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동 35번지 이야기
304호는 35번지의 두 번째 화랑 같은 곳이다. 이야기와 그림이 엇비슷한 비중으로 묶인 책들로 채워진 곳이다. 예전에는 글만 있는 책에도 드문드문 그림이 들어가곤 했는데, 요즘은 그런 책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책들이 수집돼 있다. 하지만 아쉬움을 달래기 위한 것치고, 304호의 책에는 글보다 그림이 더 많았다. 왜 이리 극단적일까,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뉘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경계가 많을수록 사람도 생각도 많아질 테고… 그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을 테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결국 사람을 따라 줄지어 서는 것인데 결국 좋은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한 점이 여자의 가슴속을 종종거리며 뛰어다녔다.
학생 1일 때의 여자와 어울리던 학생들은 만화책을 즐겨 보았다. 학생들은 여자가 교과서 밑에 깔던 소설책을 만화책으로 바꿔주었고, 여자는 또 교과서 밑에 깔린 만화책을 보면서 울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고, 만화책과 똑같이 그림을 따라 그리는 학생들의 옆에서 “내 공책에도 그려줘” 같은 부탁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무려 서른 권이 넘는 만화책을 빌려왔다. 건전한 스포츠 만화였고, 종종 불건전한 장면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니까’ 그만한 폭력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번에 열 권씩 빌려다 읽고 마지막 열 권을 돌려주려고 쇼핑백에 담아 현관에 내두었는데 그걸 여자의 부모가 발견했다. 여자는 조금 두들겨 맞았고 ━나름 건전한 만화인데 왜 보면 안 되느냐고 되물었다가 더 맞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 와중에 기특하게 ━하지만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 내 자식이 소중하면 남의 자식도 소중한 거니까━ 폐기되려는 만화책을 지켜내 무사히 돌려주었고, 얻어맞은 게 더럽고 치사해서 만화책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 말라면 더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숨어서 하는 건 ━교과서 밑에 다른 책을 까는 건 적어도 어둡고 비좁은 곳에 숨는 게 아니었으니까━ 질색이었다. 아무튼 숨어서 뭘 한다는 게 자존심 상했던 그때 그 사춘기는 만화책을 좀 멀리했고, 당시 쏟아졌던 대작 및 명작들을 고스란히 흘려보냈고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이 없어지자마자 보란 듯이 했던 소위 나쁜 짓(?) 중에 하나로 만화책을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드로메다에서 온 그녀*는 버려진 강아지 한 마리와 얼굴이 너무 큰 고양이 한 마리와 옥탑방에 산다. 지구에 적응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안드로메다에서 살던 대로 사는 것 같기도 한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떤가 싶어 그냥 바라보게 된다. 배고파하고 졸려워하고 배불러하고 나른해하고 불안해하고 즐거워하면서 사는 안드로메다에서 온 그녀가 앞으로도 쭉 배고파하다 졸려워하다 배불러하다 나른해하다 불안해하다 즐거워하길 바랄 뿐. 그녀가 그렇게 지낼 수 있다면 여자도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꽤 많은 사람들이 ‘다듬기’ 과정에서 무를 먹기도 하는데 여자는 조리되지 않은 생무를 먹지 않았다. 무생채도 깍두기도 무절임도 소고기 뭇국도 조림에 들어가는 무도 잘 먹으면서 생무를 먹지 않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말하는 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말하는 무의 청은 싱싱하게 푸르렀지만 그 말투는 어쩐지 누런 것이 느자구 없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이 가서 듣고 있으면 뭐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자포자기라기보다는, 일일이 단도리하지 않아도 될 것은 될 대로 되고 안 되어도 또 그것대로 괜찮겠지 싶은 마음이어서 좋았다.
혼자 사는 남자*는 주로 ‘빤쓰’만 입고 생활하는데 타잔이 도시 숲에 살면 이런 모습일까 싶다. 동네 골목에서 만나면 맥주 한 캔 쥐어주면 볼이 저릴 때까지 깔깔거릴 수 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낼 것만 같은 남자다. 여자는 남자가 가벼워서 좋았다. 길을 걸을 때 쥐고 걸으면 잠시 잠깐이나마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귀여운 모양의 헬륨 풍선 같은 사람이랄까.
늘 즐거운 것이 없으니만큼 만화도 늘 즐거워야 하는 것은 아닌데 즐겁지 않은 것들은 대개 다 읽고 나면 한숨이 늘었다. 한숨*들이 그랬다. 그 한숨을 듣고, ‘00에 비하면 나는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 한숨들은, 넌 나보다 나으니 참고 살라는 겁박도 아니었고 나 이토록 더 나쁘려도 나쁠 수 없는 상황에 있으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강요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오래도록 갇혀 있던 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온 것일 뿐. 한 숨의 생존을 축하하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저 아직 남아 있는 생존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삶이 누군가에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또 한숨이 느는 것이다.
고양이 키우면서 그림 그리고 이것저것 예쁜 것들을 만드는 삼촌과 그의 조카가 그림으로 주고받는 생각들을 묶은 삼촌과 조카*는 만듦새가 예뻐 손이 갔던 책이다. 삼촌의 그림은 좋았지만 조카의 그림은 옳게 봐지지 않았다. 괜한, 부질없는 질투가 여자의 눈을 가리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만화가의 고양이*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누구든 고양이와 함께 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으니 이 만화가가 두 마리의 고양이와 산다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이 만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만화가가 그리는 그림들은 워낙 무섭고 괴기해서 비위가 약한 사람은 그가 그린 만화책 반경 30cm 이내 접근을 안 하는 것이 좋다는 풍문이 사실로 증명된 바 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이 만화책에서도 고양이들은 종종 ‘비현실적으로’ 등장한다. 날씬해도 뚱뚱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세상에 못 생긴 고양이는 없다는 풍문━어디선가 못생긴 고양이 사진을 보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못생겼다고 하기에는 아쉬울 만큼의 매력이 있었으니까━을 보기 좋게 엎으려는 듯 그의 고양이들은 종종 세상 무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세상 귀여운 고양이를 세상 무섭게 그리는 걸 보면 그 만화가는 그 분야에서 난 놈이긴 난 놈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여자는 자신도 언젠가 난 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만화가의 ‘무서운’ 고양이들에게 그 방법을 물어보았는데, 고양이들은 그저 빤히 마주 볼 뿐이었다. 여자는 ‘사람 홀리는 유리구슬’에 낚이기 전에 황급히 만화책을 덮었다.
복길*은 이별을 이야기하는 고양이다. 고양이와 인간의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양이다. 고양이와 인간의 시선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고양이다. 다르다는 것을 알면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 많지만 그중에 이별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복길을 생각하면 슬퍼진다. 그래서 여자는 함께 사는 고양이들에게 ‘지금’ 잘해주어야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일상이라는 것은 서운해하고 미워하는 일도 포함돼 있는 것이어서, 하는 수 없이 사랑하는 일만큼 미워하는 일도 열심히 하는 중이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즐거운 모든 일들을 똘똘 뭉쳐서 조그맣고 단단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될 때까지.
낸시*는 무릉도원에 사는 고양이다. 그 무릉도원을 만든 건 쥐였지만, 쥐들은 자신들의 세계에 내던져진 천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는… 하필이면 천적이 어렸고, 대단히 귀여웠으며, 자라면 귀여움도 더 커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무모한 약자들은 낸시를 상대적인 약자로 만들기도 하지만 이내 공동체 속 누군가의 딸, 친구, 동생으로서 끌어안는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을 때, 각박한 세상에 등 돌리고 싶을 때,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무릉도원을 꿈꾸고 싶을 때 낸시를 만나면 세상 모든 근심을 다 잊을 수 있다. 잠시뿐일지라도….
만화가 홍*의 그림들은 여자의 취향을 ‘저격’했는데, 다른 만화책들을 보면서 한 번도 느낀 적 없었던 디테일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림도 만듦새가 좋을 수 있고 좋아야 한다는 것, 그 만듦새가 좋을수록 이야기도 더 와 닿는다는 것. 만화가 홍의 그림들을 모두 수집하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해서 여러 작품 중에 하나만, 고르고 골라 구입했는데 볼 때마다 수집하지 못한 다른 작품들이 아쉬웠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도우미 고양이*에 대한 꿈과 낭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같이 사는 고양이가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밥도 지어다 주고… 고양이가 말을 하고 사람처럼 걸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을 위해 그런 일을 할 리 없지만 그래서 한 번쯤 꿔보게 되는 꿈같은 것이다. 일본에 사는 도우미 고양이는 고양이 손이라 앞치마 고정끈 리본을 세로로 묶고 청소하다 말고 그루밍을 하지만 음식을 정말 맛있게 만들고 가족 구성원들을 세심히 걱정하고 버려진 자신을 돌봐주었던 도련님과 다시 만날 날을 그리며 산다. 그나저나 벌써 8권이나 되었는데도 집구석은 화합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도련님을 만날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기왕 모으기 시작한 것 안 모을 수도 없고 난감하지만 연필로 슥슥 그린 도우미 고양이가 좋아서 다음 권을 기다리는 중이다.
안드로메다에서 온 그녀 : 우주인 vol-1·2 / 이향우 / 길찾기 / 초판 1쇄 2007년 1월 20일 / 12,000원
말하는 무 : 푸른머리 무 / 야마자키 타케시 / 대원씨아이 / 1권 초판 2007년 9월 15일 § 2권 초판 2007년 11월 30일 / 각 권 5,000원
혼자 사는 남자 : 그래요, 무조건 즐겁게! / 이크종 / 예담 / 초판 2쇄 2010년 10월 10일 / 13,800원
한숨 : 단편만화 수필집 끙 / 전지 / 아이코믹스 § 숨비소리 1·2 / 휘이 / 창비 / 초판 1쇄 2016년 4월 20일 / 각 권 13,000원
삼촌과 조카 : 고양이 삼촌 / 유재선·유정이 / 배하진 / 레프트로드 / 초판 2010년 3월 5일 / 9,800원
만화가의 고양이 : 이토 준지의 고양이 일기 욘&무 / 이토 준지 / 대원씨아이 / 1판 6쇄 2010년 7월 6일 / 6,000원
복길 : 상상 고양이 상·하 / 김경 / 애니북스 / 초판 2015년 6월 22일 / 각권 14,000원
낸시 : 고양이 낸시 / 엘렌 심 / 북폴리오 / 초판 8쇄 2015년 3월 22일 / 15,000원
만화가 홍 : 고양이 장례식 / 홍작가 / 미들하우스 / 1판 1쇄 2010년 7월 21일 / 9,800원
도우미 고양이 : 오늘의 네코무라씨 / 호시 요리코 / 조은세상 / 하나, 1판 1쇄 2008년 12월 24일 § 둘, 1판 1쇄 2009년 5월 20일 § 셋, 1판 1쇄 2009년 12월 24일 § 넷, 1판 1쇄 2010년 6월 24일 § 다섯, 1판 1쇄 2011년 7월 29일 § 여섯, 1판 1쇄 2013년 3월 25일 § 일곱, 1판 1쇄 2014년 7월 28일 § 여덟, 1판 1쇄 2016년 7월 15일 / 각 권 8,000원