고 그러면 이도 저도 없이 평온하게 평범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종종 저이는 전생에 무슨 업을 쌓았을까, 무슨 덕을 베풀었을까 상상해보곤 했다. 전사*는, 그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어 그저 타고난 기질 중 싸움꾼 기질이 있겠다 싶었다. 싸움꾼이라고 늘 싸우고만 다니는 건 아니었다. 싸움 안에서 빚어지는 것들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했다. 전사가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여자는 짐작할 수 없었으나 전사도 고민이라는 걸 하고 있기는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전사의 고민은 그가 가지고 다니는 칼처럼 단단하고 차가워서 좀처럼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고민이 좋기도 했지만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는 뜨거운 것이 좋았다.



303호 사람들

디자인 기술자 : 영혼을 잃지 않는 디자이너 되기 / 아드리안 쇼네시 / 김형진·유진민 / 세미콜론 / 1판 8쇄 2009년 4월 21일 / 15,000원

검은 아이 : 빌러비드 / 토니 모리슨 / 김선형 / 들녘 / 초판 1쇄 2003년 1월 2일 / 13,700원

영국 괴짜 : 예술분과로서의 살인 / 토머스 드퀸시 / 유나영 / 워크룸 / 초판 1쇄 2014년 1월 31일 / 13,000원

뜬 눈으로 지새우는 여자 :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마라구 / 정영목 / 해냄 / 개정판 1쇄 2002년 11월 20일 / 9,500원

전사 : 남한산성 / 김훈 / 학고재 / 초판 72쇄 2008년 2월 19일 / 11,000원 § 칼의 노래 / 김훈 / 생각의 나무 / 초판 2쇄 2001년 11월 20일 / 

내일만 사는 사람들 : 열린책들 세계문학 : 투명인간 / 조지 허버트 * 마의 산 / 토마스 만 * 비극의 탄생 / 프리드리히 니체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 존 르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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